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학회)
아이디 비번 자동로그인
학회지발간목록
역사고고학논저검색

 
작성일 : 09-05-29 01:33
총서_2008.7.20_한규철_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연구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조회 : 12,397  
   dbpia1181556.pdf (18.7M) [3] DATE : 2009-05-29 01:33:52
한규철,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연구〉《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713~쪽, 2008.7.20; 4편 중화인민공화국의 발해사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 한ㆍ중ㆍ일의 주민구성 연구
    1. 연구 개관
Ⅲ. 주민구성을 말갈로 보는 주장
    1. 발해건국과 대조영 세력
    2. 발해의 초기 국호 및 발해국호 사여설(賜與說)
    3. 발해족 형성론
    4. 지배층=고구려유민, 피지배층=말갈설
Ⅳ. 고구려ㆍ발해와 말갈
    1. 사료속의 말갈
    2. 고구려와 말갈
    3. 발해와 고구려, 말갈
Ⅴ. 발해인의 고구려 계승성
    1. 영토와 주민의 계승
    2. 언어와 풍속의 계승
    3. 온돌과 생활문화의 계승
Ⅵ. 맺음말

Ⅰ. 머리말

발해를 보는 시각은 남북한을 비롯해서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 각각 다르다. 이러한 원인은 발해사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적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의 역사서술에서 가장 정통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는 기전체(紀傳體)나 편년체(編年體) 형식의 사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른바 ‘발해본기(渤海本紀)’ 같은 역사서가 전혀 없어 발해의 실상을 자세히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구당서(舊唐書)』「북적열전(北狄列傳)」에 기록된 ‘발해말갈(渤海靺鞨)’과『신당서(新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에 나오는 ‘발해(渤海)’ 정도이다.『신당서』가 발해인 장건장(張建章)이 기록했다는『발해국기(渤海國記)』를 참조했다는 것은 발해인들의 기록이 전혀 없었던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발해가 이민족(異民族)인 거란(契丹)에 멸망함으로써 그들의 역사를 계승해서 쓸 사람들을 상실했던 것이 발해사를 잘 알 수 없게 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발해의 정치ㆍ행정제도에 대해서는『신당서』를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구당서』와『신당서』가 서로 오해할 수 있는 기록이 있어 혼란이 있어 왔다.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과 관련하여 그를 고구려 별종의 ‘고려 별종’으로 보는 설과 고구려와 다른 ‘속말말갈’로 보는 설이 팽팽히 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발해국의 주민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점은 발해국의 성격을 파악하는 요체이다. 이는 발해인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였는가 아니면, 고구려와 다른 말갈인들로 구성된 왕조였는가 하는 점으로 집약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발해의 주민구성 문제는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과는 엄격하게 다를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주민들은 고구려와 다른 이른바 말갈인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건국자는 고구려인일 수 있고, 말갈인이지만 주민들은 고구려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정하게 발해의 주민구성을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이중구조로 보는 이원적(二元的) 주민 구성론(住民構成論)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원적 주민 구성론은 한국과 일본의 통설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모두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이었다. 이러한 발해의 시각은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아니고 러시아에서도 주장해 오던 것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장 완고하다. 다만 중화인민공화국 쪽에서 발해의 주민구성을 말갈(靺鞨)이나 고구려(高句麗) 어느 쪽이라기보다 ‘발해족(渤海族)’ 내지 발해인(渤海人)이라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대세는 아니다.
발해인들이 당시 자신들을 누구라고 생각하였는가 하는 점은 발해국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현대인들의 정치적 의도와 관계없이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려는 데에서도 꼭 밝혀야 할 문제이다. 발해 주민들이 스스로를 고구려 후손으로 생각하였는가 아니면 그와 다른‘말갈(靺鞨)’인으로 자처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문제의 핵심에는 말갈이 있다.
발해 주민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한결 같은 논조는 지배층 역시도 고구려와 다른 말갈족이었다. 이것은『신당서』에서 발해를 소개하면서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된 자들로서 성은 대씨[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라는 점에 입각한 것인데, 한국과 일본이 지배층의 고구려계설을 인정하는 것과도 다르다. 잘 알려진 대로 대조영 등의 고구려계설은『구당서』의 ‘고려 별종(高麗別種)’과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등의 논증에 힘입고 있다. 따라서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과연 ‘말갈’이 어떻게 사서에 기록되었으며, 그들의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왜곡 실태는 이른바 2003년부터 실시된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주변 민족사에 대한 왜곡 시기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지나고 그들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수정해 가는 1970년대 말,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는 발해사 연구의 실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이미 발해는 당나라 왕조의 지방정권이자, 고구려와는 전혀 관련없는 말갈인들에 의해 세워진 왕조였다는 논리가 체계화되고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갔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고구려사 왜곡은 ‘통일적다민족국가(統一的 多民族國家)’ 논리가 지배했던 이 시기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중국과 한국 등의 말갈 사료를 분석ㆍ검토하면서 발해가 말갈족의 왕조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의 전략적 논리를 비판하고, 발해는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고구려인들이 중심이었음을 밝히는 데에 있다.

