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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09 19:02
高句麗時代 暖房 施設의 구조적인 특징과 熱的 효율성에 관한 연구(17차 학술대회)_서정호
 글쓴이 : 관리자 (202.♡.113.28)
조회 : 14,091  
   온돌논문(서정호).hwp (1.8M) [89] DATE : 2008-09-09 19:02:52
高句麗時代 暖房 施設의 구조적인 특징과 熱的 효율성에 관한 연구

                                                      徐 廷 昊*



Ⅰ. 序 言

 우리나라의 전통주거 建築의 양식의 변천은 기후, 강우량, 바람, 일조 등의 자연 환경에 잘 조화 될 수 있도록 발전되어 왔다. 특히 겨울철에는 대륙성 기후, 여름철에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뚜렷한 4계절을 나타낸다. 이러한 기후 특성 때문에 추운 겨울을 위해서는 방을 중심으로 한 온돌구조(溫突構造)가, 무더운 여름철을 위해서는 대청(大廳)을 중심으로 한 마루구조가 발달하였다. 특히 추운 지방에 위치했던 高句麗는 溫突이라는 난방 시설을 갖추었는데, 溫突은 열을 저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熱源이 외부에서 공급되기 때문에 유럽의 벽난로 시설처럼 熱源이 실내에 있으므로 해서 발생되는 실내 공기 환경이 나빠지거나 열 효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등으로 미루어 볼때 최적의 난방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溫突은 복사난방방식(輻射煖房方式, Radiant heating)의 일종으로 이 방식은 바닥 等의 구조체를 적당한 온도로 가열하여 인체에서의 輻射熱의 放散量을 억제하고, 실내 공기 온도는 보통의 난방에 비해 낮게 하므로 전도·대류에 의한 열 발산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이 방식을 취하는 溫突은 溫熱環境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우수함이 돋보이며, 우리 민족 고유의 특유한 생활습속(生活習俗)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溫突의 발전 단계를 주남철은『한국주택건축』(일지사)에서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아궁이에서 장작이나 짚 등 을 연소(燃燒)시켜 그 연소 공기를 바닥 밑으로 보내어 연도(燃道)와 굴뚝을 통해 외기로 배출시키는 방식(1950년대 이전) 둘째, 정부에서 임산자원(林産資源)의 보호를 목적으로 전통 溫突 方式에서 연료와 아궁이를 개량한 연탄용 방식(1970年代末 이전) 셋째, 1970年代末 이후 연탄가스에 의한 피해 방지와 열 효율(熱 效率) 향상을 위해 온수 보일러를 이용한 파이프 埋設方式 등이다. 여기서 연탄용 방식과 파이프 매설 방식은 그 以前 형태의 근대적 발전 단계로서, 근래에 들어 연료변화에 따른 것이지 전통 溫突의 전체적 유형의 종류로 분류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파이프 매설식 溫突과 1950년대까지의  溫突은 그 원리와 구조상 상당한 차이가 있고, 전통 溫突이라 함은 1950년대 이전까지의 溫突로 규정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최근까지 밝혀진 전통 溫突 暖房 방식의 시기별 형태 및 특징과 고구려 시대의 溫突 暖房의 기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난방 시설에 관한 유적 및 유구(遺構)의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하여 高句麗時代 난방 시설의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보고, 溫突의 과학적인 우수성과 熱的 효율성 분석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Ⅱ. 고구려시대 溫突 暖房 施設의 발전과 기원

 溫突이라는 난방 시설의 발생과 그 기원에 대해서는 희랍 문화권에서 발생하여 만주 쪽으로 전래되었다는 西方 移入說, 중국 서북부 산서성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다시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산서성 起源說, 만주에서 기원하여 한반도로 전래되었다는 만주 起源說, 손진태, 최남선 등의 高句麗 起源說 등이 있다. 西方 移入說의 경우 서양에서는 기원전 100년경에 로마의 건축가 Sergius Orata가 Hypocaust 라는 溫突과 비슷한 低溫 복사난방 시설을 고안하여 로마의 Thermae(공중 목욕탕)과 북부지방의 Villa(저택), 그리고 독일, 영국 等地의 주택 기초에서 다수의 例를 찾을 수 있으나, 아직 Hypocaust와 溫突과의 관계는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산서성 起源說의 경우 이미 한반도에서 이 시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ㄱ"字형 구들유적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이 설은 의문을 갖게 한다. 한편 수경주(水經注) 이후 600년 동안 中國側 문헌에는 언급이 거의 없지만 고구려에서는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볼 때, 溫突은 우리 민족이 처음 사용하였으며 중국으로도 전파되고 이후 한층 더 발전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수경주의 기록은 이방인에 의한 최초의 발견이지 구들의 발상에 대한 기록은 아니라는 견해가 학자들간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만주 지방의 暖房 施設인 캉도 우리의 溫突과 비교해 볼 때 형태적으로 보면 입식 생활의 구조에 어울리도록 발달된 것으로, 캉은 한민족의 "ㄱ"字형 구들이 그들의 주거 양식에 알맞게 개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시대 溫突의 起源을 살펴보기 위하여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인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暖房 施設과 관련된 遺蹟의 발굴 보고서를 통하여 어떻게 발전되고 전달되었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1.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는 발굴된 유물의 放射線 炭素측정 결과, B.C 6000년경에 시작하여 B.C 1000년경까지 약 5,000년간 지속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 중기에는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였으며 해안(海岸)지방이나, 하안(河岸) 또 호안(湖岸)에 살면서 수렵과 어로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적으로 이들의 유적들이 발견되는 곳은 대동강, 한강, 낙동강, 두만강과 같이 큰 강의 강변 지역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평남 대동군 청호리, 한강 南岸의 광주군 미사리, 서울 암사동 유적을 들 수 있다. 
                                                  사진 1. 서울 암사동 유적
 암사동 住居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어 24기의 신석기 움집이 발견된 한강 유역 유일의 대규모 취락 유적이다. 사진 1에서 보듯이 원형일 경우는 직경이 약 5∼6m, 평면이 말각방형(末角方形)일 경우는 장변이 약 4∼6m정도로 면적이 20∼40㎡ 범위가 일반적인 크기이다. 이 정도의 규모는 성인 1인당 주거 면적을 4.5㎡로 계산한다면 대개 성인 4∼8명의 가족 구성원을 수용하는 규모다. 竪穴 깊이는 1m 정도이고 바닥은 생토인 황백색 모래층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가장자리에는 불을 사용하였던 시설로 길쭉한 강돌 9개와 할석 1개를 둘러놓은 노지(爐址)가 설치되어 있다. 이 시대의 노지(爐址)는 暖房 溫突 시설의 기원으로 생각된다.
신석기 후기에 이르면 농경이 시작된다. 즉, 종래의 식량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 변화된 것으로 10∼20호 정도의 竪穴 주거로써 영위되었던 취락이 지탑리, 궁산리에서 발견되었다.
 평남 온천군 궁산리 유적에서는 모두 5개의 竪穴 住居址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원형 평면을 이루고 있었다. 제1호 住居址(B.C. 5000∼4000)는 竪穴 住居址로 평면은 직경 약
5.6∼5.8m의 부정원형으로 되어 있고, 竪穴       

