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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2-04 09:55
31_2008.7_적우목광유_신라동북경(新羅東北境)에서의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의 교섭(交涉)에 대하여
 글쓴이 : 관리자 (202.♡.11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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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z200474.pdf (4.6M) [6] DATE : 2008-12-04 09:55:07
일반논문 : 신라동북경(新羅東北境)에서의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의 교섭(交涉)에 대하여
적우목광유 , 이유진(역)

赤羽目匡由 저, 이유진 역        新羅東北境에서의 新羅와 渤海의 交涉에 대하여        高句麗渤海硏究        31        2008.7        237~272        

머리말
Ⅰ. 統一新羅의 東北 開拓과 泉井(井泉)郡의 位置
Ⅱ. 新羅 東北境에서의 新羅와 渤海의 交涉
맺음말"

머리말

 新羅와 渤海의 外交關係에 대해 기록한 史料는 극히 적다. 양국간 使節의 交換에 대해 연대순으로 보면, 첫째 『東文選』 卷33・表箋 崔致遠「謝不許北國居上表」 는 渤海建國當初 그 初代王 大祚榮(位698~719年)이 新羅에 救援을 청하고,이에 대해 新羅王이「大阿餐」(新羅17等官位의 第5等)을 하사한 것을 전한다. 둘째『三國史記』新羅本紀에서는 元聖王 6(790)년과 憲德王 4(812)년에 新羅가 渤海에 使節을 派遣했던  두 예가 알려져 있다. 셋째『契丹國志』卷1・太祖는 渤海末 大諲譔(位906頃~926年)가 契丹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新羅와 同盟을 맺었다고 한다. 이들 세 사례 중 첫 번째 사례는 渤海에 대한 新羅의 優位를 唐에 主張하는 文脈으로 登場하는 사항이므로 信憑性에 약간 疑問이 남는다. 또 세 번째 사례에서는 使節交換의 實相을 살피기 어렵다. 그러나 두 번째 사례에 대해서는 史實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 기사가 전하는 交涉이 이루어진 각각의 國家의 事情에 대해서는 韓圭哲氏의 精細한 分析 이 있어 參考가 된다.
이 외에 양국의 직접적인 接觸으로,732年 渤海의 登州 공격을 시작으로 735년경에 收拾한 唐渤紛爭 에 있어서 新羅의 參戰이나,大仁秀(位818~830年)의 新羅侵攻  등을 들 수 있고,간접적으로는 9世紀末 新羅와 渤海의 爭長事件 으로 著名한 것처럼,唐廷에 있어 양국 使節의 接觸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상의 여러 사례는 국가간의 말하자면 非日常的인 交涉・接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新羅와 渤海는 대략 8세기 초에서 10세기 전반에 걸친 장기간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이러한 恆常的인 接觸 속에서 양자는 어떠한 關係를 맺고 있던 것일까.
그래서 小稿에서는 먼저 특히 泉井(井泉)郡의 位置를 중심으로 新羅東北境의 地理를 確認하고,다음으로 이 地域에 있어서 新羅와 渤海의 교섭상태로 이 문제에 接近하고 싶다.

맺음말

 統一新羅時代의 東北端의 邑인 泉井(井泉)郡의 位置는 永興周邊 혹은 文川周邊이라 할 수 있다. 그 外側에는 山峽을 利用하여 쌓은 長城 즉 炭項關門이 있고, 더욱이 그 外側의 泥河로써 渤海와의 境界를 긋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新羅와 渤海의 境界에 있어서 양국 領域民의 交涉은 확실히 存在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交涉의 담당자인 각각의 領域民 중에 渤海領域民이란 渤海에 의해 遷徙되었던 黑水・鐵利(鐵勒)・達姑(達姤) 등의 北部靺鞨諸族, 新羅領域民이란 濊族이었다. 新羅・渤海兩國의 境界인 泥河附近은 新羅領이면서 渤海支配下의 北部靺鞨諸族의 侵入을 허락하고, 한편에서 渤海가 그들의 自立的活動을 許容하는 緩衝地帶로 評價할 수 있다. 이러한 緩衝地帶에서 頻繁하지는 않아도 양국 領域民이 接觸하고 있었다. 그것이 新羅・渤海接壤地域에 있어서 交涉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小稿에서는 國家레벨의 交涉과는 다른 차원의 交涉의 實相을 언급해 보았다. 생각컨데 한마디로 新羅國家,渤海國家라고 해도 領域全體에 等質的인 支配나 社會가 展開되었을 리 없을 것이다. 地域에 의해 支配의 형태, 居住民의 種族的 樣相,意識 등은 多樣性을 나타낸다. 邊境인 新羅・渤海接壤地域의 양상은 우리에게 그것을 具體的으로 가르쳐 주는 하나의 實例는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