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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2-04 09:59
31_2008.7_서길수_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의 석성(石城) 연구
 글쓴이 : 관리자 (202.♡.11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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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문 :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의 석성(石城) 연구
서길수

서길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의 석성(石城) 연구        高句麗渤海硏究        31        2008.7        33~120       

Ⅰ. 머리말
Ⅱ.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음하(陰河)ㆍ영금하(英金河) 유역의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Ⅲ. 내몽고 오한기(敖漢旗) 맹극하(孟克河) 유역의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Ⅳ. 요령성 대릉하(大凌河) 유역의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Ⅴ. 하북성(河北省) 평천(平泉) 일대의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Ⅵ.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축성법
Ⅶ. 맺는말

Ⅰ. 머리말

필자는 「고구려 석성의 시원에 관한 연구 - 신석기시대 석성」(『고구려연구』23집, 2006)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그 뒤를 이어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의 석성을 다룬다. 필자는 1990년부터 15년간 고구려 산성을 연구하면서, 고구려 성의 가장 큰 특성인 산성과 석성의 시원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1998년 처음으로 내몽골 적봉을 방문하였을 때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석성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뒤 1999년, 2001년, 2002년, 2006년(4월, 10월, 11월), 2007년 내몽골과 요서지역을 답사하며 지속적으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동안 고구려의 축성법에 대한 연구를 거의 마쳐가는 시점에서 고구려 성의 시원에 대한 연구를 미룰 수 없어 이제야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1970년대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송산구(松山區) 하가점촌(夏家店村)에서 발굴된 유적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지역에는 하가점하층문화를 앞뒤로 하여 여러 가지 문화들이 존재하였는데 표를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요서지역 고대 문화
시대고대문화연대(BP)분포지역입지조건敖漢旗 유적 수전기
신석기문화  흥륭와문화
  (興隆窪文化)8000~6500동-醫巫閭山,
서-洵河,
남-渤海 北岸,
북-鳥爾吉河 이북 대부분 비탈 또는 산기슭    70  조보구문화
  (趙寶溝文化)6500~6000동서남-흥륭와와 비슷, 북-西拉木倫河 이북대부분 비탈 또는 산기슭  60후기
신석기문화  홍산문화
  (紅山文化)6800~5000西拉木倫河ㆍ대능하ㆍ소능하 사이 모두 비탈이나 덕땅(臺地)    500  소하연문화
  (小河沿文化)5000~4000홍산문화보다 좁다모두 비탈이나 덕땅(臺地)  40청동기문화 하가점하층문화
(夏家店下層文化)4000~3500서-하북성 張家口, 동-요령성 서부,
북-西拉木倫河고산형(高山形)
비탈형(斜面形)
덕땅형(臺地形)
평지형(平地形)  1600
산성 :
1000이상 하가점상층문화
(夏家店上層文化)3300~2800위와 같음위와 같음  300자료 : 오한기 문화재 자료(加藤瑛二, 『中國文化の考古地理學的硏究』 180쪽 재인용, 필자 작성)

