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학회)
아이디 비번 자동로그인
학회지발간목록
역사고고학논저검색

 
작성일 : 08-12-04 09:58
31_2008.7_공석구_집안(集安)지역 고구려(高句麗) 왕릉(王陵)의 조영(造營)
 글쓴이 : 관리자 (202.♡.113.124)
조회 : 10,858  
   0z200470.pdf (3.3M) [9] DATE : 2008-12-04 09:58:49
일반논문 : 집안(集安)지역 고구려(高句麗) 왕릉(王陵)의 조영(造營)
공석구 ( Seok Koo Kong )
The Construction of Koguryo royal tomb in the area of Jian(集安)

孔錫龜        集安지역 高句麗 王陵의 造營        高句麗渤海硏究        31        2008.7        121~146        

Ⅰ. 緖言
Ⅱ. 高句麗 王陵의 造營
  1. 고구려왕의 죽음
  2. 王陵의 立地選定
  3. 王陵의 築造
Ⅲ. 맺음말

I . 緖言

고구려시대의 수도로서 기능했던 집안지역의 고구려 왕릉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은 근래에 이르러서 였다. 그 계기는 2004년 고구려 왕릉보고서가 출간되면서부 터라 하겠다. 그 이전,중국에서는 집안지역의 고구려고분에 대한 대대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간략한 현황보고서)를 출간하였다. 이 보고서는 고분의 위치, 규모 등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집안지역에 분포된 고구려고분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중국내 고구려유적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2003년부터 집안지역의 왕릉급고분에 대한 정비와 보존차원에서 학술적인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결과물로 간행된 것이 앞서 거론한 『集安高句麗 王陸』보고서(이하는 『왕릉보고서』로 약칭하겠음)이다. 『왕릉보고서』를 보면 집안지역에 산재한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고분 24개를 대상으로서 선정하였고, 이중에 13개에 달하는 초대형고분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왕릉보고서』 에는 이들 왕릉급고분에 대한 축조기볍과 구조, 출토유물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는 기왕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정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왕릉급 고구려 고분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아가 『왕릉보고서』는 이와 같은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들 무덤의 축조연대를 1세기 전후부터 5세기 대까지의 왕릉으로서 추정했으며, 일부 무덤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고구려왕을 구체적으로 비정해내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왕릉보고서』는 고고학적으로 고구려 왕릉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왕릉보고서』에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이들이 어느 왕의 무덤으로 비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에 담긴 내용들은 고구려왕릉 비정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고, 이후 고구려 왕릉에 대한 논의가 다양하게 시도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학자들의 연구내용을 정리해보면) 오히려 고구려왕릉 비정문제가 더욱 복잡해진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시된 표에서도 나타나듯이 고구려왕릉 비정에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는 왕릉비정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가 미진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본고는 『왕릉보고서』를 검토하여, 고구려 왕릉을 비정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서 시 도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집안지역의 고구려왕릉 비정논쟁에 필요한 몇 가지 내용을 검토 해 보고자 한다. 왕의 죽음이후 전개되는 상황을 정리할 것이다. 여기에는 왕릉의 조영에 따른 입지선정, 왕릉축조 등의 내용이 포함될 것이다. 이와 같은 기초적인 검토를 거친 연후에 각고구려왕릉 비정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 기대된다.

