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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09 19:05
新羅 古墳의 高句麗的 要素(18차 학술발표)_김창호
 글쓴이 : 관리자 (202.♡.113.28)
조회 : 13,656  
   신라고분의_고구려적_요소.hwp (42.7K) [82] DATE : 2008-09-09 19:05:27
新羅 古墳의 高句麗的 要素
-皇南大  南墳 출토 銀製冠의 圖像解釋과 그 系譜-
                            金昌鎬(慶州大學校 文化財學部 敎授)
               

1. 머리말
신라고분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로먼그래스 등 실크로드를 거쳐 수입된 유물도 있으며, 고구려의 유물도 있다. 그래서 이른바 북방 기마 민족의 이동에 의해 신라의 적석목곽묘가 조성되었다는 극단적인 가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신라의 고분에 있어서 고구려의 요소로는 귀걸이, 부경형 토기, 백화수나 백화수피로 만든 각종 목제 유물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신라 고분속의 고구려제 유물은 서봉총에서 출토된 451년 제작된 은제합, 호우총에서 나온 475년에 제작된 호우가 있다. 이들 두 문자 자료들은 신라의 고분에 고구려제 유물이 많았음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적석목곽묘의 적석도 고구려의 영향으로 보고 있으며, 신라 금석문의 인명표기 방식 가운데 가장 유행한 적성비식 인명 표기 방식도 중원 고구려비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는 현재까지 발굴된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의 남분에서 출토된 은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황남대총의 개요를 살펴보겠으며, 다음으로 요녕성 일대에서 출토된 은제관과 유사한 고분들을 소개하겠으며, 마지막으로 은제관의 도상해석과 계보에 대한 소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유적 개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황남대총은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경주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분 가운데 최대의 봉토분으로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는 동서 직경 80m, 남북길이 120m였으며, 높이는 남분이 22.2m, 북분이 23m였다. 이는 이른바 표형분인 부부묘로서 남분에는 남자, 북분에는 여자가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은제관이 출토된 남분만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묘곽과 적석부는 완전히 지상에 설치된 것이었는데, 적석부는 먼저 서까래로 거대한 골격의 틀을 짜고 거기에 맞추어 냇돌을 쌓아 축조한 것이다. 적석부 바로 위의 봉토중에서도 수직 혹은 경사진 기둥 구멍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나 그 구조는 알 수가 없었고, 적석부 위에도 어떤 형태의 목조가구물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표면을 점토로 덮은 적석부 내에는 주곽이 동쪽, 부곽이 서쪽에 설치되었는데, 주곽은 장축을 동서로, 대형의 부곽은 남북으로 두어 T자형 배치를 이루었다. 주곽은 원지반을 0.45m정도 파고 냇돌과 자갈을 깔아 곽 바닥을 구축하였는데, 자갈 상면은 전면에 판칠되어 있었다. 목곽은 내외 2중목곽으로 설치되었는데, 내외각 사이에는 내각의 천정 높이까지 잔자갈로 채워져 있었다. 내곽 중앙에는 2중 목관이 놓였는데, 외관의 동쪽 부분은 부장품 수장부로 사용되었고, 서쪽에는 다시 피장자를 안치한 내관을 놓았다. 외관과 내곽벽 사이는 잔자갈로 쌓은 석단으로 되어 있었다. 목관안의 피장자는 두향을 동쪽으로 둔 유골 일부가 남아있어 60세 전후의 남자로 밝혀졌다. 그 밖에 내곽안에서 20대의 여자 유골 일부가 더 수집되어 한 묘곽안에 매장된 순장으로 판단되었다.
목곽부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외곽 : 길이 6.5m, 너비 4.1m, 높이 3.5m
내곽 : 길이 4.7m, 너비 2.3m, 높이 1.8m
외관 : 길이 3.6m, 너비 1.0m, 높이 0.8m
내관 : 길이 2.2m, 너비 0.7m
주곽쪽의 적석부는 단칠된 냇돌이 많았는데, 특히 목곽벽 가까이의 냇돌은 모두 단칠되어 있었다. 부곽은 주곽과 3m두께의 석벽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설치되었는데, 남북 길이 5.2m, 동서 너비 3.8m, 높이 약 1.3m였다.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고 바로 지반에 유물을 놓았는데, 중앙에 4개의 기둥 구멍이 있어 천정을 받혔던 기둥으로 추정된다. 남분의 봉분 바깥 주위에 높이 3.3m, 저면 너비 2.1m의 외초석을 직경 약 0.8m로 축조하였고, 자갈과 山土를 內向傾斜로 쌓아올린 봉토표면에는 점토를 0.45m 두께로 덮어서 봉토표면이 점토층을 이루고 있었다.
