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학회)
아이디 비번 자동로그인
학회지발간목록
역사고고학논저검색

 
작성일 : 09-05-29 01:35
총서_2008.7.20_박승범_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고구려 유민 연구 검토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조회 : 11,684  
   dbpia1181554.pdf (13.9M) [1] DATE : 2009-05-29 01:35:20
박승범,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고구려 유민 연구 검토〉《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653~쪽, 2008.7.20; 4편 중화인민공화국의 발해사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 연구사
   1. 중화인민공화국의 연구
   2. 국내의 연구
Ⅲ. 중화인민공화국의 고구려 유민연구 문제점
   1. 고구려 멸망 당시 인구 및 민족적 구분 문제
   2.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당지 내 이주
      1) 645년 전역(戰役)
      2) 668년 전역
      3. 고구려 유민의 정체성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941년 김육불(金毓黻)이 고구려가 ‘중화민족(中華民族)’의 일원임을 주장한 이래, 일부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고구려사가 자국사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이래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이른바 다민족통일국가론(多民族統一國家論)이 강조되면서 이런 주장은 ‘정설’로서 중국인민공화국 연구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되풀이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차원에서 이에 대한 논리개발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프로젝트를 시행했다. ‘동북공정’에서 제시된 ‘고구려사=중국사’라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고구려 멸망 후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이 당(唐)나라 땅으로 옮겨져 한족화(漢族化)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유민의 한족화’는 고구려의 ‘종족’ 구성 자체를 ‘중국인’으로 보는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선 곁가지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고구려 멸망 후 옛 고구려 영역에 남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역사계승의식을 가졌는지는 자국 영토 안에서 존재했던 모든 민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귀속화’의 입장에선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미 상주(商周) 시대 이래 ‘중화민족’의 한 구성원이라고 그들이 주장하는 예맥족(濊貊族)의 고구려인이 당과의 ‘통일전쟁’을 거쳐 한족화했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논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연구자들은 고구려인이 한족화되었다는 주장을 꾸준히 되풀이하고 있으며, 여전히 고구려사의 중국사화 작업을 위한 중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이는 결국 고구려 유민 중 일부가 신라(新羅)로 귀화함으로써 ‘중화민족’이 아닌 한족(韓族)의 국가인 신라와 이를 계승한 오늘날의 한국이 고구려사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고구려사의 중국사 귀속을 주장하는 논리로서 대다수 고구려인들은 한족화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그 주된 근거로 각종 자료에 보이는 당(唐)나라 ‘내지’로 옮겨진 고구려인들의 숫자를 제시하는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 대다수가 한족화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1970년대 손진기(孫進己)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80년대부터 손진기를 중심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연구물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그 입론 과정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동북공정’이 시작되는 2002년 이후 대다수 고구려 유민의 ‘한족화’에 대한 주장은 대동소이하게 되풀이되었다.
고구려 유민의 ‘한족화’에 따른 고구려사=중국사 논거의 다른 하나는 멸망 당시 고구려 호수(戶數)의 민족적 구성 분포를 통해서 제시된다. 즉 69만 7000호라는 고구려의 호수 중 절대다수는 한사군(漢四郡) 이래 존속했던 한족(漢族)과 기타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4~5세기 말 고구려의 요동(遼東)‧현도군(玄菟郡) 지배로 유입된 한족 수백만이 고구려 멸망 때까지 고구려인화하지 않고 한족으로서 존재했다고 한다.
이렇듯 1980년대 일부 중화인민공화국 연구자들은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아니며, 중국사라는 주장을 해왔으며, 최근 동북공정을 통해 학자들 대부분이 동조 혹은 같은 논거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논리’는 고구려인의 대다수는 ‘중국인’이었으며, 그나마 나머지 고구려인들은 국가 소멸 후 본래 고구려 영역이 아니라, 대부분 당으로 유입되어 ‘한족화’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들 대부분은 고구려 영토에서 삶을 영유하지 못하고 신라‧돌궐‧당 등 외국으로 이주해 갔으며, 대부분은 당으로 들어가 ‘중국인’화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중화인민공화국 연구자들의 주장은 엄연한 한국사인 고구려사를 자국사화 하면서 이를 통해 개방화 이후 나타난 자국 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통합기제로 활용하여 자국 중심의 동아시아 체제 확보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사의 ‘중국사’화 작업을 위한 그들의 논거나 논리는 엉성할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사료를 의도적으로 오독하거나 상식적인 역사상을 부정하는 등 도저히 연구라고 할 수 없는 ‘선언’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에 이 연구에서는 고구려 유민의 ‘한족화’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측의 대표적 연구물을 대상으로 그 입론의 실상을 파악하고, 논리적 모순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의 향배를 추적하여 고구려가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는 역사의 상식과 우리 역사의식의 정당성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한다.

Ⅷ. 맺음말

발해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그 관심이 지대하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현재의 영토가 과거 발해국의 일부였다는 사실에서 발해사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할 수 없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은 고구려 계승을 강조하며, 한국사적 입장에서 고구려 계승성이 강조되는 한국의 발해사 연구가 중국의 만주지역에 대한 영토 주권의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강하다. 특히 학자들에 있어서까지 한국의 정치인이나 관광객들의 ‘무분별’한 발언을 문제 삼고 있기도 하다.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이후 개방과 함께 큰 변화가 있었다. 소수민족 정책, 즉 ‘통일된 다민족국가(統一的 多民族國家)’ 이념을 뒷받침하는 논조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 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논조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서 진시황(秦始皇)이나 한(漢)나라 유물들이 성황리에 전시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진시황이나 한나라 유물과 같은 정통 중국사와 관련된 유물전은 허락하지만 변방사, 특히 고구려나 발해와 관련된 유물 전시회는 용납하지 않고 있다. 역사와 유물에 대한 해석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서 고구려‧발해를 포함한 변강 민족사와 관련된 학술토론회가 비공개로 개최되고 있는가 하면 해외에서의 고구려‧발해사에 대한 학술발표에  학자들이 자유스럽게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에서 그만큼 고구려나 발해사 연구가 학문외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반증이다.
중국에서 발행되는 몇몇 정기 간행물들은 외부에 공개치 않는 ‘내부 자료’가 있다. 이것은 잡지의 수준이 떨어져 외부에 공개치 않는다는 뜻이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잡지들이 내부 자료가 된 것은 주로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것이 많고, 해외 우송이 금지되어 있으며, 도서관에서도 허가 없이 열람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 정치적인 이유로 내부 자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 논리는 현대 중국지역 모두는 지금이나 과거에도 모두가 중국사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위금용(古爲今用)’한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사 영역은 중세(고대) 발해국이나, 고구려지역을 포함하고 있기에 중국도 당연히 고구려나 발해사에 대하여 연구하고 지역사의 범주에서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역사의 계기성(繼起性)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고위금용’, 즉 지금의 역사 상황을 고대로 소급하여 적용하려는 것은 역사적 태도나 학문적 태도가 아닐 것이다. 역사의 본 모습을 복원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행되어 온 과정과 그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과거는 어떠했지만 지금은 어떠하다는 자세가 더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