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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30
총서_2008.7.20_서병국_요(遼) 제국 거란족의 한족(漢族) 통치연구―'한거(漢契)일체적중화사상'의 허구성 비판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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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국, 〈요(遼) 제국 거란족의 한족(漢族) 통치연구―'한거(漢契)일체적중화사상'의 허구성 비판〉《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981~쪽, 2008.7.20; 5편 고려시대(요.금.원)사의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 연구사
Ⅲ. 중화인민공화국의 거란사 침탈논리와 이에 대한 비판
   1.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건국과 한성천사(漢城遷徙)
       1) 일라부내(迭刺部內)의 전제화(專制化)와 한족의 권유
       2) 한성천사와 경제력 확보
       3) 창업(創業)과 한족의 기여 문제
    2. 요 제국 초기의 한족통치
       1) 요 제국의 석경당 옹립(石敬瑭擁立)
       2) 요 제국의 중원 직접통치 기도
          ⑴ 한족의 거란 항거
          ⑵ 조연수(趙延壽)의 한족 직접통치 실패
          ⑶ 요 제국의 중원 직접통치 실패
    3. 한족식 통치체제로의 전환
        1) 한관(漢官)의 중원 도주와 상업정책의 대두
        2) 한족식 통치체제의 도입
        3) 거란식 통치체제의 극복
    4. 한족식 제권(帝權)의 강화
         1) 한덕양(韓德讓)의 과거제 도입
         2) 한덕양의 거란관료 추천
         3) 송나라 포로의 기용과 전연(澶淵)의 맹약
         4) 한덕양 계열의 장기 집권과 폐해의 극복
    5. 요 제국의 농업정책과 한족의 요 제국에 대한 태도
         1) 요 제국의 농업정책
         2) 이처온(李處溫)에 의한 요 제국의 양분
         3) 한족의 요 제국에 대한 태도
Ⅳ. 결론

Ⅰ. 머리말

한족의 역사상 정복왕조의 효시라는 요 제국은 거란족 등 유목적인 부족민과 지나인(한족), 발해인 등의 농경민이 양대 구성 분자로 이루어져 그 사회와 문화는 이중적 요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요 제국을 세운 민족이 거란족이므로 이중성은 이들에 의해 부정될 듯하지만  건국 당시는 물론 그 초기부터 한족의 지식층이 직접 건국과 발전에 가담한데다 한족의 농경민이 야율아보기에 의해 거란의 내지로 강제 이주되어 거란족과 함께 생활한 관계로 이중성은제도상 또는 실제적으로 요 제국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거란족은 그들의 고유한 생활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 지배층은 한족과 어울려 생활함에 따라 거란족의 생활과 문화의 폭이 축소되는 대신 한족의 생활과 문화의 영역이 확대되는 추세였다. 거란족이 통치민족인데도 한족의 생활을 따르는 추세였다는 면에서 요 제국의 한족 통치는 거란사에서 비중이 크다고 하겠다.
요 제국의 한족 통치 연구는 요 제국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종래의 연구에서 한족을 수용함에 따라 나타나는 정치적 현상이 주로 다루어져 밝혀진 것이 이중성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전제권 확립과 이에 대한 한관(漢官)의 기여를 연구한 결과, 한관의 기능과 역할을 밝히려는 시도도 과거의 연구에서 보인다. 과거의 연구는 거란 사회의 전제화가 외적인 요인으로 기인되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한관의 기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요 제국 창업의 주체세력이 거란족이므로 창업 초의 전제화 경향은 거란 사회에 내재하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요사』에서 보이는 거란족의 전승(傳承)에 관한 기록 중에 농경에 관한 것도 있으나 종래의 연구에서는 경시되어 왔다. 태조 이전의 농경에 관한 기록이 인정된다면 거란의 전제화 경향이 농경성에 의거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거란의 전제화 경향이 거란의 내재적인 발전단계라고 본다.