유물은 봉토 정상부에서부터 출토되었는데, 정상부 봉토의 점토층 속에 의도적으로 매장된 마구류 위주의 일괄 유물이 있었고, 봉토 중단쯤 높이의 봉토 표면 점토층 속에서도 내부에 소형토기와 어골, 패각 등이 담긴 대형호가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다. 적석부 내에서는 묘곽 내부에 부장된 고배에서 떼어낸 臺足片이 여러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었으며, 주부곽의 목곽 상부에서는 이식 등 장식구류와 마구류, 토기, 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주곽의 내부중 내관에서는 피장자가 착장한 각종 장신구가, 외관의 부장품 수장부에서는 귀금속용기와 칠기, 유리용기, 은제관, 금제관식,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고, 목관 둘레의 석단 상면에도 마구류 등 많은 유물이 놓여 있었다. 부곽 내에서는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금동장 안교 등 마구류와 철기, 토기가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3. 동북아의 비슷한 예
① 朝陽 王子墳山 토광묘〈圖1〉
1970년대 이래 朝陽 十二台鄕 袁台子村 王子墳山 일대에서 비교적 많은 숫자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14기가 1987년에 발굴조사되었고, 21기가 1990년에 발굴되었다. 이들 중 曹魏晋 시기에 속하는 무덤은 21기로서 평면 장방형의 1기를 제외하고 前大後小의 목관을 안치한 평면 사다리꼴의 수혈토광묘이다. 때로는 묘광의 앞벽에 토기와 소뼈 등을 안치한 龕室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무덤 안에서는 구연부의 일부가 의도적으로 훼손된 灰色壺形토기와 갈색 罐形토기 등과 함께 鐵鏃, 鐵刀, 甲片, 棺釘, 五銖錢, 銅帶鉤 등이 발견되며, 일부 무덤에서는 金步搖冠飾, 金耳環, 金牌飾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 무덤들은 전체적인 특징으로 보아 內蒙古 札 諾 , 赤峰 南楊家營子 등지의 선비 초기의 무덤보다 발전한 것으로 보이며, 요서 지역의 4-5세기 三燕文化로 계승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무덤들은 3세기초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이 지역에 정착한 東部鮮卑 慕容部의 유적으로서 前燕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 시기인 3세기말에서 4세기초의 유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② 朝陽 田草溝 석곽묘〈圖2〉
田草溝 석곽묘는 朝陽縣 西營子鄕 仇家店村 田草溝에서 1989년에 조사되었는데, 1호묘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2호묘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1호묘는 묘곽의 크기가 길이 4.5cm, 너비 1.1-1.5m, 깊이 1.6-1.8m인 동서방향의 횡구식석곽묘로서, 북벽의 서쪽에 작은 감실을 설치하였고, 묘실의 서벽 입구를 두 매의 석판으로 봉하였다. 출토 유물로는 보요관, 금편식, 금제 단추 장식, 장신구 등 다량의 금제품과 은제 장신구, 토기 등과 철제 관정, 관환 및 소뼈 등이 있다.
2호묘는 1호묘의 남쪽으로 약 6m 떨어져 있는, 동서 방향인 평면 사다리꼴의 수혈식석곽묘인데, 묘곽의 크기는 길이 3.76-3.95m, 너비 0.95-1.2m, 길이 1.32m로서 그 내부에 頭寬足狹 형태의 목관이 안치되어 있다. 이 무덤에서는 金步搖冠飾, 金牌飾, 금제 단추 장식, 금동장신구 등과 토기 등의 부장품이 발견되었으며, 철제 棺釘, 棺環이 순장된 소뼈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들 무덤은 그 규모와 구조에서는 조금의 차이가 발견되지만 무덤의 방향, 목관의 형태, 동물 순장, 출토 유물의 종류와 수량 등에서 매우 유사하여 같은 시기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그 연대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전엽으로 보고 있다.

