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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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34
총서_2008.7.20_한규철_중화인민공화국의 발해사연구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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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철, 〈중화인민공화국의 발해사연구〉《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685~쪽, 2008.7.20; 4편 중화인민공화국의 발해사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 중화인민공화국의 발해사 연구 변천과정
Ⅲ. 통사와 연구사를 통해 본 중국의 발해사
Ⅳ. 발해국의 성격과 건국자문제를 보는 중국의 발해사
Ⅴ. 고고학 분야를 통해 본 중국의 발해사
Ⅵ.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입각한 중국의 발해사
Ⅶ. 중국의 발해사 학자와 연구기관
Ⅷ. 맺음말

Ⅰ. 머리말

오늘날 북한을 포함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의 동북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에서 698년부터 926년까지 229년 동안 왕조를 유지했던 발해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주변 여러 나라들에서 연구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북한과 중국‧러시아는 현대사의 한 부분이 발해지역이었다는데 대해서 더욱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자국사의 입장에서 다루려 하고 있다.
남북한은 기본적으로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근거로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하며, 당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황제국’ 혹은 자주국이었다고 본다. 일본의 발해국에 대한 성격론은 크게 말갈설(靺鞨說)과, 고구려 유민(高句麗遺民)과 말갈의 다민족국가설(多民族國家說)로 대별하지만 후자에 더 큰 비중이 있지 않나 싶다. 중국은 발해국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 아닌 말갈족의 후손이었으며, 당나라의 ‘지방정권(地方政權)’ 혹은 ‘번속국(藩屬國)’이었다고 보는가 하면, 러시아는 발해국이 말갈국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주국이었다고 보고 있다.
발해사 연구의 원조로서 발해사 연구에 첫 주춧돌이 올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세기 조선 시대 실학자들에서부터이다. 중국이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관심 밖이었던 발해사가 이때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연구에서는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생각하고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의 하나로 여겼다. 가장 대표적인 연구는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발해고(渤海考)』(1784)이다. 이후에도 고전적 발해사 연구는 대체로 조선 시대 연구자들이 중심이었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인들에게 잊혀졌던 발해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와 일본에서부터였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우쑤리강 동쪽의 연해주(沿海州)지역이 러시아령으로 변하고부터 발해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빨라지(까파로프 뻬.이)는 1870년부터 1872년까지 우쑤리스끄지역을 답사하고, 그곳의 유적들이 발해의 것이라고 보고하였는가 하면, 끄라스끼노 성터도 발해 유적이라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발해사 연구 역시 한자 문헌에 대한 이해 부족과 연해주가 러시아령이 됨에 따른 발해사의 러시아사화에 깊이 관련되었던 한계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현대의 발해사 연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시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면서부터이다. 동기는 순수하지 못하였지만,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 이후부터 시도해 온 연구는 미지의 발해사를 복원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하였다. 상경용천부터를 비롯하여 동경용원부 지역으로 알려진 팔련성(八連城)터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지역으로 알려지게 한 서고성(西古城)터가 모두 이때 발굴되었다.
만주지역에서 일본에 의한 발해유적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중국의 요양인 김육불(1887~1962)은 발해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1934)을 펴냄으로서 발해사 연구에 금자탑을 쌓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저항하며 발해가 만주사가 아닌 중국사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학문적 입장에서 발해사 연구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1966~1976)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의 발해사 연구는 고구려‧발해국의 중국사화의 출발이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 이후 발해사 연구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인 ‘통일적 다민족국가(統一的 多民族國家)’ 이론이 우선되어 종래의 실사구시적 연구가 정치의 하부 연구로 전락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각 국의 발해사 연구 추이에 관한 <표1, 2>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때부터 발해사 연구가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반영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모든 글은 ‘唐의 地方政權’이라는 기조 아래 발해사 연구를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념적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한‧중 간에 발해국 성격 논쟁이 첨예화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아무튼 중국 당국이 ‘중‧조 국경문제(中朝國境問題)’와 소수민족의 ‘통일된 다민족국가’라는 점 등을 의식하고 고구려‧발해사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발해사의 복원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발해사 연구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의 연구 전망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Ⅷ. 맺음말

발해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그 관심이 지대하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현재의 영토가 과거 발해국의 일부였다는 사실에서 발해사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할 수 없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은 고구려 계승을 강조하며, 한국사적 입장에서 고구려 계승성이 강조되는 한국의 발해사 연구가 중국의 만주지역에 대한 영토 주권의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강하다. 특히 학자들에 있어서까지 한국의 정치인이나 관광객들의 ‘무분별’한 발언을 문제 삼고 있기도 하다.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이후 개방과 함께 큰 변화가 있었다. 소수민족 정책, 즉 ‘통일된 다민족국가(統一的 多民族國家)’ 이념을 뒷받침하는 논조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 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논조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서 진시황(秦始皇)이나 한(漢)나라 유물들이 성황리에 전시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진시황이나 한나라 유물과 같은 정통 중국사와 관련된 유물전은 허락하지만 변방사, 특히 고구려나 발해와 관련된 유물 전시회는 용납하지 않고 있다. 역사와 유물에 대한 해석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서 고구려‧발해를 포함한 변강 민족사와 관련된 학술토론회가 비공개로 개최되고 있는가 하면 해외에서의 고구려‧발해사에 대한 학술발표에  학자들이 자유스럽게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에서 그만큼 고구려나 발해사 연구가 학문외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반증이다.
중국에서 발행되는 몇몇 정기 간행물들은 외부에 공개치 않는 ‘내부 자료’가 있다. 이것은 잡지의 수준이 떨어져 외부에 공개치 않는다는 뜻이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잡지들이 내부 자료가 된 것은 주로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것이 많고, 해외 우송이 금지되어 있으며, 도서관에서도 허가 없이 열람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 정치적인 이유로 내부 자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 논리는 현대 중국지역 모두는 지금이나 과거에도 모두가 중국사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위금용(古爲今用)’한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사 영역은 중세(고대) 발해국이나, 고구려지역을 포함하고 있기에 중국도 당연히 고구려나 발해사에 대하여 연구하고 지역사의 범주에서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역사의 계기성(繼起性)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고위금용’, 즉 지금의 역사 상황을 고대로 소급하여 적용하려는 것은 역사적 태도나 학문적 태도가 아닐 것이다. 역사의 본 모습을 복원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행되어 온 과정과 그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과거는 어떠했지만 지금은 어떠하다는 자세가 더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