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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40
총서_2008.7.20_김용만_고구려 후기 고구려, 수ㆍ당, 북방 제국의 대립관계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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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고구려 후기 고구려, 수ㆍ당, 북방 제국의 대립관계〉《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375~쪽, 2008.7.20; 3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 고구려, 수ㆍ당 관계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연구사
Ⅲ. 중화인민공화국 연구자들의 침탈논리에 대한 비판
Ⅳ. 고구려, 수ㆍ당 국제대전의 성격과 북방 제국의 역할
Ⅴ. 요약 및 결론

Ⅴ. 요약 및 결론

고구려와 수‧당 관계는 한-중 역사인식에서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의 실패로 멸망하였고, 고구려 역시 수‧당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다. 약 70년 간에 걸쳐 수백만 병력이 동원되어 혈전을 벌인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국제대전(國際大戰)이었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측면과, 최종적으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두 측면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민족(韓民族)에게는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친 사건이 민족의 영광, 역사의 자랑, 민족 역사의 자부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친 기억은 한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맞설 때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이 되었다.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친 사건은 한민족의 정체성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세계 최대의 국가를 이루었던 수‧당의 후손인 한족들은 고구려에게 패하였던 사실은 잊고 싶었던 과거에 불과하며, 고구려는 수‧당에 대항한 못된 외적(外敵)의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10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고구려는 한족들에게 자국의 역사라는 기억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인식에 변화가 20세기 초반부터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고구려사 연구의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김육불(金毓黻)은 수‧당 시기를 동북 3성지역에서 한족의 부흥시대로 규정하였다. 그는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전쟁보다는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동북지역에 진출한 사건을 통해 한족이 이 지역에 역사적 연고권을 크게 갖게 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1980년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사에 대해 과거와 다른 역사이해가 시작되었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과거와는 다른 역사 이해를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에 대해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였던 손진기(孫進己)는 고구려는 시종일관 수‧당나라와 신복(臣服)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고, 수‧당과 고구려가 전쟁을 한 것은 예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다수의 고구려인이 중화민족에 흡수되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화인민공화국사에 귀속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손진기(孫進己) 말고도 1980년대 말에 중화인민공화국의 몇몇 학자들이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을 내전으로 보려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또 고구려가 처음부터 끝까지 중원 왕조에 예속된 소수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하고, 한강 북쪽에서 이원, 단천 북쪽지역 즉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가 수‧당나라 시기 양국의 경계이자, 과거의 한-중 경계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중화인민공화국 학계 안에서도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을 대외전쟁, 또는 화하(華夏)와 조선(朝鮮)민족 간의 전쟁으로 보려는 연구를 비롯해, 고구려와 수‧당과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접근도 있었다. 수‧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게 된 이유, 정벌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 고구려의 실력 등에 대한 다양한 접근도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통일된 다민족국가론에 의거하여 과거사를 재정리하는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다양한 접근은 줄어든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고구려와 수‧당 관계는 책봉과 조공에 의한 신복(臣服)관계임이 기정사실이라고 전제한 후, 그 바탕 위에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고구려는 수‧당에 복종하는 나라였지만, 중앙 통일정권의 통일 정책에 반대하여 대항을 준비하려했고, 이것은 번신(藩臣)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기에 중앙 통일정권은 응당 이를 꾸짖었으나, 고구려가 이를 뉘우치지 않아 전쟁이 야기되었다는 논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아울러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전쟁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내전으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1. 수‧당 제국이 과거 한제국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영토회복 욕구에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
2. 중원 왕조의 통일과업의 달성을 위해 전쟁을 한 것이다.
3.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수‧당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지방정권이므로 수‧당과의 전쟁은 대외전쟁이 될 수 없다.