③ 北燕 北栗 馮素弗墓 및 그 부인 墓〈圖3〉
이 2기의 무덤은 1965년 遼寧省 北栗縣 西官營子에서 발견되었는데, 1호묘에서 출토된 4점의 印章내용으로 인해 역사 기록에 나오는 北燕王 馮跋의 동생인 馮素弗과 그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馮素弗 무덤의 구조를 보면 수혈식석곽묘인데, 묘광의 크기는 위가 넓고 바닥이 좁아서 길이 6.25-8.1m, 너비 3.4-5.26m, 깊이 3.8m이며, 서벽쪽에 감실을 만들어 그 안에 황녹유토기 1점, 회색토기 1점과 소 갈비 및 다리뼈 등을 놓았다. 묘광의 상면에는 길이 10m, 너비 6m, 높이 2m 가량의 봉토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광의 중앙에 회백색 사암을 사용하여 장방형의 석곽을 조성하였는데, 장방형 판석을 평적하여 4벽을 쌓고, 그 위에 9매의 장판석을 걸쳐 놓아 뚜껑을 형성하였다. 바닥에는 판석을 세 줄로 깔았다. 석곽의 내부 크기는 길이 4.25m, 너비 1.34-1.53m, 높이 1.7-1.75m이며, 두께는 0.4m, 방향은 대체로 동서향이다. 석곽의 내부 벽과 천장에는 석회를 한 층 바른 후 그림을 그렸는데, 뚜껑돌의 경우 동쪽 4매까지를 먼저 덮고 회칠과 그림을 그린 후, 남은 뚜껑돌 5매는 미리 그림을 그린 후 하나씩 덮어나갔다. 내부 벽화는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석곽의 내부 천장에는 日月星雲圖가 그려져 있고, 벽에는 인물도와 동물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석곽 안에는 그 중앙에 前大後小 前高後低 형태의 목곽을 놓았는데, 그 복원된 크기는 길이 2.1m, 앞부분 너비 0.9m, 높이 1.1m, 뒷부분 너비 0.6m, 높이 0.65m, 두께 0.1m이다. 두향은 서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관의 뚜껑와 바닥은 유실되었으나, 옆판과 앞판은 각각 7매의 목재를 요철 장부법으로 연결하였으며 뒷판은 1매로 만들었다. 목관의 바깥에는 홍칠을 하였으며, 그 위에 建築, 人物, 羽人, 雲文 등이 그려져 있다. 또한 양측에 각각 2개씩의 도금한 관환이 달려있어서 관을 이동할 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馮素弗의 무덤에서는 모두 47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먼저 토기로는 황녹유토기 1점, 대형 罐形토기 1점, 壺形토기 21점,  罐形토기 17점 등이 있다. 청동 용기는 모두 27점이 출토되었는데, 釜 3점, 甑 1점, 盆 1점, 提梁鍋 3점, 提梁蓋鍋 3점, 提梁罐 1점, 洗 2점,  斗 2점, 長方盒 2점, 嵌骨長方盒 1점, 碗 1점, 魁 1점, 尊 1점, 虎子 1점, 小虎子 1점, 圓案 1점, 金銅鉢 1점, 金銅盞 1점, 金銅盤 1점, 金銅提梁小壺 1점, 殘器 2점 등이 있다. 옥기로는 玉盞 1점이 출토되었고, 유리 그릇으로는 碗, 杯, 鴨形注, 鉢, 殘器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철제 공구로는 도끼 3점, 삽 2점, 끌 1점, 톱 2점, 片狀刃器 1점 등이 출토되었다.
馮素弗의 무덤에서 가장 풍부한 종류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갑주, 마구, 무구 등으로 모두 23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철검 1점, 철도 14점, 철모 1점, 鳴鏑 8점, 철촉 130여점, 철갑편 다수, 馬  1쌍 2점, 馬銜 2점 등이 있다. 그밖에 金銅 首銅杆頭 6점, 金銅杆足銅護件 3점, 鐵旗座 2점, 鐵四通管 4점, 鐵弓踞 2점 등의 儀仗車 17점이 출토되었고, 石硯 2점, 墨 2점 등의 문구도 출토되었다.
복식과 관련된 유물도 90여 점 출토되었는데, 金冠飾 1점, 人物紋山形金飾 1점, 人物文山形金飾 1점, 鏤孔山形金飾 2점, 喇叭管形金器 2점 등 금제장신구가 20여점 발견되었고, 그밖에 은제 및 동제 장신구와 수정, 호박, 유리구슬 등과 鐵鏡,  斗 등의 여러 종류 유물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과 관련되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물로는 4점의 印章이 있는데, 金印인 范陽公章과 金銅印인 車騎大將軍章, 大司馬章, 遼西公章 등이 있다.《晋書》券 125, 馮跋載記에 기록된 그 동생 馮素弗의 이력을 보면, 范陽公, 侍中, 車騎大將軍, 錄尙書事, 大司馬, 遼西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곳에서 나온 印章 4점을 통해서 본 무덤이 415년경에 사망한 馮素弗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馮素弗 부인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2호묘는 그 구조가 1호묘와 비슷하며, 하나의 봉분아래 조성되었다. 묘광의 크기를 보면 길이 6.7m, 너비 3.5m, 깊이 4m이며, 따로 감실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석곽의 석재는 1호묘와 같고, 그 내부 크기는 길이 4m, 너비 1.3-1.7m, 높이 1.7m이며, 동서 방향에서 북쪽으로 25도 가량 틀어진 장축 방향을 보인다. 석곽의 내부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천장에는 星象圖를 그렸고, 4벽에는 人物, 出行, 家居, 建築物 등의 내용이 전체의 약 20%정도 남아 있다. 2호묘 석곽의 형태와 구조, 회벽과 벽화 등의 존재는 1호묘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무덤의 원상이 파괴되었다. 2호묘에서는 젊은 여성의 시신과 함께 두 마리분의 개 뼈가 발견되었다. 2호묘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15점, 漆盒 1점,  首銅杆頭 4점, 鐵四通管 4점, 骨  2점, 金飾片 2점, 銅 斗 1점 등이 있다.
