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는 지난해 6월말부터 25일간 광개토태왕 서북 정복로를 따 라 탐사를 벌인 결과를 연재한다. 이 탐사에는 필자와 고구려연구회 학술자 문위원 서영수(단국대 교수), 조선일보 2명, KBS 역사스페셜팀 2명 등 6명 이 함께 하였다. 그 결과 [주간조선]에 3회 연재되고, KBS 역사스페셜 2000년 새 밀레니엄 특집 [대고구려]에서 1월 1일과 1월 8일 두 차례 방영 되었다.

 

1999년 7월 6일(화), 심양 출발. 오늘은 태자하, 요양, 안산을 거쳐 요하(遼河)를 건너는 날이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인가. 10년 남짓 요하 동쪽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필자가 요하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 동안 요하를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기획한 [광개토태왕 서북 정복로]를 따라 본격적인 탐사에 나서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고구려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대체 고구려의 영향이 정확하게 어디까지 미쳤는가 제대로 검증한 적이 없다. 우리는 자주 고구려 영토를 가장 멀 리 넓힌 영웅으로 광개토태왕을 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은 어디까지 쳐들어간 것일까? 이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는 채 남아있다. 이번 탐사는 바로 이런 중요 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대장정이다.

 

광개토태왕비에 새겨진 비밀

이 이야기의 시작은 광개토태왕비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상당부분 태왕께서 주위 국가를 정복한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서북 쪽에 있는 거란에 대한 정복이다.

 

영락 5년(서기 395년),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稗麗)가 △△△하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 언덕에 이르러 세 부 6,7백 영(營)을 쳐부수고 소·말·양떼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414년, 지금으로부터 1600년쯤 이전에 쓰인 이 문장에는 많은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① 첫째, 패려(稗麗)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② 두 번째, 패려로 가는 루트이다. 부산과 부산, 두 개의 산을 넘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은 어떤 산인가?

③ 세 번째, 세 부락과 600∼700개의 영(營)을 쳐부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말·양 떼들을 얻어온 최대의 전적지 염수(鹽水)는 어디인가?

 

이번 대탐사에서는 이런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풀어야하는 큰 숙제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 이기 때문에 기대가 큰 반면 그만큼 어깨도 무겁다.



동서요하가 만나는
지점에
새로운 경계표시

몇 년간 관계 논문과 지도를 수집해 검 토하고 예비답사를 하는등 준비를 했지만 과연 광개토태왕의 정복로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 을런지! 광개토태왕이 395년 패려를 칠 때 요하 이동쪽은 이미 고구려 땅이었기 때문에 광개토태 왕의 서북 정복로를 정확히 밝히려면 우선 심양을 출발하여 요하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염수에 대해서는 학계의 시각이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첫째는 요하가 염수라는 주장인데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심양을 떠나서 요하까지는 산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요하를 넘어서 만나는 두 산을 찾아야 한다. 심지어 어떤 중국 학자는 염수가 염난 수와 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압록강이라는 웃지못할 주장도 있다.

 

요하평원의 젖줄 요하

어찌 되었든 오늘의 첫 목표는 요하를 건너는 일이다. 요하는 두 번을 건넜다. 한 번은 심 양 서북쪽 신민으로 건너가는 길이고, 한 번은 안산으로 내려와 태안(台安)쪽으로 건너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은 어떤 길을 건넜을까. 그것은 출발지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 다. 만일 신성을 떠났다면 신민쪽으로 건넜을 것이요, 요동성에서 출발하였다면 태안쪽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오후 3시 10분 고타진(高 鎭)을 지나 3시 50분 요하를 건너는 장황지대교(張荒地大橋, 台 安縣 大張)에 다다랐다. 대교의 풍경은 한가롭다. 내려 쏘는 듯한 태양이지만 강가라서 그런 지 산들산들 미풍이 불어 그늘은 시원한 맛이 있다. [요하] 단군조선 이후 우리 민족과 이민족간의 끊임없는 애환이 닮긴 요하다. 사서에는 요수(遼 水) 라고 하는데 구려하(句驪河), 구류하(枸柳河), 거류하(巨流河)라고 했다. 현재 심양을 지 나는 혼하(渾河)와 구별하기 위해 요하는 대요수(大遼水)라 하고, 渾河(혼하)는 소요수(小遼 水)라고 구분하여 쓰기도 했다. 전장 약 1400㎞. 원류는 서요하와 동요하로 나뉘는데 서요하가 동요하보다 길다. 서요하는 대흥안령산맥 남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길림성과 요령성 경계 부근에서 노합하 (라오하강, 老哈河)를 합치는데, 그 때까지는 시라무룬강(西拉木倫河)이라 불린다.