수‧당의 고구려 정벌을 침략이 아니며, 고구려의 수‧당에 대한 저항 역시 반침략이 아니며,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 차츰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검토 없이 진행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연구 성과들은 문제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수‧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으로 주로 수 양제의 무리한 욕심, 당 태종의 몇 가지 실수 등이 지적되었지만, 차츰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며, 당 태종이 고구려 통합의 기틀을 놓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전쟁에서 수와 당군의 패배의 규모는 축소하는 대신, 고구려 군이 크게 피해를 입어 마침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가 경철화(耿鐵華) 등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고구려였다는 논리도 개발되었다. 수‧당이 변강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위무책(慰撫策)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구려의 잘못 탓에 정벌책(征伐策)으로 전환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아울러 고구려는 수와 당과 전쟁을 하였지만, 신복한 기간이 훨씬 길었으며, 전쟁은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고 보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고구려는 수와 당나라에 흡수 통일되어야만 할 운명인 것처럼 묘사되었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인이 중화민족으로 대부분 흡수되었다는 주장들이 강조되고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주도하는 이대룡(李大龍) 등이 집필한『고대중국고구려역사총론』과『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은 이러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변화된 목소리를 종합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이러한 연구의 흐름을 살펴보면, 1990년대 이후 도리어 다민족국가로서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원 왕조의 입장만이 강조된 편협한 시각의 연구가 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의 주장의 근거로 삼는 자료들은 대부분 수‧당 황제의 일방적인 조서 자료를 비롯한 그들의 입장만이 반영된 것들을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들은 황제 권력의 당위성을 옹호하는 사관에 입각한 일방적 주장이 담긴 것들이다. 그럼에도 마치 과거 시대 사람들이 모두 다 인정하는 논리로 변신을 시키고 있다. 수‧당의 조서는 이른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서 비판하는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가 투영되어 있으며, 이른바 변강 소수민족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자료 선택에서부터 합리적인 역사해석에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원 왕조의 입장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된 자료를 토대로 고구려 지배자들이 반 독립적 정권이 비법적(非法的)임을 인식해 불안했다거나, 당 태종의 오만함과 자비심 때문에 고구려 정벌을 실패했다는 식의 과도한 일방의 역사 해석을 문제가 드러나기도 한다.
고구려와 수‧당 사이에는 사신이 많이 오고 갔지만, 그것을 손진기(孫進己) 등의 주장처럼 고구려가 수‧당에 대한 신복(臣服)을 표시만은 아니다. 고구려로서는 적의 동향 탐색, 전쟁 후 처리 등을 위해 사신을 보내기도 했고, 당나라 사신을 감옥에 가두거나, 기어와서 절을 하게 하는 등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복(臣服)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사료를 구미에 맞는 것만을 선택하여 이용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역사인식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597년 수 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조서(詔書), 당 고조가 신하들에게 했던 고구려를 신하로 삼지 않겠다는 발언 등을 살펴보면, 현실적으로 고구려가 수‧당이 제어할 수 없는 상대로 수‧당의 번속국(藩屬國)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배구(裵矩)의 발언 등을 토대로 고구려가 번속국이었다는 주장은 현실을 무시하고, 수와 당의 입장에서만 역사를 보려는 편협한 시각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수‧당에 대항하기보다는 신복(臣服)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598년 고-수 1차 전쟁이 정식 전쟁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나, 이 역시 사료를 검토해 보면 수나라의 대군이 큰 피해를 입은 전쟁임이 드러난다. 사신 왕래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기록에도 없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굳이 벌어졌던 전쟁의 횟수와 의미마저 축소하려는 것은 역사를 자신들이 설정한 결론으로 의도적으로 몰라가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607년 수나라의 배구(裵矩)가 말한 군현회복론은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본래 중원 왕조의 영토였다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 전까지 중원의 어떤 왕조도 고구려의 영토가 한나라의 요동군이었으므로, 회복되어야 할 땅이라는 주장을 펼치지 않았으며, 당 고조 역시 고구려에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고구려가 대능하 일대로 진출하면서 야기된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론의 명분으로 제기된 것일 뿐이다.