(그림 1) 서울 암사동 제 6호 住居址

깊이는 1.2∼1.3m이며 서남쪽에  출입구로 보이는 유구가 있다. 爐의 깊이는 30cm 정도로 주변에는 깨어진 석판을 돌려 놓았다. 그 중 한 개에 원추형의 소공(小孔)이 있는데 이것이 발화시설인 것으로 추정된다.
 궁산리 제5호 住居址(B.C. 3000)에서는 대체로 방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원형 竪穴에서 방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이 나타난다. 평면의 형식은 南北 약 1m, 東西 약 0.7m의 타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竪穴의 깊이는 35cm 정도로 주변에 불에 그을린 점토가 폭 5∼10cm로 노지(爐址) 주변에 돌려 있고, 기둥 구멍들이 노(爐)를 중심으로 하여 직경 3m의 원을 이루면서 수직으로 된 것을 보면 수직 벽체의 출현으로 생각 할 수 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B.C. 5000-4000)에서는 삼국시대 土城 내부에서 3개의 住居址가

(그림 2) 봉산군 지탑리 1호 住居址

발견되었는데 모두 방형 평면을 이룬다.
 봉산군 지탑리 제1호 住居址는 한 변이 7m 내외의 방형 평면이고, 동남쪽에는 폭 1.1m의 계단과 동북쪽에는 폭 80㎝의 출입구로 보이는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다. 竪穴 깊이는 약 40cm로 벽과 바닥에는 점토를 깔고 다졌다. 중앙에는 강돌을 돌린 타원형 노지(爐址)가 발견되었다.
 또한, 제3호 住居址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 노지(爐址)가 남북 1.1m, 동서 0.9m 가운데 부분의 깊이가 20cm 정도이고 노지(爐址) 주변에는 돌이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돌을 인공적으로 쌓았던 흔적이 발견된다.

2.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바탕으로 일정 지역의 人口 數가 증가하고 취락은 커지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 시대의 주거는 경제 활동이 유리한 지점인 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다. 특히, 이 시기를 대표하는 요동반도에 위치한 쌍타리 유적에서는 14개의 住居址가 발견되었는데 모두가 막돌로 벽을 쌓은 지상 가옥에 가까운 반 움집 형식으로 되어 있다. 平面의 윤곽은 방형에 가까우며 화덕자리가 방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또한, 평북 강계시 압록강 지류인 수노강변의 공귀리 유적 제5호 住居址는 평면의 한 변이 5.7∼6.7m 인 부정방형이며 竪穴의 깊이는 50cm 내외로 바닥도 진흙이 다져 깔려 있고 중앙보다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노지(爐址)가 있다. 바닥은 판석을 깔았으며 주변에는 동쪽에 3개, 서쪽에 2개의 자연석을 세웠다. 또한 노지(爐址)의 크기는 70×55cm이며 평면은 장방형이다.
경기도 파주군 교하리유적 제1호 住居址는 평면 장축이 西에서 약간 北으로 기운 東·西向을 하고 있으며 장변이 9.5m, 단변의 길이는 3.2m이다. 竪穴의 깊이는 35∼50cm 이다. 장축을 따라 중앙에 기둥구멍이 나란히 만들어져 있다. 노지(爐址)는 동쪽에 치우쳐 2개가 발견되었는데 장변이  길이가 60cm되는 타원형으로 그 깊이는 10∼15cm 정도였고, 노(爐)주변에는 아무 施設 없었다. 그러나 竪穴의 서북벽 가까이에서 이 벽에 평행으로 되다가 西·南벽 쪽으로“ㄱ”字로 꺾여 나가는 배수구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되었으나 배수구의 말단부를 파악 할 수 없었다.
 (그림 3) 함경북도 회령 5동 유적 8호 住居址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유적(B.C 7C∼B.C 13C)은 모두 산의 傾斜面을 낮은 쪽에서부터 파고 들어가서 생긴 평지를 만들어 이용한 반 竪穴식 住居址이다. 平面은 8호의 住居址의 경우 동서 7.5m, 南北 3m 의 긴 장방형이다. 노지(爐址)는 “U”字형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西·南편에 치우쳐 있다. 제12호 住居址는 3개의 爐자리와 저장 시설이 住居址 구석의 벽 쪽에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취사와 난방을 분리한 것을 알 수 있다.
 함경북도 회령 5동 유적 8호 住居址 (청동기 B.C 10C∼B.C 4C)는 길이 8.4m, 폭 6.5m의 방형 平面으로 바닥의 竪穴 깊이는 0.75∼1.4m이고, 住居址의 바닥은 진흙을 깔고 다졌다. 중앙에는 동남쪽으로 치우쳐 85cm×65cm의 장방형으로 주위에 돌을 두르고 西北벽 가까이에 붉게 탄 진흙을 싼 둑처럼 보이는 시설의 노지(爐址)(이것은 난방용이 아닌 부뚜막 시설로 믿어진다)를 한  2기의 爐址가 발견되었다. 동남쪽의 화덕은 방바닥을 파고 그 둘레에 막돌 8개로 둘러 싼 것이고, 서북쪽 것은 방바닥에 진흙으로 둘러 싼 것인데 동남쪽 것에만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탄재가 차 있는 것으로 보아 항상 불을 피우던 즉 취사용 화덕이고, 불피운 흔적만 있는 서북 쪽 것은 추운 겨울에만 불을지 핀 暖房用의 것이라 추측된다.
                        (그림 4) 평북 영변군 세죽리 유적