이 논문에서 다루려는 하가점하층문화는 지금으로부터 4000~3500년 전의 문화이니 서기로는 BC 2000~1500년에 해당한다. 한국의 고조선 연대가 BC 2333~108년이니 상한은 하가점하층문화 연대와 비슷하고, 하한은 하가점상층문화 연대인 2800년 전(BC 467년)과 비슷한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상한이 용산문화와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보다 늦고, 하한은 상(商) 말 주(周) 초까지 이어진다고 본다.
  하가점하층문화의 범위는 노노이호산(努魯爾虎山) 서북쪽인 내몽고 노합하(老哈河) 유역과 동남쪽인 요령성 서부 대릉하(大陵河) 유역의 유적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하북성(河北省) 평천(平泉) 일대까지 퍼져 있다. 지금까지 내몽고자치구 노합하(老哈河) 유역의 적봉시(赤峰市), 객라필기(喀喇泌旗), 오한기(敖漢旗), 영성현(寧城縣) 같은 4개 지역, 요령성 대능하(大凌河) 중상류의 북표시(北票市), 건평(建平), 조양시(朝陽市), 객좌현(喀左縣), 능원시(凌源市), 부신시(阜新市) 같은 6개 지역, 하북성(河北省) 평천(平泉) 일대에서 3000곳이 넘는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이 발견되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를 들라면 돌로 쌓은 석성(石城)을 들 수 있다. 이 논문은 바로 이런 석성의 현황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석성의 축성법을 찾아내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성은 주로 ① 내몽골 음하(陰河)ㆍ영금하(英金河) 유역, ② 내몽골 맹극하(孟克河) 유역, ③ 요령성 대릉하(大凌河) 유역, ④ 하북성(河北省) 평천(平泉) 일대에서 발견되었는데, 우선 Ⅱ장에서 음하(陰河)ㆍ영금하(英金河) 유역의 석성, Ⅲ장에서 맹극하(孟克河) 유역의 석성, Ⅳ장에서 대릉하(大凌河) 유역의 석성, Ⅴ장에서 하북성(河北省) 평천(平泉) 일대의 석성을 분석해 보고, 마지막 Ⅵ장에서 석성의 축성법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은 이미 많이 발견되었지만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진행된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축성법을 정리한다는 것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Ⅶ. 맺는말

1.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은 주로 ① 내몽골 음하(陰河)ㆍ영금하(英金河) 유역, ② 내몽골 맹극하(孟克河) 유역, ③ 요령성 대릉하(大凌河) 유역, ④ 하북성(河北省) 평천(平泉) 일대에서 수 천 개가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진행된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 축성법을 연구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 점은 앞으로 발굴이 진행되면서 더욱 보강 되리라 믿는다.

2.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지형 선택
하가점하층문화의 석성은 평지성과 산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요령성 강가둔(康家屯)석성을 빼놓고는 아직 평지에 쌓은 석성은 산성에 비해 그 숫자가 미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산성을 위주로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지형을 선택 기준을 보면 다음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석성의 고도에 대한 것이다. 가장 집약적으로 조사된 음하 유역을 보면 평균 해발고도는 768m이다.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은 대부분 지대가 높은 곳에 건설하였으며, 그것은 홍수나 강의 범람에 대처하여 안전한 곳을 골라 유적을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① 수원에서 가까운 곳, ② 수원을 통제하는 곳, ③ 교통 요지를 통제하는 곳을 골랐다. 따라서 산성은 수원을 쉽게 확보하고, 그 수원과 교통요지를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석성은 모두 절벽이나 가파른 비탈 가장자리에 쌓았는데, 일반적으로 한 면은 절벽, 양측은 강 물줄기(支流)나 구릉지대 골짜기에 형성된 가파른 비탈이다. 이처럼 양쪽 또는 3면이 모두 계곡의 구렁이나 낭떠러지(絶壁)고, 그 뒤는 높은 산봉우리가 일반적이다. 적은 공격하기 어렵고, 아군은 막기 쉬운 지형을 고른 것이다.

