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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43
총서_2008.7.20_박선미_동북공정에 나타난 고조선사 인식논리와 그 문제점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조회 : 10,995  
   dbpia1181544.pdf (15.6M) [5] DATE : 2009-05-29 01:43:38
박선미, 〈동북공정에 나타난 고조선사 인식논리와 그 문제점〉《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237~쪽, 2008.7.20; 2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고구려 이전 역사의 왜곡과 대응 논리

 I. 머리말
 II. 연구 경향과 연구 인력
 III. 침탈논리와 이에 대한 비판
    1. ‘조선이라는 명칭이 중화민족과 관련이 있으며 고조선은 기자가 처음 세웠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2. ‘한반도에 상의 해외 속지가 있었기 때문에 기자가 한반도로 갔고, 한반도가 기자의 최초 분봉지역(分封地域)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3. ‘연이 청천강까지 점령한 사실을 청천강 이북에서 발견되는 명도전과 연장성이 증명해 주고 있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4. ‘위만은 연 사람이며, 연 사람이 세운 위만조선은 한의 속국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5. ‘삼한은 중원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중화민족이 세웠으며, 기자의 후손인 준왕(準王)이 발전시킨 마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Ⅳ. 요약 및 결론 - 올바른 고조선사상(古朝鮮史像)의 정립을 위하여

Ⅳ. 요약 및 결론-올바른 고조선사상(古朝鮮史像)의 정립을 위하여

본고는 고조선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인식논리와 문제점을 알아보기 위하여 학계에 발표된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연구 태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제기함으로써 맺음말에 갈음하고자 한다.
첫째, 사료의 자의적 해석이다. 앞에서 검토한 바 대부분은 사료의 자의적 해석에서 오는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이미 중화인민공화국 학계 내부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만을 사료로 취급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비판된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이’, ‘탕곡’, ‘양곡’에 대한 해석이다. 문헌에 기록된 ‘명이’ ‘탕곡’ ‘양곡’ 등을 조선과 연결시키고 있으나 ‘명이(明夷)’의 뜻은 ‘밝음이 손상되었다’는 뜻으로서 종족이나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으며, 탕곡과 양곡은 신화에 나오는 지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자국의 신화나 전설은 역사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국내의 단군신화는 단순히 신화로만 치부하는 태도는 역사를 연구하는 데 이중 잣대를 취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둘째, 중화인민공화국 학계가 주장하는 논리의 근저에는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모든 문화의 근원을 중원에서 찾고자 하는 중화사상이 뿌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는 동아시아의 문화가 중원에 비하여 후진적이었으며, 중화민족에 의해 개화되고 선진화되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문화적 상대주의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니다. 인류는 각기 다른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이 때문에 문화는 다양하며 상대적이어서 어느 것이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등 단선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1920년대 유럽의 문화를 우월한 선진문화로 간주하고 주변문화를 후진문화로 간주한 문화 전파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비판받은 바 있으며, 인류학자들은 자문화 중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종을 울렸다. 학자로서의 이러한 기본적인 자세를 무시한 채 ‘아시아의 모든 문화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라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는 그들이 주장하는 ‘중화민족 대가정’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주장은 한결같이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는 선진적이었고 주변문화는 후진적이어서 문화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으로 전파되었으며 중화 민족이 주변의 미개 민족을 문명으로 이끌었다고 하는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두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하는 피상적인 논리로 한 나라 역사의 귀속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는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 발전하는 것이며 세계 어느 지역, 어느 사회, 어느 국가의 문화도 고립되어 형성된 예는 없다. 여기서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느냐가 그 나라 역사의 귀속을 결정짓지는 못한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서양식으로 커피를 마시고 양복을 입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을 서양의 어느 특정 국가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 서양식 건물에 커피를 마시고 양복을 입는 것, 이것이 현재의 문화 흐름이다. 당시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지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문화 역시 중원의 문화가 주변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여러 나라는 중원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독자적으로 역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를 두고 예속 정권이니 변방의 소수민족정권이니 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과 다름아니다. 실제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고유문화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보면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황하문명에서 기원한 것은 얼마 안 된다. 최근에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 된 ‘용’은 황하문명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요령성 요하 서쪽의 부신(阜新) 사해유적(査海遺蹟)에서 용의 모양을 형상화한 돌무더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지역은 중원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민족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식으로 표현하자면 용을 숭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는 ‘주변지역에서 중원으로의 전파’에 의해 형성된 셈이다. 최근 중화인민공화국 학계는 사해 유적과 관련하여 서둘러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짐과 동시에 ‘통일적다민족국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민족 관계사 연구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고, 그 결과의 하나로 중국사 범주에 관한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논쟁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역에 포함되는 모든 소수민족 및 고대사로써 중국사의 범위를 확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그들의 역사왜곡은 여기서부터 노골적이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고조선과 삼한의 역사에 대한 왜곡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역에 포함되지 않는 시기의 고조선과 삼한까지도 자국의 역사로 본다는 점에서 민족 중심의 역사왜곡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비판된 바와 같이 역사상 ‘중화민족’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그리고 ‘중화’란 무엇인가? 오늘의 역사가 모종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규정, 조작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