 평북 영변군 세죽리 청천강 유역에 위치한 이 유적은(그림 4) 1962년에서 1963년에 걸친 조사 결과 총 27개의 住居址가 발견되었다. 23호 住居址의 형식은 南北 9.5m, 東西 5.1m 규모의 장방형 평면으로 북벽에 치우쳐 2개의 화덕 자리가 설치되어 있다. 북벽으로 1.2m 떨어진 곳에 작은 노지(爐址)가 있고, 그 곳에서 다시 1m 떨어진 곳에 큰 爐址가 놓여 있다.  爐址의 주위는 돌로 쌓아 마무리를 하였다.
 청동기시대 住居址의 특징을 살펴보면, 평면이 방형이거나 장방형으로 규모가 커지고 바닥의 깊이가 신석기시대보다는 얕고 노(爐)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노(爐)가 2 개 이상 놓인 예도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爐를 중앙에 하나만 만들어 이용하다가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爐가 집의 벽쪽으로 옮겨지고 2개 또는 그 이상이 놓여져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난방을 위한 기능뿐 만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벽쪽으로 붙은 시설은 난방보다는 화덕 또는 부뚜막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이 때에는 노(爐)옆에 있던 저장 시설은 없어지고 별도의 대형 저장 시설이 생겨난다. 또 건축 구조도 생활 도구와 더불어 발달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直立하는 외벽과 서까래를 도리에 걸쳐 처마를 땅에서 떨어지게 架構하였다는 것을 발굴된 住居址의 흔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청동기 시대에는 생활의 형태가 바뀌어 농경으로 인한 가축의 사육과, 인력의 필요에 따른 공동 협력 등으로 취락이 이루어져 발전된다. 또 경작의 성과에 따라 빈부의 차가 생기고 복합적인 우열의 관계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기게 되었다. 노(爐)의 구조도 이 시기에는 특이하게 발달된 例가 발견되는데, 이것이 차츰 우리나라 溫突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3 철기 시대

 초기 철기시대의 주거 유적은 청동기 시대에 비하여 발굴 예가 적은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유적은 강원도 춘천시 북한강의 섬에 위치한 중도유적이다. 이 유적의 제 1호, 제 3호 住居址는 평면 모서리를 곡선 처리한 말각방형으로 규모는 5.4m×5m로 竪穴 깊이는 42cm이다. 바닥은 중앙에 직경 2m만 점토를 다진 모래 바닥이며,  壁은 東壁에 폭 150cm의 둑이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져 어깨선 위에서 폭 70cm 높이 30cm 가량 되므로, 부뚜막으로 생각된다.
이 가운데 제 1호 住居址 노지(爐址)는 움집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50cm 치우쳐 위치하는데, 그 크기는 남 북향을 긴축으로 하는 길이 120cm와 폭 92cm의 타원형이다. 노의 서쪽으로 높이 14cm, 폭 12cm, 길이 40cm의 큰  돌이 하나 놓여있고, 그 외 3방향에 이보다 낮게 6∼7개의 납작하고 길쭉한 강돌을 두르고 이들을 다시 진흙으로 보강하고 바닥에도 진흙이 덮여 있었다. 이 바닥의 진흙을 벗겨보니 크기 5∼15cm 가량의 둥글고 납작한 강돌 50여개를 爐안에 빽빽이 깔아놓은 것이 확인되었다. 


  사진 2. 중도 3호 住居址                사진 3. 중도 1호 住居址 화구자리

 
이 爐의 서북쪽 바로 곁에서 항아리형 토기 2개가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었는데 탄화(炭化) 된 좁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爐址와 연결되는 듯 중앙부를 비스듬히 가로지른 굴뚝 시설로 추정되는 진흙으로 만든 둑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이 진흙 둑은 가장 주목하여야 할 부분으로 東壁에 있는 진흙 둑의 폭이 1.5m 이고 이것이 차츰 좁아져 움집 벽의 어깨위로 올라가 폭이 70∼75cm로 좁아지며 길이는 1.5m 이고 높이가 30cm 가량 되었다. 동쪽 벽에 붙은 진흙더미 속에서 아궁이와 같은 터널이 발견되었는데 높이 23cm, 幅이 50cm 이고 그 속에는 두께 2.5cm의 나무 판자가 가로막혀 있었다. 이 진흙 구조물은 굴뚝과 같은 시설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住居址는 연대 측정결과 기원전 약 2∼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위의 발굴 보고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 유적의 난방 및 부뚜막과 관련된 것으로 다른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앙부의 爐와 東壁에 붙어있는 진흙 화덕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앙에 있는 爐와 동벽에 붙은 부뚜막은 별개의 시설로, 하나는 난방의 기능을 하고 또 하나는 부뚜막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난방 시설은 방 중앙부에 두어 효율을 높이고, 부뚜막은 취사를 하기 위하여 四季節 매일 사용해야 하므로 연기를 밖으로 쉽게 뽑아 내는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벽에 붙여 시설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서 노지(爐址) 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진흙을 덮은 것과 한쪽에 큰돌을 세워 놓은 것은, 돌이라는 蓄熱 매체를 통하여 열을 이용하기 위한 시설로 볼 수 있다. 즉, 지금의 溫突은 밑에서 상향으로 데워지지만 이 유적에서 발견된 溫突 시설은 구들 위에서 하향으로 데워지거나 측면으로 데워지는 형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부터 溫突에 사용되는 재료로 돌과 진흙 등 축열 효과가 좋은 재료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사료된다. 이러한 爐와 부뚜막의 구조는 최근에 조사된 경기도 한강변 미사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고,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초기 철기시대 前後 즉 原 삼국시대 초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추정이 된다
 경기도 한강변 미사리 유적(B.C. 4C∼A.D.1C)은 바닥에 돌을 가지런히 깔고 주위에도 돌을 두르는 하향식 溫突형 노(爐)를 시설하고, 후대로 들어와서는 직경 5m 내외의 둥근 평면 움집에 북쪽 또는 서북쪽 壁에 붙여 만든 길이 1.3m, 폭 70cm, 높이 50cm 정도의 부뚜막이 확인되었다.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 住居址(B.C 2C∼1C)는 중도 유적과 같은 형태로 5m 내외의 정방형 住居址의 내부에는 북쪽벽에 치우쳐 바닥과 주위의 爐壁을 거의 진흙으로 만들고 북쪽의 일부만 돌을 세워 막은 길이 1.2m, 폭 1m의 타원형 노지(爐址)가 발견되었다.
 수원시 서둔동 제 7호 住居址에서는 한 변이 4m 내외의 방형 움집으로 최초의 “ㄱ”字 구들이 나타났다. “ㄱ”字 구들은 북벽에 붙여 한 변이 약 30cm인 얇은 흙벽돌을 30cm 간격으로 양측에 세우고 그 위에 똑같은 크기의 벽돌을 덮어서 터널형 구들을 구축하고, 서쪽 끝에서 다시 서벽을 따라 굽어져 아궁이를 만들고 동쪽 끝에서는 벽에 붙여 굴뚝을 올렸다.

