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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01:45
총서_2008.7.20_정병준_중화인민공화국의‘번속이론(藩屬理論)과 그 비판
 글쓴이 : 관리자 (220.♡.2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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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bpia1181541.pdf (15.8M) [1] DATE : 2009-05-29 01:45:02
정병준, 〈중화인민공화국의‘번속이론(藩屬理論)과 그 비판〉《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사) 고구려연구회 엮음, 여유당, 155~쪽, 2008.7.20; 1편 중화인민공화국의 다민족통일국가론과 동북공정


Ⅰ. 머리말
Ⅱ. 연구사
    1. 번속이론 이전의 ‘번속’ 용례 분석
    2. 번속이론의 등장
Ⅲ. 번속이론의 침탈논리와 그 비판
    1. 번속이론의 내용과 그 비판
    2. 고구려의 귀속 문제
Ⅳ. 요약 및 결론

Ⅳ. 요약 및 결론

이상에서 기술한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번속이라는 용어는 번속이론이 출현하기 이전은 물론, 고구려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이전부터 학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번속 용례는 주로 중원 왕조와 조공‧책봉을 통한 신속(臣屬)관계에 있었다는 정도로 사용되었을 뿐, 역사적 귀속 문제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고구려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번속은 중국의 변경 소수민족정권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 번속이 중국에 속한 이유에 대해서는 칭신‧납공(稱臣納貢)이나 책봉 이상의 설명이 없었고, 백제와 신라의 경우는 논의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2001년에 이대룡이 번속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동북공정’ 과정에서 번속이론 연구를 전담하여 마침내 2006년에『한당번속체제연구(漢唐藩屬體制硏究)』라는 결과물을 출간하였다. 그 핵심 골격은 상(商)‧주(周)의제도라는 오복제(五服制)를 바탕에 두고 있다. 오복제란 천하가 왕성(王城)을 중심점으로 하여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라는 다섯 개의 동심원적 층차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李)는 이를 다시 세 층으로 도식화하여 ① 전복(즉 京師), ② 후복과 수복(즉 諸夏, 同姓諸侯, 九州 범위), ③ 요복과 황복(蠻夷의 풍격을 가진 제후와 만이)으로 나누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대에 ① 구주(중국), ② 해내(구주 밖 四海 안), ③ 해외(사해 밖)이라는 천하관념이 생겨나고, 또 이에 상응하여 ① 군현 통치 구역, ② 이민족에 대한 특설기구 관할 구역, ③ 중원 왕조에 칭신한 정권들이 위치한 ‘번속통치 구역’ 또는 ‘기미통치 구역’이 형성되었는데, 모두 중원 왕조의 영역에 해당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번속 관념 또는 체제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크게 와해되었지만, 당대에 이르러 더욱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고 한다. 즉 당대에도 천하가 ① 구주, ② 해내, ③ 해외로 구성되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이에 맞추어 ① 부주(府州) 통치 구역, ② 도호부 통치 구역, ③ ‘번국(藩國) 구역’ 또는 ‘기미통치 구역’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③의 구역에는 고구려만이 아니라 백제∙신라(통일신라 포함)∙발해까지 포함된다고 하는 점이 이전의 연구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전체 논지와 관련된 문제점을 몇 개만 지적해 보면, 먼저 중원 왕조 측의 일방적 주장이나 관념에서 필요한 근거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구려의 관점을 고려한 논리(認同論)도 있지만, 정작 그 내용은 고구려인이 아닌 중원 왕조가 바라본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는 과거의 개념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미’라는 용어인데, 기미는 중국이 화이관을 바탕으로 모든 이민족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나 이(李)는 이를 번속국에 한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은 번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역사적 개념에 현재적 관념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셋째는 관념적 내용을 실제 상황으로 그대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판도에 속한 것으로 보기 위해서는 실제적 통제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李)도 이 점을 의식하여 중원 왕조가 고구려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한 사례를 몇 가지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고구려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미미하기 그지없다.
과거의 용어나 개념을 현재의 말로 바꿀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용어라고 할지라도 그 의미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전류에 번속은 ‘식민지’ 또는 ‘예속국’의 의미로 풀이되어 있는데, 이것은 근대 국제법의 해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대룡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언급도 없이 번속이라는 용어를 중국의 ‘변경정권’ 또는 ‘지방정권’ 등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 학계에서 역사 사실에 근거한 현대 용어를 생각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대룡의 번속이론이 제출된 이후 번속 또는 번속국(藩屬國)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보편화되는 기미가 보인다. 예를 들면 양옥다(梁玉多)는 「고구려 유민의 발해화 과정(高句麗遺民的渤海化進程)」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요동지역에서] 소(小)고구려국이 건립될 때 발해국은 건립 직후여서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신장한 여력이 없었다. 이로 인해 소고구려국은 발해․신라와 마찬가지로 당의 번속국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라고 한다. 구체적 설명이 없기 때문에 명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만약 이때의 번속이 번속이론에서 말하는 번속과 같은 의미라면, 신라도 발해와 마찬가지로 당에 귀속되었다는 말이 된다. 또 왕의강(王義康)은 「당대 성방 고찰(唐代城傍辨析)」에서

돌기시수충(突騎施守忠)과 토경(土境)은 그 부락을 거느리고 당과 번속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당의 명을 받들어 부락을 이끌고 종군하였다.

라고 하여, 번속관계였기 때문에 당 왕조의 명을 받들었다는 듯이 기술하고 있다. 이대룡이 ‘번속관계’를 중국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왕(王)의 번속 용례 역시 더 이상의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대룡의 번속이론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의 번속 용례에 관한 주의와 이에 대한 대응이 요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