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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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41
총서_2008.7.20_강선_고구려와 북방민족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학계의 견해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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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bpia1181547.pdf (20.8M) [3] DATE : 2009-05-29 01:41:43
강선, 〈고구려와 북방민족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학계의 견해〉《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327~쪽, 2008.7.20; 3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한국의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 연구사
Ⅲ. 중화인민공화국의 침탈논리
    1.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관계
    2. 고구려와 남북조(南北朝)의 관계
Ⅳ. 중화인민공화국의 논리에 대한 비판
    1.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1)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
       2)고구려와 후연(後燕)의 관계
    2. 고구려와 거란(契丹)의 관계
    3. 고구려와 유연(柔然)의 관계
    4. 고구려와 돌궐(突厥)의 관계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주도하는 ‘동북공정’의 내용이 알려진 후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동북공정’이 동북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소수민족 통합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진행된 역사왜곡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부터 시작해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중화인민공화국 동북지역을 무대로 전개되었던 우리의 찬란한 고대사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은 우리의 고대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역사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북공정’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부차원에서 이루어진 프로젝트임을 가만할 때 이는 단순히 학계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정치적인 목적 아래 역사왜곡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 일반인들 사이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의 장을 마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왜곡을 성토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사가 일회성에 그쳐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왜곡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본고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논리개발을 위해 진행된 북방프로젝트 중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주장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아가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에서 동북 아시아사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북방민족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아왔던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 고구려ㆍ북방민족ㆍ중원[한족(漢族)] 왕조와의 관계라는 삼각구도 속에서 동북아시아사를 보고자 한다. 이는 기존의 중국사 중심의 역사인식의 고정관념과 한계에서 벗어나 동북아시아사라는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하는 것이고, 우리 역사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Ⅴ. 맺음말  

고구려는 지정학적인 특성상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며 발전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북방민족은 서로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충돌하기도 하고, 중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 제휴하기도 하였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와 접촉하였던 선비는 3세기 후반에 모용선비가 요서지역으로 진출하면서부터 고구려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당시 선비족 내에서는 모용부‧우문부‧단부 사이에 주도권을 놓고 다툼이 있었는데, 여기에 고구려가 가세하여 반(反)모용 연합세력을 구축하자 모용부와 고구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것은 모용선비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고구려가 패배함으로써 모용선비 세력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모용부는 선비족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전연’이라는 왕국 건설에 이어 수도를 계(薊)로 옮겨 중원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그 뒤 전연은 왕국(王國)에서 제국(帝國)으로 발전하면서 한 때 중원북부를 장악하고 동진(東晋)과 대치하였다.
선비 모용부에서 출발한 전연이 제국으로 발전해간 과정을 살펴보면 전연의 대외정책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전연의 최종 목표는 중원 제패였고 그를 위해 후방의 위협세력인 고구려를 무력화시킬 필요가 대두되었다. 후방이 안정되지 않으면 중원으로의 진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전연은 중원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고, 고구려는 견제해야 할 이웃 국가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전연이 중원과 고구려를 서로 다른 세력권으로 인정하고 중원으로 진출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연이 전진(前秦)에 멸망당하고 나중에 후연이 다시 세워져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대치하였지만 점차 고구려의 성장세에 밀려 위축된 끝에 명망 시에는 오히려 고구려에게 기대었다.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관계는 양자가 처한 국내 상황 그리고 국제환경에 의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조공과 책봉’의 기록에 의존해 종속관계로 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조공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고구려의 입장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의미를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선택인 때도 있었고 형식적인 외교의례일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연과 후연이 모두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라지고 모용선비의 존재도 몰락했지만 고구려는 계속 번성하였다는 측면에서 역사의 승자는 오히려 고구려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4세기 후반 동아시아 역사무대에 등장한 거란은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앞서 본 선비족과 달리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주변세력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고구려와 북위 같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거란은 처음부터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주변세력들이 거란의 성장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란의 운명은 주변세력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고구려와 중원 왕조뿐 아니라 나중에는 돌궐까지 가세하여 거란을 자신의 세력권 내에 두고자 했다. 그것은 거란이 훌륭한 군사 재원이었을 뿐 아니라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국제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주변 강대국들의 정책 때문이기도 했다. 이처럼 주변세력들에 의해 점유당한 거란족은 주로 부용병으로 이용되었다. 6세기 말 수(隋)가 건국되어 거란족을 적극적으로 초무하자 수의 보호 아래 들어가 있던 거란족은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10부 연맹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전쟁에서 거란은 여전히 부용병으로 동원되었다.
거란족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란이 주변 민족들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오히려 거란을 둘러싼 주변 민족들이 각기 다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거란의 운명이 결정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5호 16국의 분열 시기를 마감하고 북위가 중원 북부를 통일할 무렵 북방에서는 유연이 등장하여 초원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북위는 남조(南朝)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쪽의 고구려를 경계하며 또 북쪽의 유연에 대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유연 역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북위 주변 국가들과 연계해 북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대외정책을 취했다.
한편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고구려는 북위 세력의 팽창을 방관할 수 없었다. 고구려 역시 대외팽창을 위해서는 북위를 적절히 견제해야만 했다. 이러한 국제상황은 북위 견제라는 공통의 과제를 놓고 유연과 고구려가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양자의 이해가 일치하여 일어난 사건이 ‘지두우 분할 모의’였다. 이 사건은 북위 주변세력들이 북위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거란이 북위로 쫓겨 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때 유연은 군사행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제휴 세력으로 고구려를 선택하였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는 유연이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인정하고 고구려와 연계하여 추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는 직접적인 충돌이 없었지만 북위와 유연 사이의 상황은 달랐다. 북위는 수시로 변경을 침범하여 피해를 입히는 유연을 격퇴하고자 황제가 친정(親征)에 나서기도 했다. 그 결과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평화가 유지되어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대외여건을 조성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국제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국가로 부상하였다. 고구려는 중원의 남북조 및 북방의 유연과 함께 4강 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주도해 나간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선비, 거란, 유연 등 북방민족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에는 각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모용선비 즉 전연은 고구려를 중원으로 진출하기에 앞서 경계해야 할 세력으로 보았고, 유연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제휴해야 할 강대국으로 보았다. 즉 전연이 고구려를 견제의 대상으로 인식한 반면 유연은 제휴의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한편 거란은 주변세력들에 비해 정치적인 성장이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오히려 주변세력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소속이 유동적이었으며 자신들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휩쓸려 부용병으로 동원되는 등 부침(浮沈)을 거듭하였다.
요컨대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를 볼 때 단순히 양자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은 곤란하다.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관계는 당시 동북아시아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이 시기 동북아시아는 중원에서 한족(漢族) 왕조의 몰락과 북방민족 왕조의 건립이 교차하는 가운데 동방의 고구려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연합과 견제 속에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당시 복잡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국제관계를 단순히 사서(史書)에 보이는 많은 기사 가운데 ‘조공’과 ‘책봉’ 기사에만 의존해 종속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원에 수ㆍ당 등 통일 왕조가 등장해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주도하기 전까지 이 지역의 국제질서는 어느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원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