III. 맺음말

집안 지역의 고구려왕릉 축조에 관련된 내용을 고고학, 문헌적인 방볍으로 검토하였다.
고구려왕의 사후 전개될 상황을 검토하였다. 왕릉의 입지와 조건, 왕릉축조에 따른 시기, 기간,규모,방볍 등에 대한문제들이다. 이는 고구려 왕릉의 구체적인 비정에 앞서 검토되 어야 할 선행 작업일 것이다. 앞서 검토된 내용을 정리함으로서 결론에 대신하겠다. 고구 려왕은 죽음이후 즉시 매장되지 않았다. 죽음이후 가매장을 하였는데, 이렇게 가매장한 것을 續이라고 한다. 고구려왕은 약 3년간의 殯기간을 거쳐 매장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왕릉의 축조와 관련된 제반사항이 진행되었다. 고구려왕의 장지는 왕호에서 그 상황을 짐 작할 수 있다. 특히 장지명 왕호를 사용한 왕(예를 들어 동천왕, 서천왕, 중천왕,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의 경우는 좀 더 구체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왕릉의 조건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현 상황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유력한 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왕릉의 축조는 왕의 죽음이후 시작되었다. 광개토대왕의 경우는 죽은 지 23개월이 지난 이후에 매장되었다. 왕릉은 일정 규모이상이었을 것이다. 그 규모에 대한 문제는 집안지 역에 몇 명의 왕이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논쟁과도 연관이 있다. 적어도 30m 이상은 되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하지만 반란 등의 사유로 인해서 교체된 왕의 경우는 예외가 될 것이다.
왕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집안지역 고구려 왕릉은 모두 적석총으로 알려져 있다. 적 석총 안의 내부시설은 나무구조물이었다가 점차 돌구조물(석실)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돌 구조물(석실)로 조영된 왕릉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잘 남아있다. 장군분, 태왕릉, 천추묘 등이 돌구조물(석실)로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의 왕릉에 대한 정보는 원상이 모두 파괴된 관계로 추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말의 단서를 태왕릉의 묘실구조에 찾을 수 있다고 생 각한다. 태왕릉은 석실 안에 가형석곽(家形石柳)이 놓여 있다. 하지만 장군분에서는 가형 석곽이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전통적인 매장풍습의 영향이 석실분인 태왕릉 시기까지 잔 존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나무구조물은 정상부가 지붕 모양을 띄고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왕은 죽어서도 집 모양의 시설에 묻혔다. 생전의 생활모 습이 왕의 죽음이후에도 여전히 연장되었던 것이다.
집안지 역 고구려 왕릉의 축조방볍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왕릉은 돌로서 봉분을 크게 만 드는 적석총의 형식이다. 봉분을 만드는 방식은 계장식에서 계단식으로 발전하였다. 왕릉 의 축조는 땅위에 돌을 높게 쌓아 커다란 봉분을 만들고, 봉분의 상단부에 무덤방을 구성 하였다. 무덤방은 나무구조물과 돌구조물(석실)로 구분된다. 석실이전의 무덤방은 나무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무덤방을 집 모양의 나무구조물로 만든 연후에 이 시설물을 보호하 기 위해서 석재를 쌓아서 지붕부를 구성하였다. 물론 그 지붕부분에는 흙이나 기와, 와당 등을 덮었을 것이다. 나무구조물은 관이 옆으로 들어가도록 입구가 만들어진 시설, 즉 횡혈식 또는 횡구식의 구조였을 것이다.

The Construction of Koguryo royal tomb in the area of Jian(集安)

KONG Seok-koo

This paper examines the contents related to the construction of Koguryo royal tomb(王陸) in the area of Jian(集安); the situation developed after death of Koguryo kings by the way of archaeology and documents. These are issues about conditions of location of a royal tomb, time, period, size, and method based on the construction of a royal tomb. This will be the required work that should be investigated prior to the study of Kogurγo royal tomb. 돼e conclusion will be replaced by arranging the examined contents earlier. Koguryo kings had not been buried immediately right after death. Kings were buried after about 3 year temporarγ burial. During this period, various details related to the construction of royal tomb had been proceeded. The situation of the burial place of Koguryo kings can be assumed from the royal title. In particular, in case of the king who used the royal title with the name of the burial place, more concrete assumption is possible. There may be several things about the condition of a royal tomb, and yet it is considered that its size is the most influential condition at the present situation. The construction of a royal tomb started after the king had passed away. In case of Kwangaeto the ttaerG廣開士大王), he was buried 23 months after his death. It is presumed that the size of royal tombs is more than the fixed one. The argument on the size is connected with the one on that how many kings had existed in the area of Jian(集安). It is assumed that its size is at least more than 30m. But there will be an exception in case of the king who had been replaced because of rebellion.
What did royal tombs look like? It is known that all royal tombs in the area of Jian(集 安) are stone-piled tombs. The interior arrangements of stone-piled tombs used to be wooden structures and were gradually replaced by stone structures(a stone chamber).

The information on the royal tomb made of stone chambers is relatively well-reserved. It is hard to trace the information on the previous royal tomb because the original had been destructed. It is, however, conceived that a touch of a clue can be found from the structure of the burial chamber of the Great king' s tomb. House-shaped stone coffin box is placed in the stone chamber of the Great king’s tomb. I understand that it is because the influence of the traditional burial custom had been extant. It is, accordingly, grasped that the interior structure of a royal tomb at the time to build up with wooden structures had a house shape. In other words, it might be built in the way that they had made house-shaped wooden structures and then covered them with infoor tiles and their side tiles to protect the establishments. The lifestyle during the lifetime had been extended as the same as before after death.

Key Words : Kogurγo, king’ s tomb, Jian(集安), stone-piled tombs, royal t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