고구려는 수‧당과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으며, 서로에 대해서 다른 나라라고만 인식을 했다. 고구려가 수‧당과 서로 통일되어야 할 대상이라면, 상대를 먼저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상대가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정벌의 대상이지, 통일의 대상은 아니다. 배구(裵矩)등이 이치상 결코 고구려를 수나라와 동등한 나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고구려가 결코 통일되어야 할 상대로 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와 수‧당나라 사람들은 상대를 원수로 생각하거나, 적으로 생각하였지 서로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고구려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의 일부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는 바로 고구려 시대에 고구려인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결코 수와 당과 같은 나라의 역사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수와 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라면, 고구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지만, 해석은 늘 시대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한 목적을 갖고서 일방의 입장만이 반영된 자료를 택해 고구려의 입장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최근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논지에서는 상대방을 존중하거나 상대적 관점에서 공정한 역사해석을 할 여지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일방적인 논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좀 더 확대해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그간 한국 학계에서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을 신라의 삼국통일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거나, 고구려사 역사를 지나치게 한국사의 좁은 테두리에만 가두어 두려고 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역사, 세계사적 관점에서 고구려사를 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고구려-수, 고구려-당 전쟁은 양국 간에 벌어진 국지전이 아니며, 당시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나라가 관심과 참여 속에 벌어진 국제대전이었다. 고구려는 수‧당과의 전쟁기간에도 왜국(倭國),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 등의 나라와도 사신왕래를 하였다. 수‧당 역시 고구려와의 전쟁 중에도 주변의 나라들을 제압(制壓)하거나, 위무(慰撫)하면서 전쟁에 임했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을 주의를 기울이며 바라본 백제, 신라는 물론 탐라, 왜국, 실위, 돌궐, 철륵, 설연타, 거란, 해, 토번 등 많은 나라가 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특히 북방에 위치한 유목민족의 역할은 두 나라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는 고구려와 수‧당 전쟁을 1국 내부의 전쟁으로 규정을 해버렸기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벌어졌던 대 전쟁의 국제 정치학적 분석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와 수‧당나라의 전쟁은 동아시아 전체의 운명을 가름하는 세계사적 의미의 대전이었다. 598년 고-수 전쟁에서는 거란과 말갈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612년 고-수 전쟁에서는 돌궐, 645년 고-당 전쟁에서는 설연타, 661~662년 고-당 전쟁에서는 철륵, 그리고 마지막 667~668년 고-당 전쟁에서는 신라, 토번과 멸망한 돌궐 등이 이 전쟁을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전쟁으로 참전하거나 지켜보았다.
고구려가 668년 멸망한 직후, 토번은 전쟁에 지친 당나라를 공격하여 670년 대비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위협했다. 또한 680년대에는 수십 년간 당나라에 복종하던 돌궐도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하였다. 당나라가 토번과 돌궐에게 거듭 패배를 한 것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너무 많은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낼 수 있었던 원인도 당나라가 국력을 너무 낭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고구려 전쟁의 여파가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진전될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자들이 과거 황제 옹호적인 봉건주의 계급사관에 의해 쓰인 사서들을 비판하였으나, 이제는 도리어 황제의 조서(詔書)와 같은 일방적인 글귀를 채택하여 새로운 중화민족주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이 인류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19세기 제국주의 역사학의 병폐인 인간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화이관(華夷觀)에 근거하여 과거사를 재조명하는 것은 실로 역사학의 퇴보라고 할 수 있겠다. 편협한 사관에 의해 과거사를 바라보고, 그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인류 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소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가 역사를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역사의 각 주체에 대한 보다 많은 배려와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한국 학계 역시 그 동안 한-중 관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고-수, 고-당 전쟁을 너무 평면적으로 이해해왔고, 고구려사를 지나치게 한국사라는 틀에 가두어왔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무리한 주장의 빌미를 준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