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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39
총서_2008.7.20_서길수_중국 학자의 고구려 왕릉 비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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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수, 〈중국 학자의 고구려 왕릉 비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485~쪽, 2008.7.20; 3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고구려 왕릉 통고(高句麗王陵通考)』의 주장 검토
    1. 고구려 왕릉의 지명에 대한 해독
    2. 무덤 구조를 통해서 본 왕릉의 편년
    3. 각종 기준을 통해서 비정한 고구려 28대 왕릉
Ⅲ. 고구려 왕릉 연구사 검토
    1. 2003년 세계유산 등록 이전의 연구사
    2. 세계유산 등록과 고구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
Ⅳ. 고구려 평양 천도 이전 역대 왕릉에 대한 검토
    1.『고구려 왕릉 통고』이전에 이미 논의가 되었던 왕릉에 대한 검토
    2.『고구려 왕릉 통고』가 처음 비정한 왕릉에 대한 검토
Ⅴ. 고구려 평양 천도 이후 역대 왕릉에 대한 검토
    1. 평양 천도 이후 집안 귀장(歸葬)에 대한 주장 검토
    2. 평양 천도 이후 귀장(歸葬)했다고 주장하는 왕릉에 대한 분석
    3. 평양천도 이후 왕들의 능묘 비정의 문제점
Ⅵ. 맺음말

Ⅰ. 머리말

이 논문은 길림성사회과학원에서 나오는『동북사지(東北史地)』2007년 4기(7ㆍ8월호) 2쪽에 실린 「고구려 왕릉 통고 요보(高句麗王陵通考要報)」라는 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이 논문은 장복유(張福有), 손인걸(孫仁杰), 지용(遲勇) 3명이 지은『고구려 왕릉 통고(高句麗王陵通考)』와 장복유(張福有)가 지은『고구려 왕릉 통감(高句麗王陵統鑒)』의 내용을 저자 자신들이 요약하여 소개한 글인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잘 소개했기 때문에 이 요약문만 가지고도 책의 내용을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각 사서에 나온 지명을 분석하고, 고고학적인 작업 결과를 가지고 나름대로 기준을 마련하여, 고구려 28대 왕의 모든 왕릉을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무덤과 일대일로 비정(比定)한 것이다. “고구려 28대 왕릉은 모두 중국 땅에 있다.” “평양 천도 뒤 죽은 고구려 왕의 능도 모두 중국 땅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지금까지 수십 년간 논의 되어온 몇몇 왕릉에 대한 비정을 넘어서 모든 왕릉의 위치를 다 비정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졸속하게 모든 왕릉을 비정하다보니 스스로 많은 모순에 직면하고 논리적으로 비약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앞으로 이 문제는 많은 논쟁이 계속되겠지만, 이 논문에서는 우선 일차적으로 이런 왕릉 비정에서 생긴 모순과 논리적 비약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연구목적이다.
이 논문은 Ⅱ장에서 먼저 저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정리하고, Ⅲ장에서 고구려 왕릉에 대한 연구사를 조감해 보고, Ⅳ장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장수왕까지의 왕릉을 분석하고, Ⅴ장에서는 평양으로 천도한 뒤 평양에서 세상을 떠난 왕들의 능에 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

Ⅵ. 맺는말

이 논문은 길림성사회과학원에서 나오는『동북사지(東北史地)』 2007년 4기(7ㆍ8월호) 2쪽에 실린 「고구려 왕릉 통고 요보(高句麗王陵通考要報)」라는 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각 사서에 나온 지명을 분석하고, 고고학적인 작업 결과를 가지고 나름대로 기준을 마련하여, 고구려 28대 왕의 모든 왕릉을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무덤과 일대일로 비정(比定)한 것이다. “고구려 28대 왕릉은 모두 중국 땅에 있다”,  “평양 천도 뒤 죽은 고구려 왕의 능도 모두 중국 땅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지금까지 수십 년 간 논의 되어온 몇몇 왕릉에 대한 비정을 넘어서 모든 왕릉의 위치를 다 비정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졸속하게 모든 왕릉을 비정하다보니 스스로 많은 모순에 직면하고 논리적 비약이 심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장복유 팀은 고구려 왕호에 나온 장지(葬地)의 현재 지명을 밝히기 위해 상당히 많은 힘을 쏟았으며, 그 결과를 가지고 왕릉을 비정하는데 중요한 잣대로 쓰고 있다. 그런데 어떤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지명을 비정한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해석이 많아, 이 지명만 가지고 왕릉을 비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낳았다.

2. 이미 논의되었거나 논의 되고 있는 왕릉을 장복유 팀이 새로 12기를 비정했는데, 그 가운데 다른 학자와 같은 의견을 낸 것은 6기이고, 나머지 6기는 전혀 다른 무덤을 비정하였다. 방기동, 경철화, 위존성은 고구려 고고학에 관한 한 3대 학자라고 할 만큼 전문가이고, 세계유산 등록을 위해 발굴을 하고 펴낸 보고서는 많은 논의과정을 거쳐서 집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전문가나 전문적인 보고서와 다른 의견을 낼 때는 그만큼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증거를 댄 것이 하나도 없었다.