Ⅲ. 고구려시대 난방 시설 遺蹟

  고구려시대의 溫突 난방 시설에 대하여서는 우리나라와 중국 東北지방에서 발굴된 약간의 住居址와 절터, 그리고 북한에 위치한 몇 곳의 주거 유적, 한강변의 아차산 보루와 같은 군사용 住居址와 그밖에 고구려 무덤 벽화를 통하여 溫突의 규모나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다.  먼저 발굴 과정에 드러난 溫突 유적들을 분석하여 보면 <표 1>과 같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자강도 평북 시중군 노남리 유적, 중강군 토성리 유적, 평안남도 북창군 대평리 유적, 중국 길림성 集安縣의 장천유적, 지구촌 유적, 길림성 集安縣의 東台子 유적에서 溫突의 유적이 보고되었다. 한편 1988년 한강 유역에서도 고구려 유적이 발견되면서 발굴 조사가 이어졌다. 그 결과 한강 北岸에서 군사용 시설인 보루가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의 구의동, 서울시 광진구와 구리시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아차산 제 4보루 등이 발굴되어 발표되었다.
  또한 溫突이 나타나는 벽화 고분들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 고분(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쌍기둥 고분(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안악 1호분(황남 안악군 오국리), 덕흥리 벽화 고분(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마선구 1호 고분(중국 길림성 集安縣 마선구), 씨름 고분(吉林省 集安縣)들이 대표적이다.
 <표 1>의 溫突 유적들은 고구려 시대의 살림집 유적들과 최근에 우리나라 한강 유역의 고구려 요새에서 발견된 보루시설에서 발표된 발굴 보고서를 정리한 것으로서 유적들의 대부분이 대체로 남향한 2칸의 방과 방마다 溫突을 놓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溫突은 이미 고구려 이전 시기에 우리나라에 적용된 살림집의 고유한 난방 구조로서 이 시기에는 "ㄱ"字형 외줄 고래 또는 두 줄 고래의 溫突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표 1> 溫突 난방 시설의 발견 유적 현황


1. 중강군 토성리 유적
 압록강 자강도 중강군 토성리 유적지는 신석기부터 초기 고구려시대 유적이 분포하는 지역이다. 제 4호 住居址(B.C 4C경)에서는 방안의 벽쪽에 아궁이를 설치하고 벽을 따라 꺾어서 외줄 고래를“ㄱ”字형으로 2∼3m 정도 설치하고 방밖으로 굴뚝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溫突 형태가 발견되었다. 제 5호 住居址(A.D 1C) 에서는 3∼4줄의“ㄱ”字형 溫突이 발견되었다.
2.북창군의 大坪里 遺蹟 
 이 유적지는 북부 산악지대와 이남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평안남도 북창군의 大坪里에 있는 제 2호 住居址 (고구려 B.C 1C∼3C경)로서 노남리 유적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유적이다. 溫突의 평면은 "ㄱ"字로 꺾인 두 줄 고래의 구들이 발견되었다. 구들의 북쪽 끝이 화구로서 두 줄 고래이며 남으로 내려오다가 이것이 "ㄱ"字형으로 꺾여 있고, 동쪽으로 연장되는 부분부터 외줄 고래로 되어있다. 즉, 외줄과 두 줄 고래의 混用으로 우리나라 두 줄 고래 구들  (그림 5) 대평리 “ㄱ”字형과 두 줄 溫突시설의 初期형태이다.

3. 평북 노남리 유적
이 유적지는 평북 慈江道 時中郡 노남리 독로강이 심하게 구부러져서 반원형을 이룬 곳에 생긴 남파동 강변에 있는 유적으로, 고구려시대 살림집의 구조와 생활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제 2호 住居址 (B.C 400∼A.D 100)에서는 지상가옥에 가까운 장방형 평면으로 되어 있고 東西 약13m, 南北 약 10m의 규모를 갖은 대형유적으로 바닥을 점토를 깔아 다진 것이 발견되었다. 바닥 중앙부와 東西편에 "ㄱ"字형과 외줄 溫突이 있는 것으로 한 住居址에 2개의 구들(그림 6)이 확인되었다. 동쪽에 있는 溫突 시설은 남쪽에 아궁이가 있고 약 3m 정도의 구들 시설이 있으며 서쪽으로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그림 6) 노남리“ㄱ”字형 두 줄 溫突과 외줄 溫突
4. 集安縣 東台子 遺蹟
 고구려 후기의 동대자 유적은 규모 및 平面構成의 형태로 보아 住居址보다는 祠廟建築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 溫突 시설을 갖은 평양의 定陵寺址의 살림집과 공통점이 많아 住居址로 보는 견해가 더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建物址는 정면이 35m, 측면이 11m 규모인데 중앙에 좁은 복도를 두고 동서에 각각 150∼170㎡되는 방이 있다. 여기에는 각기 동벽 중간에서 시작하여 벽을 따라 北向하다가 북벽을 따라 "ㄱ"字로 꺾여 연장되고, 이것이 다시 북쪽으로 꺾여 집 밖의 굴뚝과 연결된 溫突 시설이 있었다. 동쪽 방안에 있는 아궁이에는 깊이 0.6m, 폭이 2m인 큰 구덩이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溫突 고래에 이르기까지 자갈과 기와 조각을 엎어 깔았다. 또, 고래의 폭은 70cm, 깊이는25cm, 길이는 방안에서 10여m가 되었는데 서쪽 방의 기초는 積心石을 놓은 독립 기초로 하였다. 溫突의 유구는 좀 흐트러졌지만 두 줄 고래를 형성한 溫突도 있고, 또 시대를 달리하는 3줄 고래도 일부 발견되었다. 건물의 架構를 복원해 보면 동쪽 방은 組積式이고 서쪽 방은 架構式 구조의 방이었던 것 같다.