 종래의 연구에서 거란족과 한족의 정체(政體)인 요 제국의 특성이 밝혀진 것은 큰 수확이지만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 예가 한족 통치와 요 제국 발전의 관련성이 소홀하게 다루어진 점이다. 이에 거란족의 전제화를 주도한 일라부내(迭刺部內)의 전제화 경향과 한족 통치의 요체를 검토할 생각이다.
요 제국의 경제에 대한 관심은 창업 전후 시기부터 중국 주변의 한족과의 접촉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창업 직전의 경제적인 관심도를 뜻하는 것이 한성천사(漢城遷徙)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태종의 한족 직접 통치기도는 한족적인 경제 체제로의 전환상 불가피하지만 거란족과 한족의 경제적 마찰은 한족 직접 통치의 실패에 원인이 되었음을 중점적으로 살피려 한다.
중원으로 진출한 이후 요 제국의 유목경제 구조에 한족적인 요소가 수용되어 목종(穆宗) 때에는 한족적인 상업정책이 대두하였다. 이의 대두가 한족 통치에 일조가 되었는지 또한 이로 인해 한관의 기능이 발휘되었는지 철저하게 검토하고 경종(景宗) 때에 보이는 한족적인 통치체제의 도입과 거란적인 통치체제의 극복에 대한 한관의 관심과 기여에 관해서도 다룰 생각이다.
경종 말년부터 보이는 거란적인 통치체제의 극복으로 성종(聖宗) 때에는 한족적인 황제권이 강화되었다. 한관의 이에 대한 기여를 중점적으로 다룰 생각이다. 또한 성종 때에는 한족 통치를 경제적으로 주도한 농업정책이 마련되어 특히 도종(道宗) 때에는 요대 농업생산량의 최고 기록이 수립되었다. 요 제국은 천조제(天祚帝) 때에도 농업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한족은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림에 따라 한관과 거란 관료의 기능상 구분도 철폐되었으며 그 결과 한관이 요 제국을 주도하였다. 이의 호례는 요 제국이 한관에 의해 양분된 것이라고 본다. 이 무렵 일반 한인의 요 제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의 표현은 누대에 걸쳐 추진된 농업정책의 결과일 것이다. 요 제국에 대한 한족의 지지가 다른 정복국가에서도 나타나는지 비교함으로써 정복국가로서 요 제국의 성격이 밝혀지리라고 본다.
종래 한족과 관련된 거란사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거란족은 통치민족으로서 한족을 통치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이중체제의 존립이다. 요대 거란족과 한족은 모두 거란의 통치권 안에서 거주했으나 생활 방법을 달리하고 있었으므로 거란족은 두 민족이 한 몸이라는 ‘한거일체관념(漢契一體觀念)’을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종래 요 제국의 한족통치 연구에서도 이런 관념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 없다. 거란 통치자의 국가통치 차원에서 농업정책과 상업정책이 대두하여 요 제국이 한족적인 국가로 전환되어 이중체제가 일원화되기는 했으나 거란족이, 거란족과 한족이 모두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거나 거란족이 한족의 일원이라는 ‘한거일체관념’을 인식하지는 않았다.
‘동북공정’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관을 지배하고 있다 보니 거란사 연구에서도 종래의 연구에서 볼 수 없는 한거일체관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거란사 연구에서 신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란족이 반복적으로 강조했다는 한거일체관념이다. 과연 거란족이 이를 강조했다면 요 제국의 한족 통치 연구는 다시 해야 할 문제이다.
