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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22 20:41
금대 발해 유민 장여유 묘지명 소개
 글쓴이 : 정보관리자 (155.♡.164.102)
조회 : 4,429  
장여유의 개석과 지석은 최근 발견된 것은 아니고, 이미 1956년 9월 중국 북경 서쪽 교외의 백만장(白萬庄) 이리구(二里溝)에서 출토되었다. 개석은 세로 높이와 넓이가 모두 91㎝이고, 두께가 10㎝이다. 지석은 높이 89㎝, 넓이 91㎝, 두께 11㎝이다. 개석은 전서(篆書)로 4행, 각 행마다 4자로 “대금고선위장군우선휘사장공묘지명(大金故宣威將軍右宣徽使張公墓誌銘)”이 새겨져 있다. 지석은 정체로 39행, 각행 38자로 이뤄져 있으며, 금 태화 7년(1207)에 제작되었다. 이 묘지석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탁본이 북경도서관에 남아 『북경도서관장중국역대석각탁본회편』에 수록되었고, 관련 논문이 1991년 한편(侯堮, 「金〈张汝猷墓誌〉考释」) 나왔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장여유 지석의 지(誌)에서는 “공의 성은 장씨이며, 요동인이다.”라고 하였다. 발해유민의 상당수가 그 출자를 요동인으로 밝히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그가 발해유민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지석에 나오는 가족의 이름을 보면 그는 발해유민이 확실하다. 그리고 명(銘)에서는 “공훈의 명망(勛(勳)望)있는 문지(門地)로는 장씨가 제일”이라고 하였다. 묘지석이 묘주를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미사가 많이 사용된다는 특성상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실제 그의 집안은 이러한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장여유의 부친인 장호(張浩)는 금 태조부터 세종대까지 5대의 황제를 보좌하고 재상에 올랐던 유력한 세력가였다. 그의 아들들도 모두 현달하였다. 『금사』에 수록되어 있는 장호의 열전을 보면, “요양 발해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호의 집안은 원래 고씨이며 동명왕(東明王)의 후예인데, 증조 패가 요(遼)에 입사(入仕)하면서 성을 장씨로 했다고 한다. 장호의 집안이 고구려왕실 후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와 발해 출자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에는 장호의 부친인 장행원(張行愿)의 묘지석이 요양시에서 발견되어, 장호의 집안이 요대부터 유력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장여유의 묘지명으로 인해, 그의 가계와 통혼 관계가 더욱 자세하게 밝혀졌다. 7대에 걸친 내역으로 이는 발해인, 발해유민을 모두 합쳐 유일한 사례이다. <권은주, '발해사 연구, 금석문과 만나다' 복현사림 34, 2016, pp.38~39>

*장여유 묘지명의 상세한 분석은 현재 진행 중이며, 2018년 논문 게재 예정임.

                                                                    작성자 정보이사 권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