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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42
총서_2008.7.20_기수연_현토군(玄菟郡)과 고구려(高句麗)의 건국에 대한 연구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조회 : 1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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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연, 〈현토군(玄菟郡)과 고구려(高句麗)의 건국에 대한 연구〉《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273~쪽, 2008.7.20; 2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고구려 이전 역사의 왜곡과 대응 논리

Ⅰ. 머리말
Ⅱ. 연구사
  1.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연구
  2. 일본 학계의 연구
  3. 대한민국학계의 연구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의 연구
  5.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연구  
Ⅲ. 중화인민공화국의 침탈논리
  1. 고구려는 현도군 경내에서 건국되었다는 주장.
  2. 고구려는 현도군 고구려현의 관할을 받았다는 주장
  3. 주몽 건국이전 고구려족은 없었다는 주장  
Ⅳ. 침탈논리에 대한 비판
  1. 고고구려(古高句麗)와 고구려국(高句麗國)의 건국  
  2. 현도군과 고구려의 위치 검토    
  3. 고구려현의 성격과 고구려의 귀속 문제
Ⅴ. 요약 및 결론

Ⅴ. 요약 및 결론

지금까지 고구려의 건국과 현도군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현도군 경내에서 건국되었으며 건국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구려현의 관할을 받았기 때문에 한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침탈 논리에 대해 고구려의 건국 시기, 현도군과 고구려의 위치, 고구려의 귀속 문제 등으로 나뉘어 살펴보았다.  
고구려는 일반적으로『삼국사기』기록을 따라 B.C 37년에 건국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일주서』「왕회」 편에 대한 공조의 주석,『상서』「주관」 편의 공안국의 주석 등을 볼 때, 연원이 매우 오래된 국가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북사』,『태평환우기』,『책부원귀』등의 기록은 주몽의 손자인 막래 때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고 하여 고구려의 건국 시기를 B.C 2세기 정도로 올려볼 수 있게 하였다.          
고구려가 현도군의 경내에서 설치되었다고 하는 중공 학계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현도군과 고구려의 영역이 서로 겹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현도군과 고구려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현도군은 설치 이후 이동을 약간 했지만 요하 근처에 있었다.『삼국지』에서 현도군은 요동에서 북으로 200리, 고구려는 요동에서 동쪽으로 1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두 지역의 위치는 서로 판이한 곳이었다.
또한 현도군은 속현이 3개밖에 되는 300리 남짓한 규모를 가진 당시 서한의 군 중에서 가장 작은 군이었으며 이맥의 침입을 받아 군을 옮겨야 할 정도로 그 규모나 영향력은 미약했다. 당시 2000리 정도의 크기였던 고구려가 이러한 현도군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전하는 여러 문헌에서 고구려의 건국이 현도군과 관련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여 도착한 곳은 졸본부여였다.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건국 직후부터 서기 74년까지 고구려는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전쟁의 연속이었다.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주변에 있던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선비, 양맥, 개마국, 구다국, 동옥저, 갈사국 등을 계속해서 정복해 나갔다. 고구려가 한의 현도군 안에서 건국되었다면 현도군 위치와 이들의 영역이 겹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군사를 동원한 고구려의 이러한 정복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후한서』「예전」의 “예 및 옥저, 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라는 기록을 통해 고구려는 고조선의 계승 세력으로 고조선의 영역 안에서 세워진 나라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예와 옥저, 부여도 고구려와 함께 고조선의 계승 세력으로 언어, 법속, 풍습이 같은 한 민족임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가 한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고구려는 현도군에서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해서 고구려현의 지방 관리를 통해 실제적인 관할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근거가 되는『삼국지』,『후한서」,『북사』등의 사료를 검토한 결과, 현도군이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과 조복, 의책을 하사하고 고구려 현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는 내용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현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동한과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전하는『후한서』「고구려전」과『삼국사기』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모본왕 2년(A.D 49)에 고구려는 우북평, 어양, 상곡은 물론 서쪽 내지인 태원 일대까지 쳐들어가 요동태수의 화친을 받아낼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A.D 105년에는 요동에 침입해 6개 현을 빼앗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건광 원년(A.D 121)에 동한은 유주자사의 통솔 아래 요동군과 현도군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결국 많은 병력을 잃고 열세에 몰리게 된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속국에서까지 기마병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지만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동북지역의 전군을 상대로 할 정도로 동북아지역에서 패권을 쥐었던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건국 이후에도 계속해서 현도군 고구려현이라는 조그마한 일개 현의 관할을 받는 지방정권이었다고 보는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할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