이 밖에도 1998년에 南京 東郊에서 六朝 家族 무덤을 발굴하였는데, 東晋의 侍中, 建昌伯, 慶陵人 高崧의 가족 무덤 3기가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蟬紋金牌가 출토되었는데 頂部는 뾰족하게 되어 있으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으며 정면에도 풍만하게 蟬文을 새겼으며, 蟬身 및 주위가 鋸齒文으로 되어 있는, 주변 테두리에는 세밀한 金珠를 땜질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貂蟬冠 위의 黃金 이다. 또, 南京 大學 北園의 東晋墓, 甘肅 敦煌 新店台 前  升平十三年(369년)의 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

4. 銀製冠의 도상 해석과 그 계보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황남대총의 남분에서 출토된 은제관은 풍소불의 관과 그 모습이 같고, 천마총의 조익형 관식과도 그 모습이 같다. (<圖3>의3)에서 보다시피 a→b→c 의 순서로 변화했음이 분명하고, 남분의 연대가 415년을 소급하지 못함을 나타내주고 있다. 남분의 은제관의 조형이 되는 풍소불의 관에는 3존불(<圖3>의2 및 <圖3>의3 의 a)이 새겨져 있어서 남분의 피장자가 불교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는 정도가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최근에 풍소불의 관이 매미와 관련이 되며 이를 貂蟬冠으로 해석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특히 풍소불의 또 다른 5각형의 관에서는 매미의 눈을 玉으로 표시하고 있다(<圖3>의1). 그러면 중국에 있어서 매미에 대해 잠시 살펴 보기로 하자.
중국에 있어서 매미는 한대에 출현하고 있으며 이는 《漢書》에 신분을 표시하고 있으며, 《南史》, 梁武帝 諸子傳에「冠太子于太極殿 舊制太子著遠游冠 金蟬翠 纓 至是詔金博山」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매미가 출토되는 예로는 요녕 북표 방신론 고분, 요녕 조양 왕자 분산 고분, 요녕 조양 전초구 고분, 요녕 풍소불묘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 고분은 모두가 선비족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의 문화의 계보는 대개 漢(中國)→東胡ㆍ吳桓→鮮卑ㆍ夫餘→ 高句麗→新羅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과 선비족의 5각형관식이 매미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남분의 은제관도 이와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 밖에 천마총 등에서 출토되는 금제, 금동제, 은제등의 조익형 관식도 결국 신분제를 표시하는 것으로 중국→東胡ㆍ吳桓→鮮卑ㆍ부여→고구려 등을 통해 신라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위의 계보 가운데 선비까지는 잘 연결이 되나 어떻게 고구려가 들어가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마구류등의 경우에 대개 선비→3燕→고구려→백제ㆍ가야ㆍ신라의 계보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 은제관과 고구려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현재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남분의 은제관과 유사한 예는 고구려에서는 출토된 바가 없다. 앞으로 고구려 고분의 발굴조사에서는 그러한 예가 출토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면 남분의 은제관에서는 고구려적인 요소가 있는지 여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러한 남분 은제관의 양쪽에 서 있는 은판을 가위로 잘라서 꼬이게 만든 기법은 고구려 고분과 신라 관에서 보이는데 대개 그 기원은 고구려에 두고 있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의 〈圖4〉와 같다.
따라서 신라 황남대총 남분의 은제관은 그 기원을 중국의 한대에 매미형 장식에 있고, 이들이 동호ㆍ오환을 거쳐서 선비 부여에 전해졌고, 풍소불묘를 전후하여 三燕에서 고구려를 거쳐 백제ㆍ신라ㆍ가야에 전파된 것으로 이해된다.

5. 맺음말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를 간단히 요약하여 맺음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황남대총의 남분 출토의 은제관을 검토키 위해 황남대총의 개요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요녕성 일대에 출토된 관 가운데 황남대총 남분과 유사한 조양 왕자분산 토광묘, 조양 전초구 석곽묘, 북연 풍소불 부부묘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그 다음으로 남분 은제관의 도상은 중국의 한대 매미에서 유래되며, 이러한 예들은 천마총을 비롯한 신라의 고분군에서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고구려에서는 그러한 예가 없고, 금동판을 가위로 잘라서 만드는 이른바 羽毛形冠(飾)은 고구려와 신라고분에서 집중적으로 보이고 있어서 그 계보를 중국 한→동호ㆍ오환→선비ㆍ부여→3연→고구려→백제ㆍ신라ㆍ가야로 설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