요 제국의 한족 통치 연구에서는 먼저 한거일체관념이 실제 존재했는지, 또한 한족 통치가 이 관념을 배경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두루 살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요 제국의 한족 통치를 연구함으로써 한거일체관념이 실제 존재했었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Ⅳ. 결론

요 제국의 이상과 같이 요 제국의 한족통치 성공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한족에 대한 경제시책이며 이의 추진이 한관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거란족이 8세기 전반에 당나라의 기미(羈縻)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재편된 8부족의 원칙은 씨족제를 바탕으로 한 북방민족의 봉건체제이었다. 신흥 일라부(迭刺部)의 합류로 전제화가 시대적 주류로 대두되었으나 칸(可汗)을 선거하는 질립제(迭立制)의 우세로 인해 부득이 거란 정권의 중심부에서 강제적으로 밀려나 남사(南徙)한 것이 아보기의 한성 천사(漢城遷徙)이었다. 그러나 아보기는 일라부의 이리근(夷離菫)으로 남정을 통해  다수의 한족을 수용하면서 농경과 상업을 주업으로 하는 한족의 경제체제에 접근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술율태후(述律太后)의 헌책에 따른 이른바 염지(鹽池) 살해사건으로 거란 부족장들의 정치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전 거란에 그의 전제권이 확대되었다. 이는 태조시대에 한관(漢官)이 전제화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지만 한족의 경제적 활동이 기여한 것이 적지 않았던 것은 능히 추측할 수 있다. 태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 21명 중 한관이 3명에 불과한 것은 이의 입증인 동시에 국초에 한관이 요 제국에 미친 영향력의 한 단면 정도로 이해된다.
초기에 거란으로 들어온 한관 중에 다시 중원으로 도망한 한관도 있었으나 요 제국안에서 성장한 한관은 좌명공신을 비롯하여 대개 생포된 한족이었다. 한관은 관료적 자질 때문에 기용되었으나 기용은 태조에 의해 주도되고 있어, 태조의 선택과 판단에 그의 진로와 운명을 의탁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대략 목종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요 제국 시대 한관의 태도를 보면 황제의 처우와 그들이 처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A) 한관이 중원으로 도주한 이후 다시 거란으로 귀환하거나, B) 귀환을 단념하기도 했으며, C) 도주에 실패한 한관은 문죄를 모면하기도 하였으며, D) 그들을 대우하거나 중용하던 황제가 사망하면 문죄당하는 등 4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A)의 대표적인 한관은 태조시대의 한연휘(韓延徽)이며, B)의 좋은 예를 보인 한관은 세종시대의 서대부(徐臺符)이었다. 태종시대의 장려(張礪)는 C)의 대표적인 한관이며, 목종시대의 이한(李瀚)은 D)의 경우에 해당되는 한관이었다.
4유형의 한관의 공통점은 황제의 장서기(掌書記)이며 이로 인해 황제와 친숙한 관계가 맺어졌다. 따라서 태조시대의 한관만 해도 정책 결정에 참여하지 못해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지 못했음이 보이며, 부여된 임무는 다만 이주된 다수의 한족 통치와 관련된 분야이었다. 즉 거란에서의 생활환경을 한족의 방식으로 개선하여 한족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을 비롯하여 풍속ㆍ예의ㆍ문서를 담당하는 장서기의 소관사가 주요한 업무이었다.
태조시대 한관의 이러한 태도는 태종시대에 이르러 다소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즉 A)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B)정권의 수립을 기도한 것이 그것이다. 언급된 장려는 A)의 대표적인 한관이며, 석경당(石敬瑭)ㆍ조연수(趙延壽) 부자, 그리고 두위(杜威) 등은 B)의 경우에 해당된다. 장려와 조연수의 정치이념상 공통점은 석진(石晋:亡晉)의 멸망 이후 한족에 의한 중원 통치를 기도한 것이었으나 중원을 직접 통치하려는 태종의 강한 의지로 장려의 건의와 조연수의 즉위 이념은 거부되었다. 이로써 거란의 군(軍)ㆍ정(政)을 배경으로 한족형 통치를 독자적으로 꾀하려던 한관의 정치적 이념이 구현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한편 태종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16주의 할지(割地)를 제의한 석경당을 괴뢰국가인 대진(大晋) 황제로 책립한 것은 거란의 남정(南征) 배경이 경제적 측면에 있었음을 뜻한다. 그 뒤 여론을 무시하고 할지를 주도한 석경당이 사망한 직후에 실리적인 회역(回易:晋遼貿易)의 단절과 회도사(回圖使:貿易從事官)의 살해가 단행되었다.