3. 장복유 팀은 다른 학자나 보고서가 전혀 손대지 않았던 8대 왕릉을 완전히 새로 비정하므로 해서 평양 천도 이전 20대 왕의 모든 능을 비정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나 사료는 전혀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모든 왕릉을 꼭 비정해야 했는지 의문이 갈 정도이다. 마치 그래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어 적당히 제비뽑기를 하여, 일을 해치웠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전체적으로 왕릉이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해서는 많은 인력과 시간을 들여 노력한 반면, 그 능이 어떤 왕의 능인가 하는 구체적인 증거는 태왕릉과 몇 몇 수막새에 나오는 간지 몇 개를 빼놓고는 전혀 내놓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비정해 내는 비학술적인 태도를 보였다.

4.『고구려 왕릉 통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 평양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고구려 왕들의 능도 모두 중국에 있고, 압록강 이남 한반도에는 왕릉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었다. 고구려는 20대 장수왕(서기 427년)이 수도를 현재 중국의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다. 그 뒤 장수왕부터 보장왕까지 9명의 왕이 더 나온다. 당나라로 끌려간 보장왕을 빼놓고 8명의 왕이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 8명 모두가 평양에 장사지내지 않고, 현재 중국의 길림성 집안으로 돌아와 묻혔다는 것이다. 참 놀라운 발상이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주장하지 못했던 뜻밖의 논리다.

5. 그러나 이렇게 비정한 고구려 후기 왕릉들은 본인들이 만든 왕릉의 조건에 맞지 않았다. 새로 비정된 7기의 왕릉 가운데 자신들이 제시한 7가지 조건에 맞는 왕릉은 2기 정도이고, 나머지 5기는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왕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조건이 되었다.

6. 설령 7기가 모두 모두 왕릉이라고 해도, 어떤 무덤이 어떤 왕의 능인지 비정할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정보로는 단 한 기의 왕릉도 비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7기 무덤의 피장자를 모두 밝혔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모두가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상태에서 어떤 무덤이 어떤 왕의 능이라고 비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후기 7명의 왕에 대한 왕릉을 모두 비정한 것은 그 시도 자체부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7. 평양 주변에는 5~7세기 돌칸흙무덤을 검토한 결과, 왕릉급 무덤도 많고, 이미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같은 왕들의 능이 연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장복유 팀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왕릉은 압록강 북녘에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평양에는 왕릉이 있을 수 없다. 반대로 평양 천도 이후의 왕릉이 평양지역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집안지역의 왕릉은 허구가 된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평양지역의 왕릉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고, 비정된 왕릉도 제법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일까? 당연히 평양에서 집권한 왕들의 능이 평양에 있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8. 그렇다면 기라성 같은 고구려 전문가들, 최고의 고고학자들이 감히 할 수 없는 내용을 어떻게 한 아마추어 사가와 박물관 직원 2명이 모든 것을 단 3년에 해치울 수가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연구팀 팀장인 장복유 개인의 위치와 성향을 따져보면 쉽게 결론이 난다.
     장복유는 고구려ㆍ발해사는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사학계에 전혀 족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2004년,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正廳長 급)이 되면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다. 바로 동북공정의 전문가위원회 위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을 끌고 가는 실질적인 기구인 이 위원회에는 동북 3성인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의 선전부 부부장과 사회과학원 원장이나 부원장이 당연직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장복유가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이 되어 동북공정 전문가 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동시에 길림성사회과학원 부원장, 백두산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길림성 장백산문화연구회’ 회장까지 중요 요직을 도맡았다.
     그 뒤 한중관계에 동북공정이 문제가 되고, 실질 작업이 국가에서 지방으로 이전되면서 장복유는 고구려 역사왜곡의 선봉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2004년 역사왜곡의 발표장이 될 새로운 학술지『동북사지』가 나오면서, 그 출판사 사장까지 맡게 된다. 2004년 이전까지 단 한 편의 고구려 관련 논문도 없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고구려 논문을 3년 동안 10편 이상 발표하고, 이번에는 30만자짜리『고구려 왕릉 통고(高句麗王陵通考)』란 책을 공저로 내고, 사진이 600장이나 들어가는『고구려 왕릉 통감(高句麗王陵統鑒)』을 개인이름으로 내게 된다.
     이 책은 쓰기 위해 “40 수차례에 걸쳐 환인과 집안의 무덤들을 답사하고, 그 가운데 33기의 대형 무덤을 중점적으로 조사하였다. 그리고 1년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왕릉 27기와 석굴 1개를 선정하였다. 총계 210차 이상 이 왕릉을 고찰하고 대량의 1차 자료를 얻었다”고 하였다. 어떤 학자도 그런 시간과 돈을 지불할 수 없다. 이것은 큰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각종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그런 면에서 장복유가 가지고 있는 각종 직함들은 모든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고구려 왕릉 통고(高句麗王陵通考)』란 책의 내용이 그렇게 과감하게 고구려 28대 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비정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책적인 목표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뒷받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목표는 간단하다. “고구려 왕릉은 모두 중국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 역사다”는 결론을 이끌어가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학술적인 접근은 결국 학문을 황폐화시키고, 한중 양국의 학술 교류, 나아가 양국의 선린관계에도 크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다. 이에 대해 이미 1963년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가 경고와 함께 대안을 내놓고 있어 양국의 학자들이 모두 경청할 만하다.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지,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옛날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藩屬)이었다고 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국수주의가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심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을 바쳤다고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와 얼굴을 대하고 서로 우호적으로 교류할 때도 그들은 조현(朝見, 신하가 임금을 뵙는 것 : 옮긴이 주)하러 왔다고 했고,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여러분이 신복(臣服, 신하가 되어 복종했다 : 옮긴이 주)한다고 말했으며, 스스로 천자의 나라(天朝), 위나라(上邦)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곧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잘못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