Ⅵ. 맺 음 말

중화인민공화국이 발해를 말갈사로 보는 입장은 청대에『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가 체계화한 이후 근대 역사학에서도 이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오늘날 문제가 된다면 말갈의 역사가 중화인민공화국사와 다른 ‘만주사’의 일환인가, 아니면 당의 ‘지방정권’에 속한 중화인민공화국사의 일환인가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발해사는『만주원류고』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중국사가 아닌 ‘만주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해사가 중국사로 편입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만주 침략 때부터였다. 역사지리학자이자 역사 전략가로도 평가받는 김육불은 일제에 항거하여『동북통사』를 집필하면서 ‘만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지역은 오직 중국의 ‘동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자주성이 전혀 부정된 것은 아니었고 이후의 주민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인이 되었기에 중화인민공화국사의 일부라고 하는 비교적 학문적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개혁ㆍ개방 이후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국가정책으로 자리 잡으면서 고대 소수민족 역사의 중화인민공화국사화 정책이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발해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논리로 비약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발해의 국호가 처음부터 자칭 ‘말갈’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보건대 ‘말갈’은 수ㆍ당 대인들이 그들의 동북방 주민들을 범칭, 비칭하였던 종족 이름이었고, 고구려의 피지배주민들의 비칭이었다. 말갈을 피지배주민들에 대한 비칭으로 보는 자세는『삼국사기』에도 반영되어, 수ㆍ당대 기록과 달리 동명성왕대에까지 말갈이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한국 및 중국사에서 ‘말갈’족의 존재를 ‘고구려’와 따로 구별하여 인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만주지역에서 스스로 왕조를 개창하여 국호를 선포하였던 조선, 부여, 고구려가 그들의 종족 이름에 더 가깝고, 왕조 개창에 성공하지 못하였던 흑수인들의 경우만을 ‘말갈’ 또는 ‘흑수말갈’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양사에서 이미 일개 종족 이름으로 그 시민권을 획득한 ‘말갈’을 존중한다면, ‘고구려말갈(속말말갈과 백산말갈 등과 같이 고구려주민이자 고구려계인 말갈)’과 ‘흑수말갈(고구려계가 아닌 말갈)’로 나누어 부름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따라서 고구려, 발해사에 있어서 ‘말갈’에 대한 진실 규명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치력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고구려의 ‘말갈 지배’라는 것은 중앙의 지방 지배라는 의미에 불과할 뿐이지, 이것이 고구려인의 이민족 지배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입장이 말갈의 종족 계통과 고구려와의 정치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입증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발해어에 대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기에, 발해어의 계통은 오히려 그들의 종족 계통에서 발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해어가 고구려어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발해가 고구려와 풍속이 같았다는『구당서』기록과 그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했다.
한편 문화적인 측면 특히,『구당서』에서 고구려인의 주거특징이었다고 전하는 온돌장치가 발해 주민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점 등은 문화적으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는 증거들이라고 간주하였다. 토기의 구분기준에 있어서도 말갈을 이민족시하는 잘못이 있음도 지적하였다. 말갈 토기를 돌림판을 쓰지 않고 낮은 온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말갈관’은 고구려나 발해의 변방 주민들의 저급한 생활문화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지 고구려와 다른 이민족의 문화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