거란족의 자급자족적 보급수단인 타초곡(打草穀)은 중원의 한족과 경제적 마찰을 일으켜 이에 따른 한족의 강력한 저항은 태종이 지녔던 중원에 대한 직접통치의 염원을 철회케 하였다. 이와 같은 직접통치의 실패는 중원에서 거란적 요소와 한족적 요소의 타협이 불가능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태종의 귀환 시에 타초곡으로 인해 중원의 농촌이 황폐된 책임이 조연수에게 전가된 것은 이의 입증이 된다. 한편 중원 통치의 실패를 자인한 태종은 귀환할 때 망진의 다수 관료가 수행케 하였으나 그의 돌발적 사망으로 수행이 백지화되어 대폭적인 한관의 기용 기회가 무산되었다. 이로써 신한관에 의해 이루어질 새로운 면모의 한족 통치는 무위로 그쳤다. 그러나 태조 때의 한아사(漢兒司)가 태종의 재위 시에 한인추밀원(漢人樞密院)으로 개편된 것은 중원을 직접 통치하려는 태종의 정치적인 소신이 제도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
태종을 계승한 세종의 귀환에 수행한 망진의 관료는 서대부와 이한 2명뿐이며 양인만 수행한 것은 이들이 세조의 장서기이기 때문이다. 망진 백관의 귀환 백지화로 세종시대에 기용된 한관은 후진의 멸망 직전에 투항한 관료가 주류를 이루었다. 16주의 할지(割地) 이래 다수의 한족이 요 제국의 구성분자로 수용됨으로써, 한족 문제를 다루는 거란남추밀원의 추밀사에 망진인 고훈(高勳)이 임명된 것은 당연시되지만, 그는 능력보다 거란의 권문(權門) 또는 귀족과의 결탁을 배경으로 기용된 것이다.
세종의 친한족적 경향으로 한관 기용은 당연시되지만 한족 중시(重視)에 대한 거란관료의 불만이 표면화되어 야기된 것이 소한(蕭翰)의 모반이었다. 거란에 대한 석진의 경제적 저항 이래 나타난 중원의 반거란적인 분위기는 한족 중시에 대한 거란관료의 불만과 연계되어 중원에 대해 소극적인 면을 보였으나 한인추밀원의 존속은 한족통치의 효율성을 의식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세종시대에 엿보이는 소극적인 대(對)중원 관계는 그 후 목종시대에 이르러 불간섭주의로 나타났으나 중원과의 경제적 교류는 이전보다 강화되었으며 신한관이 따로 대두되지 않아 전대의 한관이 그대로 기용되었다. 이 무렵에 대표적인 한관은 고훈(高勳)이며 뒤를 돌봐주던 세종의 사망으로 응력 2년에 후주(後周)로의 도망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이한을 구명한 인물도 고훈이었다.
서대부와 이한을 비롯하여 호교(胡嶠, 소한의 장서기)의 도주 기도는 그들을 돌봐주던 황제 또는 고위층의 거란관료가 한관의 처신 또는 거취에 크게 작용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한의 도주에서 주목할 것은 도주가 실패했으나 이한에 의해 요 제국의 실정이 후주(後周)에 구체적으로 폭로된 점이다. 이 시기에 거란 통치자의 대(對)한족관을 보여주는 한 예는 응력 2년에 홍수로 인해 접경지대의 이주된 한족 20~24만 명의 후주 유입이 방치된 것이다. 이 유출 사건은 거란의 한족에 대한 경제적 시책이 일관성 있게 정착되지 못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사건이라고 하겠으나, 거란족에 대한 경제정책은 새로운 면모를 나타냈다. 즉 정치, 군사, 또는 외교 면에서 요 제국에 의존하는 중원 국가와의 적극적인 무역관계 또는 조부(租賦)의 대폭 경감 등은 거란 사회의 한족적인 화폐경제체제의 도입에 있어 선행적인 조치라고 하겠다.