(그림 7) 集安縣 東台子 遺蹟 평면 ▶

5. 평양시 力浦區 定陵寺址 遺蹟 
 이 유적지는 동명왕능에서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고구려시대 寺址로 고구려의 전형적인 1탑 3 金堂式 가람 배치를 갖고 있다. 1974년 발굴 조사 보고서를 살펴보면 강당 동북쪽에는 溫突 시설이 있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僧房址가 있다. 제 1구역 제 10 호 건물지의 溫突은 건물의 약간 동쪽에 기댄 중앙에 아궁이가 있고 직선으로 북쪽으로 연결,

(그림 8)제1구역 제10호 건물지 (그림 9)제2구역 제1호 건물지  (그림 10)제 5구역  건물지

굴뚝은 건물의 外室의 塼으로 깔린 공간에 설치되어 있었던 곳으로 보여진다. 구들의 길이는 약 8m 정도이고 폭은 1.8m, 높이는 1.2m정도의 溫突 시설이다(그림 8).  제 2구역 제1호 건물지에 있는 溫突(그림 9)은 室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면한 곳에 아궁이가 있고 북벽을 따라가다가 서쪽의 굴뚝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 5 구역 건물지  溫突(그림 10)은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건물지에 있으며 이 건물은 북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크기는 東西 약 21.4m, 남북 15.6m의 낮은 기단에 5칸의 건물 서쪽에 치우쳐 있다. 아궁이는 東向으로 되어있고 북회랑의 외부로 나가 서쪽편으로 굴뚝이 연결되어 있다. 아궁이는 약 1m×0.9m 규모이다.   
 이 유적지는 건물지가 18개소였고 회랑지는 10개소나 된다. 寺址의 규모는 남북 길이가 132.5m, 동서의 길이는 223m 정도 된다.

6. 아차산 제4보루 난방 시설 
 아차산은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있는 표고 316m의 산으로 발굴 결과 이곳에서 모두 13기의 고구려시대 溫突 유적이 조사되었다. 발굴 번호 2호 溫突 1기를 제외하면 모두 건물의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어서 취사 및 난방을 주요 목적으로 설치한 시설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조사 된 溫突 유적은 13곳 모두 납작한 할석으로 벽을 쌓고 뚜껑 돌을 얹은 후 점토를 바른 외고래 溫突이며, 평면 형태에 따라 직선형과 “ㄱ”字형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굴뚝은 溫突 고래의 한쪽 끝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ㄱ”字형의 경우는 장변에 설치되어 있다. 아궁이 역시 溫突 고래의 한쪽 끝에 설치되어 있으며 “ㄱ”字형의 경우는 단변쪽에 설치되어 있는데, 두 경우 모두 溫突 고래의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표 2> 아차산 제4보루 溫突 난방 시설의 유적 현황


6-1. 제 1호 溫突
 이 溫突 유적은 3호 건물지 내부 가장 북쪽에 위치한 “ㄱ”字형 溫突로 東西 방향의 장변 길이는 6.4m, 南北 방향의 단변 길이는 2.8m 가량 된다. 발굴 당시 溫突의 구들장은 모두 제거 된 상태였으며, 벽체 주변에는 벽체와 구들장에 발랐던 점토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점토 내부는 짚을 섞었던 흔적이 있다. 溫突의 측벽은 얇은 할석을 깔고 돌 사이의 공간은 진흙으로 메웠던 것으로 보여진다.
 溫突 고래 장변의 동쪽 끝 부분에는 굴뚝이 설치되어 있는데, 다른 부분보다 약간 넓게 방형으로 할석을 쌓은 후 내부는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굴뚝의 내부와 외부에서 토제 연통이 깨어진 채 출토되어, 굴뚝은 토기를 이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굴뚝에 해당되는 부분은 연통을 세우기 위한 기초시설의 동쪽 중앙에 쇄기 모양의 할석이 하나가 밖으로 튀어 나와 있고 좌우에 납작하고 면이 고른 납작한 석재를 하나씩 세워서 마무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궁이는 두 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규모는 폭 40㎝, 높이는 약 35㎝ 가량이고 溫突의 단면이 끝나는 지점에 할석을 둥글게 돌려 지름 약 65㎝ 가량의 공간이 있다.



(그림 11) 제 1호 溫突의 현황 평면도·          (그림 12) 제 8호 溫突의 현황 평면도·입면도·단면도                              입면도·단면
     
 (서울대학교 박물관, 구리시 구리문화원,『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도판 18 인용』)

 溫突의 규모는 단변과 장변을 합해 약 9.2m에 달한다. 溫突고래의 내부 폭은 아궁이 쪽이 60㎝ 정도이고, 고래 쪽은 40∼50㎝, 높이는 35∼45㎝ 정도이다. 이 溫突 유적은 건물의 北壁과 東壁에 접하므로서 건물의 벽체로 부터 바로 마감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溫突의 단변 서쪽에는 비교적 치석이 잘된 석재를 이용하여 쌓은 석렬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溫突의 단변과 같은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 溫突 장변의 남쪽의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을 놓아 단단히 다졌는데, 일종의 주방 시설로 생각되며 폭 2m 가량 된다.
6-2. 제 8호 溫突
 이 溫突 유적은 1호 건물지 내부에 위치한 직선형 溫突로 서쪽에 7호 溫突이 인접해 있다. 溫突의 벽체는 판석과 할석을 이용해 쌓았으며, 아궁이와 구들 판돌은 잘 남아있다.
서벽은 2열로 쌓았으며, (그림 12)의 평면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아궁이와 뚜껑 돌이 잘 남아있는 상태로 출토되었다. 사용 당시 이 溫突은 함께 점토를 발라서 침상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제 7호 溫突과 합하여 최소 2.7m×4.5m 이상 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궁이는 溫突의 남쪽 끝에 설치하였으며, 화구는 동쪽인데, 아궁이 壁石과 이맛돌이 잘 남아있다. 정확한 굴뚝의 형태는 알 수 없다.
 직선형 溫突 전체의 길이는 溫突 450㎝, 溫突 고래의 바깥쪽 폭은 55㎝, 안쪽 폭은 50㎝, 높이는 40㎝ 정도 된다. 아궁이 상단에 솥을 걸었던 자리가 잘 남아 있는데, 방형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규모는 55×40㎝ 정도 된다.