요하부근 충적평야를 가로 지른 루지아 요하대교
사라무룬강과 노합하가 만나는 지점

 

요하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1999년 6월 30일, 실링호터를 떠난 거란의 본거지인 임동으로 가는 도중 요하의 근원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실링호터를 지난지 1시간. 높은 산지들이 다시 출현한다. 대흥안령에 가 까이 가고 있는 것. 조금 있으면 서요하의 원류이자 대흥안령의 최고봉인 황강량을 찾아간 다. 황강량은 이름부터가 무슨 시렁이나 대들보같은 인상을 준다. 거의 사막화돼가고 있는 지역인데 군데군데 이를 막기위한 방풍림이 보인다. 오후 3시35분 실링호터를 떠난 지 7시간만에 커서커등시(克什克騰, 혹은 經棚)에 도착하였 다. 요하의 첫도시이다. 여기서 대흥안령의 최고봉 황강령으로 가는 길이다. 오후 4시10분 이도영자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계속 황강량을 향해 좁은 시골길을 올라간다. 말로 밭을 가는 농부, 산자락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산등성이와 밀밭 근 처엔 양들도 보인다. 그러나 산은 아직 면도한 듯하고 성긴 풀들만 자라 초원과 같은 풍경 이다. 초원과 농경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길을 따라 거꾸로 서요하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물줄기는 점점 가늘어진다. 오후 4시45분 드디어 황강량을 눈앞에 둔 전진(前進)10대 마을. 대들보 같은 산이 멀리 보인다. 탐사단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였다. 본격적인 수원지 탐사가 목적이 아닌데다 더 이상 마을이나 찻길 이 없기 때문에 위험 부담도 있기 때문에 멀리서나마 황강량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泌柳河라는 이 작은 실개천에서 출발한 물이 시라무룬 - 서요하 - 요하를 거쳐 발해 로 들어가는 1400㎞ 요하를 이루는 것이다. 동요하의 시원지는 이름도 요원(遼源), 요하의 발원지라는 뜻이다. 길림성 요원시 동쪽 경 계에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산맥이 뻗어있는데 이 산맥에서 동으로 흐르면 송화강 원류가 되고, 서쪽으로 흐르면 동요하가 된다. 요원시의 동요하 부근에는 고구려 성이 3개나 있어 동요하가 고구려의 서북 진출의 중요한 기지노릇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원에서 시 작한 동요하는 북쪽으로 흘러 고구려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공주령을 서쪽으로 흘러 다시 서 남으로 흐르는 타원형을 그리면서 서요하와 만나는 합수지점에 도달한다. 탐사단은 시라무룬과 서요하를 몇 번이나 건너며 따라 내려오다가 7월 3일 오후 2시35분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지 않아 초라하게 강바닥을 드러낸 합류지점의 서요하쪽은 자전거를 들고 강을 건널 정도로 물이 얕다. 물 자체는 동요하 쪽이 더 풍부해 보였다. 이렇게 동서 요하가 합쳐져 요하라고 부르는데 전국시대 이후부터 등장하는 역사의 강이 다. 우리 민족사도 이 합수지점으로 시작되는 요하에서 발원한다. 이 요하의 쟁탈을 위해 얼 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우리는 이를 列水라고 했다. 한강과 비교하며 요하는 그보다 몇 배 크리라고 상상했는데 뜻밖에 수량이 작고 규모가 작아 어리둥절했다. 노을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魯家遼河大橋(95년10월 시공)를 건너 심양으로 들어왔다.

 

요하의 석양
광개토대왕 서북정복로 대탐사 대원들

요하가 만든 평원, 요택(遼澤)

요하 하구부인 요동만 연안 일대는 표고 2∼5m에 불과하여 개척이 진척되기 전에는 낮은 습지를 이루었다. 고대에는 충적평야인 요동벌을 요택(遼澤)이라고 해서 고구려 말에는 수· 당과 싸울 때 고구려 최전방의 목이었다. 645년(보장왕 4년) 당 태종이 침임했을 때의 상황을 보면 요하유역, 즉 늪지대인 요택의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5월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이 200여 리나 되어 사람 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 으므로, 군대가 머무르지 않고 요택의 동쪽으로 건너왔다. 도망갈 때는 더욱 힘이 들었다. 당 태종이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요하의원류에는 아직도 몽골인들이

옛모습으로 살고 있다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라는 장수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 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 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 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옥토로 변한 요동벌

상류부에서 다량의 토사가 유출되어 하구부 요동만에 광대한 델타를 형성하지만 자주 홍 수가 나서 사람들이 살기에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치수공사가 이루어 지고 대규모 방풍림이 조성되어 반산(盤山), 금현(錦縣) 부근의 범람원은 광대한 농경지로 개간되고 있다. 요하는 이제 상습 범람지가 아니라 농업생산지로 바뀌었다. 강바닥은 끝없이 펼쳐진 옥수 수밭으로 변했고, 둑 아래는 벼논도 있다. 그것은 강 양쪽에 두 겹으로 쌓은 둑 때문이다. 둑 위에 [둑을 보호하고, 나무를 보호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다(護提護林人人有責)]고 쓴 광고판이 그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홍수를 막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는 남쪽을 바 라보고 두 손을 모은 꼴을 한 [요하치수기념탑]이 대신 말해 준다.



서요하의 원류
(전진10대)마을

대략 1991년 6월 낙성한 이 비는 "요하는 중국 7대 강 가운데 하나로 그 하류가 요령성 가운데를 관통하는데 1985년 요하에서 발생한 대규모 홍수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국가 는 "요하를 다스리지 못하면 요령성을 편안하게 지킬 수 없다"고 보고 1986년부터 4개 시에 서 참여해 1000km의 제방을 쌓고 12만 무(畝)의 보호림을 조성하는 작업을 했다]는 내용이 다.

 

- 계속 -

[1] [2] [3]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7 흥륜빌라 B-2 TEL: 02-337-1661,2 FAX:02-337-1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