목종시대의 경제정책에 있어 한족 경시 경향과 거란족 중심의 통치체제로의 이동에 따른 여러 가지 모순이 나타나, 경종 즉위 초부터 시급한 것은 거란적 통치체제의 극복 문제였으며, 반동적으로 한관의 기용만 해도 대폭적이었다. 따라서 부계가 다른 목종시대의 한관 또는 태종시대의 한관까지 기용하는 한편 신한관의 기용도 병행되었으나 시대적으로 요청된 정책 전환은 경종 옹립의 일원인 고훈의 소극적 자세와 무질서한 경종의 생활이 정책 추진에 차질을 일으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족의 경제생활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요 제국의 경제정책 확립은 성종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 옹립을 주도한 한덕양(韓德讓)은 당시 불안하였던 황제권의 안정을 위해 유능한 한족을 다수 한관으로 기용하였으며, 그것은 주로 천거제에 의존하였다. 이는 황제권이 불안한 초기에는 과거제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며 과거제는 한덕양의 사후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생존 시에 이의 운영이 없는 것은 아니며 천거제로 인해 활성화 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다시 특기해야 할 것은 생포된 송나라의 관료와 진사가 특채되었다는 점이다.『요사』열전에 실린 과거급제자 20명 중 9명이 성종시대의 인물이었다. 수 미상의 생포된 송나라 출신의 관료와 진사로서 열전에 실린 인물은 무백(武白)과 왕계충(王繼忠) 2명이 눈에 띄며 9명 중에 한관의 최고위직인 남원추밀사와 이부재상(二府宰相)에 임명된 인물은 4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다시 도종시대에도 벼슬하여 정책 결정에 참여하였으나 주목되는 인물은 왕계충이었다. 포로 출신이므로 그의 벼슬과 관역(官歷)에는 다소 우여곡절 같은 것도 상상된다. 그러나 실제는 거란화된 한덕양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왕계충이 중용된 것은 송나라와 체결한 전연(澶淵)의 맹약시에 발휘한 수완에 대한 논공 때문이었다. 그는 정책면에서 한덕양과 노선을 달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한덕양과 왕계충이 각기 국성(國姓)을 사성 받은 사실 또는 거란 관료를 상위직에 추천한 점으로 보면 양인의 정치적 비중이 이해될 것이다. 한덕양의 거란 관료 추천으로 그의 생존 시부터 그를 주축으로 한 당파까지 결성되었다. 성종의 황부(皇父)로 인식되어 그 자신 공물(貢物)까지 사취한 것으로 보면 한덕양 당파의 결성은 관계라는 특수사회에서는 오히려 당연하다. 한덕양ㆍ왕계충 양인의 정치적 대립은 한덕양의 사후에 나타났다. 이 대립은 한덕양의 추천을 받은 소합탁(蕭合卓)이 북원추밀사에 오를 때 왕계충이 자당인(自黨人)을 추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왕계충의 추종자가 북원추밀사로서의 관료적 자질이 있는데도 성종은 소합탁의 승진을 허가함으로써 한덕양의 당파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 주었다. 성종은 한덕양의 사후에도 당파를 강화하기 위하여 종실녀(宗室女)와 소합탁 아들의 혼인을 주선함으로써 이 당파는 흥종 중희 6년까지 존속되었다. 왕계충의 당파에 대한 성종의 경계는 왕계충의 정치적 활동을 견제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황제권 강화를 한덕양의 당파에 의존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흥종시대에 크게 대두된 거란 관료의 주체의식은 한관의 효용성이 이전에 비해 감소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구양수의『신오대사』의 사이부록(四夷附錄)에 요 제국이 부전(附傳)된 것에 대해 도종시대의 한관 유휘(劉輝)가 크게 분개한 사실로 보면 요 제국의 말기까지 한관은 거란 관료와 더불어 공동 운명체 의식을 견지하였던 것 같다.