7 壁畵 古墳 부뚜막 벽화
대표적인 벽화 고분으로는 평안남도 강서군 藥水里 벽화 고분으로 연도와 전실 東西 양측에 현실로 되어 있는데, 前室은 피장자의 생존시 생활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동편에는 부엌이 그려져 있다. 

 (그림 13) 약수리 고분 벽화(부뚜막)

벽화는 면회를 바른 벽면에 墨線을 그리고 채색을 하였다. 이 벽화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안악 3 호 벽화 고분의 부뚜막 형식과 같이 아궁이에 구들 고래를 “ㄱ”字로 만들고 그 끝에 굴뚝을 내는 고구려 초기 형식의 구성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안악 3 호 벽화고분의 부뚜막은 방의 구들 부분이 방바닥의 다른 부분보다 높게 되어 있다. 
 
Ⅳ. 溫突 난방 시설의 과학적 특징

 溫突에 관련하여『舊唐書』(東夷, 高麗條)에서는 "山谷에 살면서 띠로 지붕을 이었다"라는 내용이 있고, 『新唐書』(東夷, 高麗條)에서는 "겨울에 긴 고래(溫突)를 만들고 그 밑에 불을 피워 난방을 하였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북부 지역에서 기원 전·후 시기에 溫突이 살림집 난방으로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구려의 溫突 난방 기술은 백제와 신라에 전해졌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전 지역에 일반화되었는데 이때는 방바닥 전부가 구들을 이용하여 시공하는 溫突 시설이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고구려의 영토였던 북만주, 몽고를 중심으로 溫突 난방 시설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사실 북만주의 경우 고구려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민족의 영토였음을 상기하여 본다면 우리 민족이 溫突을 계승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표 3> 溫突, 캉, Hypocaust의 난방방식 간의 특징을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溫突이 과학적이고 우수한  구조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구려시대 溫突에 관한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ㄱ”字형 溫突이 발견되고 고래는 외줄과 두 줄 고래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지형적으로 추운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이 쾌적한 주거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실내온도의 유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실내환경의 쾌적성을 위해서 겨울에 적당한 난방 시설인 溫突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사진 4> 운산 용호동 1호분 출토 부뚜막

<표 3> 溫突, 캉, Hypocaust의 난방방식 간의 특징


 부엌 시설로 고구려는 철을 이용해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었는데 溫突과 관련 된 대표적인 유물로는 고분의 부장품으로 발견 된 운산 용호동 1호분 출토 철제 부뚜막<사

<사진 5> 서울 구의동보루 출토 철솥      <사진 6> 서울 구의동보루 출토 세발 솥

진 4>과 고구려 溫突 유적에서 발견되는 철솥<사진 5>과 세발 솥<사진 6>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철솥은 많은 例가 출토되어 남아있는데, 초기의 철솥은 바닥에 높은 굽이 달려 있는데 시대가 내려오면서 굽이 낮아지고 몸체가 납작한 형태로 변화한다.
 노(爐)와 부뚜막은 시대의 흐름과 생활의 변화에 따라 분리되어 사용되었던 것이 하나로 합쳐져서 溫突 고래의 발생을 가져오게 된다. 즉, 이 시대에는 난방과 취사를 겸한 외줄의 긴 고래를 두고 건물 안에 있는 아궁이에는 솥을 걸고 취사를 겸하였고, 한쪽 편으로는 고래가 연돌을 지나 굴뚝으로 연통을 뽑아내어 연기가 방밖으로 빠지게 설계하였다. 이런 경우 긴 구들이 “ㅡ”字로 놓이는 경우와 벽을 따라 “ㄱ”字로 꺾여 놓이는 경우가 있는데 “ㄱ”자로 꺾여 놓이는 경우는 좀 더 발전된 형식으로, 나중에 고구려 溫突로 발전시켜 사용한 우리나라의 초기적인 溫突 난방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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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字형 외줄 고래]                          [“ㄱ”字형 두 줄 고래]

(그림 14) 시간의 변화에 따른 溫突의 발전 형태
 溫突 아궁이의 특징을 살펴보면, 보통 긴 구들골의 직각 방향, 즉 옆쪽에서 불을 지피도록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어서 연기가 역방향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였고, 아궁이에는 대부분 가운데 받침돌을 놓아 솥이 안전하게 걸쳐지도록 하였다. 구들골의 모양은, 정방형에 가까운 상자형 터널로 되어 양측에 돌과 진흙으로 둑을 쌓아 측벽을 만들고 그 위에 판석 모양의 넓적한 덮개돌을 걸쳐놓고 진흙으로 덮었다. 溫突고래의 특징을 살펴보면, 東台子 유적에서는 건물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원시적인 화덕의 熱傳達 방법을 겸비한 시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中央을 중심으로 실내의 행위가 집중되면서 열 소모량을 최대한 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부분 벽을 따라 놓여 끝에서 방밖으로 빠지기 쉽게 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방법은 중심에 아궁이를 설치하므로 해서 動線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고 실의 공간 활용에 효율적이지 못한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室의 한편으로 아궁이와 구들시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형식은 삼국시대 초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구려시대 溫突의 평면은“ㅡ”字나“ㄱ”字의 형태로 난방부하가 많이 걸리는 곳에 부분적으로 도입되다가 점차 방 전체에 溫突 시설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溫突의 발전 형태를 그림으로 나타내었다.(그림 14)

Ⅴ. 溫突 난방의 효율성 
                                             
溫突構造가 발견되는 유적지는 대부분 주거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외부 기후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내부 환경을 쾌적하게 하기 위하여 그 구성 요소인 벽, 바닥, 지붕의 형태가 계획되어진다. 建築環境的인 측면에서 이러한 요소들의 기능은 기후를 조절하는 것이다. 특히 백제나 신라보다 가장 추운 지방에서 발생한 국가인 고구려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열과 빛을 조절하는 계획이 건물의 설계에 적용되어 있었고, 熱 感覺에 커다란 효과를 주는 태양의 복사열과 溫突에서 나오는 복사열을 생활하는데 사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진다.
 고구려 영역권에 있었던 지역은 대부분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나 산맥들이 오랜 시간 침식되어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어 大氣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만 국지적인 강수량의 분포에 영향을 주지만 우리나라의 겨울철은 추운 寒冷 건조한 북서계절풍이 영향을 주므로 겨울에는 추운 것이 특색이다. 이에 대한 난방의 필요성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온돌의 발생은 기온과 溫突의 발생 원인이 관계가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림 15) 지역별 월 평균기온(℃) (집안: ----, 평양: ―, 서울: ……)