3.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분포 특성
첫째, 1960년대 조사연구에서는 비교적 큰 석성 주변에 일정량의 작은 성들이 부속되어있다고 보았는데, 1990년대 조사에서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많은 성이 전체적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어, 자연부락이 자연스럽게 널려 있는 것처럼 크기가 들쭉날쭉하여 어떤 법칙성을 찾아내기 어렵다고 보았다. 
둘째,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은 대부분 강이나 강의 지류 가까운 곳에 띠꼴(帶狀)로 분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1960년대 조사는 주로 강 북쪽 양지의 땅에 많은 석성이 있다고 했는데, 1990년대 전면적으로 조사한 결과 강남에서도 많은 석성이 발견되어 강의 양안(兩岸)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는 강 양쪽에서 방위와 공격을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성돌과 성벽 쌓는 법
1) 성돌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가운데 산성들은 대부분 성돌은 다듬지 않고 큰 바위에서 깨져 나온 그대로 썼기 때문에 생김새와 크기가 모두 다르다. 10㎝가 안 되는 작은 성돌에서 1m쯤 되는 것까지 아주 다양한 크기와 생김새이다.
2) 성벽 쌓는 법
성벽을 쌓으려면 맨 먼저 기초를 다져야 한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석성 바닥 기초는 특별히 판축(版築)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돌을 절묘하게 쌓아 올렸는데, 보통 아래 부분에는 아주 큰 돌을 사용한 곳도 있다. 평지성인 강가둔석성에는 두께가 비교적 일정한 널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바닥에 큰 돌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맨 아랫줄 돌들이 가지런한 것을 보면, 바닥을 좀 다지고 높이를 일정하게 고른 뒤, 그 위에 돌담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벽은 양면쌓기와 외면쌓기를 모두 사용하였다.
평지성인 강가둔석성과 삼좌점석성의 북벽은 모두 양면쌓기를 하였다. 안팎 겉쌓기는 모두 돌로 쌓아올렸는데 겉쌓기 한 부분은 가지런한 편이다. 돌벽 가운데는 흙과 돌로 채웠다. 성벽은 밑이 넓고 위가 좁아 사다리꼴을 나타낸다. 삼좌점석성의 북벽처럼 담을 2~3층 계단식으로 쌓은 것도 있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외면쌓기는 삼좌점석성에서 발굴한 동벽에서 잘 볼 수가 있다. 안쪽에 있는 흙담 바깥쪽에 돌을 붙여 쌓아올려 마치 축대를 쌓은 것 같이 하였다. 성벽 밖에 쌓은 돌은 적어도 안팎 두 겹으로 되어 있고, 구간에 따라서는 세 겹으로 된 곳도 있어, 두께가 1m에 이르는 석벽을 이루고 있다. 밖에서 안쪽으로 비스듬하게 쌓아올려, 위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아 기울기가 70~80도 쯤 된다. 