한편 성종시대부터 나타난 다각적인 농업정책으로 한족의 안정된 경제생활이 지속되어 천조제시대에는 일반 한인의 요 제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까지 표명되었다. 피지배계급인 일반 한족의 요 제국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이라고 한다면, 한관의 요 제국에 대한 태도 역시 이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할 것이다. 천조제시대의 여진정책을 주도한 한관 이처온(李處溫)만 해도 천조제의 서천(西遷)으로 빚어진 혼란을 편승하여 요 제국의 양분까지 획책하였고 또한 대송납토(對宋納土)에 따라 망명까지 기도하였으나, 이는 집권 연장의 실패로 인한 자위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처온 등 한관의 요 제국에 대한 태도는 총체적으로 긍정적이었다고 보며, 아골타에게 항복한 남경의 한관이 일괄적으로 한관인 장곡(張穀)에 의해 처형된 것은 이의 구체적인 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한족은 요 제국 초기에 집단적으로 요 제국에 수용됨으로써 생활환경과 풍속의 차이로 인한 갈등 때문에 한족과 한관의 중원으로의 도주 현상이 일어났다. 더욱이 태종의 중원 남정과 귀환 시에 일어난 한족의 저항 또는 세종의 귀환 시에 수행한 한관의 중원 귀환은 총체적으로 요 제국의 한족에 대한 경제적 시책 면에서 배려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관의 요 제국에 대한 기여는 과대평가될 수 없으며 사실상 한관의 기여는 일반 한족에 대한 경제적인 배려가 농업 정책면에서 다변화된 성종시대부터 나타났다.
천조제시대까지 한족과 한관의 상호 의존성은 한족적인 입장을 초월하여 마침내 요 제국을 ‘아조(我朝:우리 나라)’라고 지칭함으로써, 요 제국의 한족 통치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족 지배에 대한 요 제국의 이와 같은 성공을 보게 한 것은 거란족과 한족의 사회적 동질성 또는 행정과 경제의 이원적 체제가 한족의 농경과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1원적 경제체제로 이행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요 제국은 그 말기에 이르러 경제적인 생활면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와 별로 큰 차이가 없이 되어갔다. 여기서 한족의 요 제국에 대한 긍정적 지지를 금대 또는 원대의 그것과 비교하면 너무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금대의 여진정책은 여진족을 경제적으로 구제하기 위하여 한족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한족의 지지를 상실했으며, 원대의 몽골 정권 역시 남인에 대한 철저한 억압으로 한족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런 점으로 보면, 요 제국에 대한 한족과 한관의 지지는 제 정복왕조 국가 중에서 특이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성종시대부터 요 제국의 한족에 대한 농, 상업정책으로 이원체제가 1원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한족과 한관은 요 제국을 한족의 국가와 동일시하여 요 제국을 ‘아조’, 즉 ‘우리 나라’라고 지칭하는 등 말기까지 지지하였다. 이로써 요 제국의 한족 통치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도 좋다. 그런데 동북공정이란 관제 연구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거란사의 연구 결과는 거란족이 ‘한거일체사상’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즉 이는 거란족이 한족과 조상을 같이함으로 한족의 일원이라는 것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연구자는 이를 ‘신중화 관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지적했듯이 한족은 요 제국을 ‘아조’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거란족과 한족이 같은 조상의 후손이 아니고 요 제국을 이민족의 정권이 아니라 마치 한족이 세운 정권으로 단정 지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거란족이 한족의 일원이라는 이른바 ‘한거일체사상’은 거란족이 만든 것이 아니고 ‘동북공정’의 소산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