  (그림 16) 우리나라 각 지역별 
          1월 평균기온 분포(℃)







 





(그림 17) 지역별 월 평균풍속(m/sec) (집안: ……, 평양:―­―­, 서울:―)











(그림 18) 지역별 월 상대습도(%) (집안: ……, 평양:―­― , 서울: ―)

 난방 시설인 溫突이 고구려에서 始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기후에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림 15), (그림 16), (그림 17), (그림 18)에 1883∼1992년까지 10년간의 기온과 풍속과 상대습도의 데이터를 중앙 기상 관상대에서 발행하는 "한국기후표"를 참조하여 나타내었다. 
 데이터의 활용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이면서 고구려 溫突 난방의 유적지가 발견되는 도성이 있던 중국의 集安과 平壤, 그리고 백제의 수도였고 고구려가 점령했던 한강 유역의 기온과 풍속 그리고 상대습도를 알아보았다. 난방이 요구되는 1월의 평균온도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도성이 있던 集安은 백제의 수도였던 漢山보다 약 -10.7℃ 정도 낮다. 난방이 요구되는 시점을 우리나라의 경우 외기 온도가 10℃ 전후하여 계산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10월 중순부터 4월말까지 약 5개월 정도는 난방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溫突과 같은 난방 시설의 개발은 국가의 유지에 중요한 요소였다고 사료된다. 또한 (그림 17)에서 나타난 것처럼 초기 고구려시대 유적인 東台子 유적이 있는 集安縣의 경우 평양이나 서울에 비해 겨울에 0.5m/sec 이상의 북서풍이 매우 강하게 부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高句麗時代 住居建築의 특색은 태양으로부터 傳導率이 낮은 지붕의 표피를 구성하여 여름 낮시간 동안 지붕을 통해 태양의 복사열이 실내에 전도되는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서 실내의 온도 상승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처마의 적절한 길이는 실내의 直射熱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였다. 한편 겨울에는 부엌을 설치하여 아궁이를 통하여 취사도 하고 방을 난방 시키도록 하였다. 이 당시의 난방 시설의 평면 구성을 보면 아궁이 하나에 溫突 하나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가 후대에는 아궁이 여러 개에 아궁이 고래를 여러 개 만들고 하나의 굴뚝으로 연기를 배출시킴으로서 熱이 구들 내에서 긴 시간동안 정체 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게 되었다. 溫突은 열의 傳導, 對流를 이용한 방법으로 고구려는 계절적 온도 변화를 최대한 고려한 과학적인 건축술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고구려 벽화나 발굴조사에서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다.
 고구려시대의 난방을 위한 구들은 초기 溫突의 형식이지만 열을 최대한 정체시키기 위하여 아궁이의 위치를 측면에 설치하고 구들을 "ㄱ"字로 불의 방향을 바꾸어 주었으며 굴뚝도 만들었다. 豫불을 때면 그 熱氣로 인해서 음식이 조리되며 고래에 구들을 만들어 적은 熱로서 뜨겁게 달구고 고래를 통해서 구들 전체에 熱이 전달되도록 하였다. 굴뚝 밑에는 굴뚝 개자리를 만들어 아궁이를 청소할 수 있는 시설도 만들었다. 실내에 목적하는 온도 습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기의 상태에 따라 냉각, 가열, 감습, 가습 등을 하는데 필요한 열량을 空氣調和라고하는데, 이 중에서 가열해야 할 부하를 난방부하(heating load)라고 한다. 난방부하를 계산하는 설계조건에는 외기온도 조건이 필요한데, 외기온도 조건은 지역마다 외기온도가 다르므로 서울의 경우는 -11.9℃, 부산은 -5.8℃를 난방 기준에 적용시킨다. 특히 난방실의 열부하 계산에는 비난방실의 온도계산법을 적용하는데 이는 난방의 부하 요인 중에 외벽의 조건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아차산 4보루의 평면도를 보면, 옆에 실이 연결되었을 경우는 반대편 벽에 온돌난방 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단독의 건물의 경우는 한쪽편(동편)의 벽을 따라 아궁이가 형성되다가 북쪽 벽을 돌아 서편에 가까운 지점의 아궁이 고래를 이용 굴뚝이 연결되어 외벽에서 생기는 부하를 최대한 줄이면서 실내 공간의 활용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시대의 溫突은 난방의 효율성을 최대한 고려한 난방 시설의 設備的인 우수성을 엿보이고 있다.
  溫突의 과학적인 기술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溫突과 유럽의 벽난로의 난방 효과를 알아보았다. 實驗方法은 열전대온도계(Cu/CC[구리/콘스탄탄]의 금속을 환상으로 연결한 것으로 접점간의 온도차에 의한 기전력을 이용)를 사용하여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의 온도와 굴뚝에서 나가는 열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연구에 의하면, 溫突의 아궁이는 열량의 30% 이상이 난방으로 전달되는 반면 유럽의 벽난로는 열량의 21% 의 熱만 실내에 전달된다는 것을 경상북도 안강의 양동마을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가 있다. 또한 실내 공기를 데우는 형식인 대류난방인 유럽의 벽난로는 실내의 오염 공기가 그대로 실내의 인체에 대류작용을 하므로 환경적인 면에 있어서도 좋지 않으나, 輻射에너지를 이용하는 溫突은 외부의 아궁이를 통하여 2차적인 熱이 공급되므로 畜熱面에서도 탁월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室內溫度의 쾌적을 논하는 면에서 중요한 것은 上下의 온도차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수평방향의 溫度差와 달라서 동시에 온도가 몸에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림 20). 난방방식에 따른 上下溫度분포

 따라서 溫突과 같은 복사난방과 다른 형식의 난방방식이 실내의 공기 온도 분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暖房方式에 따른 上·下 온도 분포를 그래프로 나타내었다(그림 20). 여기서 유럽의 벽난로는 a 에 표시되는 난방과 같이 대류식이므로 이 그림을 통해서도 우리와 같은 좌식생활과 풍토에는 高句麗式의 溫突이 효과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Ⅵ. 맺음말