5.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옹성문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옹성문이 발견된 것은 아주 특기할만하다. 
오한기의 성자산산성에서는 9개의 성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동남쪽의 4ㆍ5호와 북쪽의 8호 성문은 옹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4호 성문은 안으로 5호 성문은 밖으로 U자꼴로 만들어 방어력을 높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벽 밖에 성벽을 두 겹으로 쌓고 외성문(外城門)을 만들었다. 8호 성문은 서쪽에서 오는 벽은 안으로 들어가고 동남쪽에서 오는 벽이 그 벽을 밖으로 감싸 안은 듯이 생겨 옹성 꼴을 하고 있다.
강가둔석성의 동문은 성문 밖으로 튀어나오는 담을 2개 쌓았다. 이 2개의 담에서 불과 3m쯤 떨어진 양쪽에 다시 치가 설치되면서 성 밖에 ┸┸┸┸ 꼴의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필자는 성문 양쪽에 두 개의 치(馬面)를 설치하여 성문에 들어오는 적군을 3면에서 공격하는 시설을 ‘적대(敵臺)를 사용한 凹자꼴 옹성’으로 분류하였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강가둔석성의 동문은 적대를 사용한 凹자꼴 옹성 안에 다시 두 개의 담을 쌓은 아주 특이한 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옹성이란 적이 성문에 쉽게 접근하는 것을 막고, 적을 공격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시설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성문에 설치한 이러한 특수시설들은 옹성의 효시(嚆矢)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치의 특성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에는 제법 많은 치들이 발견되고 발굴되었다. 이러한 치는 성벽을 튼튼하게 지탱해 주고, 적을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특수시설로 후대 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하가점하층문화 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① 모두 반원형이다. 후대 고구려의 석성에 나타난 치들이 모두 네모꼴인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② 돌로 겉을 쌓고 속을 흙으로 채웠다. 신점에서 발굴한 치나 강가둔에서 발굴한 치 가운데는 속을 흙으로 채우지 않고 공간으로 비워둔 곳도 있다.
③ 겉에 쌓는 돌은 한 겹으로 쌓은 것도 있지만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쌓은 것도 있다.
④ 후대의 치에 비해 치와 치 사이 거리가 아주 가깝다. 이것은 첫째, 평지성에 비해 산성은 지세가 가파르기 때문에 성벽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둘째, 당시 사용한 무기의 성능이 후대보다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7. 성안의 각종 시설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에는 다른 고대의 성에 비해 많은 시설들이 지금까지 잘 남아있어 당시의 생활을 쉽게 엿볼 수 있게 한다. 대부분 시설들을 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각종 시설을 보면 몇 개의 구역(區)으로 나뉘고, 각 구역은 다시 몇 개의 뜰(院)로 나뉘는데, 각 뜰을 나누는 뜰담(院墻)이 잘 남아 있다. 각 구역 안에는 길(道路), 문(門), 배수구멍(排水洞), 집터(房址), 돌로 쌓은 구덩이(石築穴), 돌로 쌓은 창고(石倉), 돌로 쌓은 대(石臺), 잿구덩이(灰坑), 돌함(石函) 같은 유적이 남다.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성안에 있는 시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을 들라고 하면 바로 집터이다. 우선 그 수량이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다. 음하(陰河) 유역에 있는 석성에서 발견된 집터만 해도 336채나 되고, 오한기(敖漢旗)의 성자산산성 같은 경우는 하나의 성 안에 무려 228채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한 성 안에 228채의 집터가 있는 성이 존재했다는 것은 국가규모의 조직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한 성 안에 700~1000명의 인구가 활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터는 돌로 쌓은 홑고리(單圈)ㆍ겹고리(双圈) 집터와 반움집터(半地穴房址) 같은 몇 가지 건축 형식이 있다. 그 가운데 돌로 쌓은 겹고리 집터가 가장 많고, 홑고리 집터가 그 뒤를 잇는다.
이런 유적들을 종합적으로 관찰해 보면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은 고도의 기술로 잘 설계된 주거지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군사시설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한 지역에 수많은 석성들이 밀집해 있고, 그 많은 석성을 뒷밭침해 줄 수 있는 충분한 인구와 시설을 갖춘 주거지역들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주거지역이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8. 성 밖의 시설 해자(垓字)
해자가 있다는 것은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의 특색 가운데 하나이다. 발굴한 강가둔석성에는 동벽과 남벽 바깥에 모두 해자가 있는데, 성벽에서 2.2m 떨어져 있다. 단면은 사다리를 거꾸로 한 꼴인데 바닥은 둥글다. 위쪽 너비 7.5~9m, 깊이는 3m다. 산성인 삼좌점석성에도 해자와 성벽이 서로 결합하여 완전한 방어체계를 구성하였으며, 삼좌점 동량(東梁) 석성의 내성 북벽 바깥에서 해자유적이 발견되었다. 성벽에서 1.5~2m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는데, 길이 35m, 너비 3~5m이다.
이처럼 평지성과 산성에 해자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성안 주거지역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런 시설은 해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에서 보았듯이 성벽이나 옹성, 치 같은 시설을 감안해서 보면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은 분명히 군사방어적인 목적도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꼬리말 : 지금까지 필자는 치와 옹성의 시원에 대해 고구려의 치와 옹성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았으며,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에 나온 치가 가장 이르지 않겠는가 하는 소극적인 추측만 하였다. 그러나 이번 논문을 통해서 치나 옹성은 모두 하가점하층문화 석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만 하가점하층문화에서 고구려 석성까지 1500년 남짓한 시간차가 생기기 때문에, 이 시간차를 메우는 것이 앞으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