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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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30
총서_2008.7.20_김위현_요대의 발해유민연구 - 중공학자들의 논저에 대한 토론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조회 : 12,132  
   dbpia1181561.pdf (27.2M) [3] DATE : 2009-05-29 01:30:54
김위현, 〈요대의 발해유민연구 - 중공학자들의 논저에 대한 토론〉《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915~쪽, 2008.7.20; 5편 고려시대(요.금.원)사의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서론
Ⅱ. 연구사
Ⅲ. 거란의 발해 유민정책연구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의 논지에 대한 토론
   1. 회유책
     1) 발해왕족을 거란귀족에 편입
     2) 동란국(東丹國) 건립에 관한 논리에 대한 토론
     3) 유환의「거란의 동란국민 천사 연기에 관하여」
     4) 정니나(程妮娜)의 「요대 발해인지구의 동란국 연구분석」
   2. 진압책
     1) 잔부(殘部)의 반항과 진압
     2) 대송마무역로(對宋馬貿易路)의 차단
     3) 발해(渤海)ㆍ여진(女眞) 거지(居地)에 대한 완충지대 설치
 Ⅳ. 발해 유민에 대한 분산책
     1) 왕성국의 「요대 발해인을 논함」
     2) 양보륭의 「요대 발해인의 도망과 천사」
     3) 위국충(魏國忠)ㆍ주국침(朱國忱)의 「발해인구고략(渤海人口考略)」
     4) 왕덕충의 「요조의 민족천사 및 그 평가」
     5) 양복서(楊福瑞)의 「요조 이민문제 연구」
     6) 무옥환(武玉環)의 「요나라의 발해 이민 정책」
 Ⅴ. 유민(遺民)의 국가재건시도(國家再建試圖)
    1. 후발해(後渤海)
    2. 안정국(定安國)
    3. 흥요국(興遼國)
    4. 대발해(大渤海)
 Ⅵ. 결론 및 요약

Ⅵ. 결론 및 요약

2000년 전후한 시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 학자들의 무리한 논지(論旨)와 주장에 대하여 논문 작성상의 문제점과 내용에 대하여 문제점을 지적코자 한다.
먼저 논문 작성상에 있어서의 결점을 지적코자 한다.
첫째, 원사료(原史料)를 넓게 수합(收合)하여 분석하고 연구하여야 함에도 자국의 사료 말고는 거의 활용하지 않고 있으며, 어떤 때에는 자국 사료마저 검색(檢索)하지 않고 쓴 경우가 있다. 또 서로 상반(相反)된 사료는 가신성 비판(可信性批判)을 거친 뒤에 취사(取捨)의 변(辯)이 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는 부분이 산견(散見)된다.
둘째, 선인(先人)들의 연구 성과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중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연구 성과마저 외면한 경우가 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수집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하여 검색하고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논리상 맞지 않는 부분을 억지로 맞추는 식의 논리는 연구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결론을 얻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용상 문제점은 무엇인가?

1. 동란국(東丹國)의 성격에 대한 관점이다. 국가냐 특수행정단위이냐는 것이다. 행정 단위의 하나라고 규정하고 어느 정도 내부적으로 고유의 경제, 정치제도를 보존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독립 외교와 경제무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행정 단위였다면 외부적 활동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라는 이름으로 후당과의 교섭 내용을 외교 활동으로 보려는 것 같은데 이는 후발해의 존재를 무시하는 데서 오는 오류인 것이다.
2. 후발해 존재 여부? 후발해 존재에 대해서는 1916년 일본인 와다세이가 입증하였고, 1943년 역시 일본인 히노 카이자부로가 보충하였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74년 이용범, 1981년 김위현, 1995년 한규철이 이를 인정하며 보충한 바 있다.
3. 발해문화는 순전히 성당문화(盛唐文化)의 영향과 한인(漢人)들과의 접촉에서 얻어진 것인가? 물론 당문화와 한인들과의 접촉에서 얻어진 요소도 있다. 그러나 근원적인 것은 고구려문화이다. 발해 주민의 대다수가 고구려인인데 발해국이 되었다고 해서 고구려인이 자기문화를 모두 털어내고 당문화로 바꾸었다는 식의 주장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
4. 발해와 여진은 동족(同族)인가? 여진은 만몽(滿蒙) 강역 내에 살고 있던 잡다(雜多)한 종족을 범칭(汎稱)해서 부른 이름이다. 발해 유민(渤海遺民)도 거란 중기 이후에는 여진으로 불리었다. 게다가 금(金)나라를 세운 완안부(完顔部)는 신라(新羅) 멸망 후에 옮겨간 종족이다. 따라서 완안여진과 발해는 협의의 동족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5. 발해 초기 주민구성 문제에 있어서 발해 초기의 인구를 약 7~80만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신형식은 130만으로 보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종국은 고구려 후손인 발해 전체 주민 수를 500만~600만 명으로 계산하였다. 이는 숫자의 차이가 지나치게 차이가 난다. 계산에 명백한 자료 제시가 필요하다.
6. 발해 멸망 후 장기간 한인과 잡거(雜居)하면서 한족(漢族)으로 융합되어 한족 8종의 하나가 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말갈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700년 간 지나오면서 융합되지 않았다가 어떻게 이때 와서 갑자기 융합되어 새로운 족명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과 이론이 필요하다. 발해인은 금 건국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금대에 정치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元)나라 때에도 그 존재만은 남아 있었다. 금(여진), 원(몽골), 청(만주)대에 여진이나 몽골에는 융합이 안 되고 오직 한족으로만 융합이 되었다는 사례와 그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다.
     위와 같이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다. 같은 문헌에 나오는 사료를 분석하고 해석하였다면 응당 결과가 같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는 과학적 객관적 연구가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금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의 주장처럼 현재 영토에 과거에 있었던 모든 역사를 자국 역사로 한다는 주장에 따른다 하더라도 고구려, 발해 영역에는 지금 4개국이 점유하고 있는데 어떻게 모두 자기 나라 역사라 주장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