 以上에서와 같이 문헌에 나와 있는 溫突에 관한 시료와 發掘調査에 의해 검출된 遺構의 事例를 살펴보면, 溫突 構造는 기원전 4세기경 압록강 유역 추운 지방의 움집시대에 발생하여 고구려의 건축에 사용되면서 점차 발달하였고, 특히 노남리나 대평리 유적지 例 等 한반도의 북부지역에서는 기원 前後의 난방 시설이 竪穴주거와 함께 부설되는 형식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遺構는 溫突이 직각으로 屈折되는 것이 住居 施設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형태가 계속해서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함께 한강 유역까지 전파되었음을  아차산의 제 4 보루 유적과 구의동 고구려시대 보루에서 확인하였다.
 고구려의 溫突의 기술을 습득한 백제와 신라에도 溫突의 난방 기술이 보급되었고, 통일신라가 형성되면서 점차로 남부지방의 주택내부로 溫突 構造가 확산, 수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시대는 부분적인 溫突 면적에서 방 전체에 구들골이 설치된 완전한 모습으로의 溫突 構造가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전북 익산의 彌勒寺址의 유적 중에 고려시대의 建物址로 밝혀진 것이 여러 동(棟)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제 10호 建物址는 명확한 구들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학술적으로 좋은 자료를 얻게 되었다. 遺構의 형상은 南北으로 길게 놓인 건물터 중앙에 주 칸이 남북 4.8m, 동서 4m 되는 방안의 구들이 밝혀진 것이다. 구들은 방안의 동남쪽에 있는 아궁이를 시발점으로 동벽을 따라 북으로 향하다가 북벽에서 서쪽으로 꺾여 서북쪽 귀퉁이에서 북으로 빠져 나갔는데, 대체적으로 두 줄 고래의“ㄱ”字 평면을 이루고 있어 앞서 설명한 고구려시대의 것과 거의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부분 溫突 시설이 어느 시기까지 이루어지다가 아궁이가 방밖으로 나가고 방 전체를 溫突로 만드는 완전한 모습의 온돌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면서 좌식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좌식 생활을 하게 되는 시기는 대체로 고려 중기 이후 12세기말이나 13세기 초부터로 추정된다. 그 實例가 1981년 발굴 조사된 경주군 감은사지의 후대 建物址에서 발견된 것이다. 또 하나는 1989년 전남 완도 법화사지에서 밝혀진 고려 시대의 구들이다. 이들은 다같이 아궁이를 방 밖에 하나를 두고 방 전체에 구들을 시설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溫突은 실제로 잘 남아있는 서원이나 향교, 사찰 그리고 일반 민가나 정자 등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때는 이미 방 밖에서 불을 때고 방안에는 전통의 장판지로 깨끗이 도배하여 좌식 생활을 즐기는 시대로 된다. 이때의 溫突은 안방에 달린 부엌칸의 부뚜막과 같이 취사를 겸한 시설도 있지만, 사랑방의 溫突과 같이 함실 아궁이에 군불을 때는 방도 있고 소죽을 끓이는 행랑방의 溫突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溫突의 효용은 난방과 취사를 함께 하는 부뚜막 아궁이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高麗時代 초기의 갱(坑)에서는 아궁이의 방향을 고래에 직각으로 놓아, 방안에 연기가 들지 않도록 고려한 듯 한데, 朝鮮時代의 구들에는 아궁이를 고래와 직선으로 설치한 대신 부넘기와 굴뚝의 개자리를 발전시킨 것이 특징이라 할 수도 있다. 부넘기에서 굴뚝이 있는 개자리까지는 약간씩 경사지게 되고, 경우에 따라 구들장을 놓을 때도 약간씩 경사지게 윗목이 높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불길이 고래에서 굴뚝으로 연결되기 전에 고래 바닥보다도 깊게 파여진 골이나 웅덩이를 놓아 연기나 화기를 일단 머무르게 한다. 이러한 개자리의 용도는 高句麗時代는 아궁이의 위치를 고래와 직각으로 위치하여 사용하였다. 이 개자리는 後代에 내려오면서 방고래와 직각으로 길게 시설하는 경우도 있고, 짧게 웅덩이만 두는 시설도 있어 기술자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구들을 놓을 수가 있다.
 朝鮮時代 溫突의 구축 방법은 여러 종류로 발전되어 아궁이와 굴뚝이 방의 반대편 중앙에 놓이는 줄 고래와 부채살 모양의 고래 等이 있고, 방 한 모퉁이에서 불을 지펴 반대 모퉁이로 나가는 맛선 고래, 아궁이의 左, 右側벽으로 굴뚝을 놓을 때나 아궁이와 같은 벽면에 굴뚝을 놓을 때 쓰는 꺾인 골 구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일반적인 고래와는 달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암 경내에 있는 승방의 아자방(亞字房)이나 전남 완도군 보길도의 세연정과 같이 건물 北東面 중앙기단 위에 아궁이를 두고, 툇마루 밑에는 날개와 같이 생긴“中”字형 고래를 施設하였는데, 이와 같이 특수기능을 갖는 溫突도 생겨나게 된다. 세연정은 17세기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 후 은거하기 위하여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피하여 들렀다가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머물게 된 곳이다.
 한편, 고구려 故址에 있는 東台子의 유적의 예나 定陵寺의 예는 4세기 말 이후의 유적으로 이것은 발해의 上京龍泉府 침전지의 예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아마도 이 시기에는 溫突시설의 계획이 정형화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文獻資料를 중심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시대 溫突은 일반적으로 평민이 사용한 暖房施設로 上流層이 사용한 것은 조선시대 후반이라는 학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東台子의 유적은 고구려 시대 귀족의 住居址이고,  定陵寺의 예도 高句麗시대의 왕족이나 귀족이 머물던 거처의 건물 혹은 僧侶들이 생활하는 建物로 사용했던 점으로 미루어 이 학설에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한편 渤海時代의 上京龍泉府에서는 宮殿의 주요 건물에 附設된 暖房 시설이 발견되므로서 고구려 시대는 귀족층에 연결되었다가 점차적으로 평민들도 사용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선시대 이후에 전지역으로 확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고유한 난방 시설인 溫突은 고구려시대부터 발전된 중요한 暖房 시설로 수 천년 전부터 조상들이 발전시켜 온 우리의 고유한 傳統 暖房 형식이고 우리 지형에 어울리는 매우 과학적인 시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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