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독은 고구려 성이다.

1999년 7월 6일, 요하 건너 첫 답사지역은 대안현(臺安縣) 신개하향(新開河鄕)에 있는 손성자성(孫城子城)이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손성자성이 한 나라 험독(險瀆)이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험독은 요동성에서 의무려산으로 가는 일직선상에 놓인 성으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제일 먼저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을 곳이다.
우리가 험독을 찾은 것은 광개토태왕이 서북으로 진군하면서 격파한 한나라 성을 답사한다는 것 빼놓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험독은 옛 조선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에 나온 험독의 주에 보면 험독은 [조선 왕 만(滿)의 도읍지다. 험한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험독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험독이 옛날 조선의 서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답사는 우리의 옛 조선이 요동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이 망한 몇 백년 뒤 고구려가 다시 이곳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고구려사 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복원한다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5시 30분 드디어 손성자에 도착하였다. 상당히 자세한 지도에도 손성자라는 지명이 나와있지 않아 못 찾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올해 나이 60이 된다는 노인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많은 얘기를 해 준다.
"동성, 서성, 남성, 북성이 있고, 남성이 주된 성이다."
"성 동쪽에 마르지 않는 강이 흐르고, 동남 모서리에서 휘어 남벽을 따라 흐른다."
성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돌아 흐르는 강이 바로 요하이고 서남쪽으로는 유하(柳河)가 흐른다. 험독의 독(瀆)이란 '도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험독이란 '험한 강'을 끼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자주 범람하는 요하와 유하 사이에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던 것이다. 4200㎡이면 큰 성은 아니지만 요하에서 가장 가까운 요새라는 점 때문에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험독은 단군조선의 수도였다

"무덤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모두 밀어버렸다."
"옥수수밭 안에 불룩 솟아오른 보루 흔적만 남아있다"
고 했으나 분간할 수가 없었고, 표지판은 옥수수밭 모서리에 쓰러져 있어 수 천년 역사의 현장이 불과 수 십년만에 속수무책으로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 성을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부르느냐?"는 질문에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부른다"는 대답에 귀가 번쩍 뜨이었다.
그렇다. 단군조선 이후 한 때 한나라가 이곳을 차지했지만 그 뒤 오랫동안 고구려가 다시 이곳을 점령했던 사실을 우리는 왜 그 동안 속 편하게 잊고 있었던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를 현지 중국인들이 일깨워 주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곳에서 벌어졌고, 사대주의 사관에 물들어 훌륭한 선조들의 역사를 잊고 살았던 필자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통한의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단군조선 역사의 복원"
"고구려 역사의 복원"
우리의 임무를 일깨워 주는 선조들의 준엄한 꾸짖음을 마음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화살촉, 도끼, 토기 같은 유물이 많이 나왔다."
"해마다 한번씩 사람이 와서 토기조각 같은 것을 가져간다"
우리도 열심히 찾아보니 상당한 토기와 기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고구려 기와조각과 같은 것도 발견되었다. 만일 깊이 발굴한다면 단군조선의 유물도 나올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요동 서쪽의 행정 중심지 무려(无慮)


7월 7일, 오늘은 무려(无慮)라는 성을 찾는 날이다. 만일 고구려가 요하를 넘어 험독을 점령을 했다면 다음 목표는 바로 무려(无慮)라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려는 전한(前漢) 때 요동군의 서부도위(西部都尉)로서 당시 이 지역 행정관의 치소가 있던 행정 중심지였던 곳이다. 무려성은 요동지방의 명산인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비롯된 이름이기 때문에 의무려산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중국 학자들이 연구하는 바에 따르면 무려는 북진현(北進縣) 동남쪽 5㎞쯤 되는 료둔향(廖屯鄕) 대량갑촌(大亮甲村)에 있다고 한다.

  의무려산 입구

(위) 의무려산 안내판
(아래) 손성자성 경계표시


7시 50분 숙소를 출발하여 북녕시(北寧市)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다 30분만에 요둔향을 지나고, 8시20분 대량갑촌에 다다랐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대량갑촌은 500 세대 3천명 정도가 사는 제법 큰 마을이라 시골답지 않게 택시나 오토바이도 왔다갔다한다. 마침 73세라는 시골 할머니한테 이곳에 옛날 성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여기서 태어났어. 동네 뒤에 토대가 있는데 예전에는 컸는데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어. 둘레에 가시나무가 많다. 회색의 벽돌과 기와가 많이 나왔다. 지금도 있다."
토대라는 것은 돈대(墩臺) 즉 흙을 높이 쌓아 멀리 볼 수 있도록 만든 망대를 말한다. 마을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뒤로 가니 멀리서도 망대가 바라보인다.
약 15만평 정도 되는 무려성 옛터는 현재 문화재보호구역(문물보호단위)으로 되어 있으나 여러 사람이 그 땅을 나눠서 농사를 짓고 있어 돈대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렸다. 돈대는 육안으로 보아 높이 10∼15m, 너비는 남북 40m, 동서 32m 쯤 되는데 할머니 말대로 가시나무가 많아 오르는데 애를 먹었다. 나팔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꼭대기에서 주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돈대는 예전에 당 태종이 고구려 치러 요하를 건널 때 이곳에서 비를 피했다는 소문이 있고, 무덤 같기도 하고 봉화대라고도 하는데 발굴을 해보기 전에는 전모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돈대를 보고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군복을 입은 인민해방군 5명이 돈대 위로 올라왔다. 우리는 바짝 긴장을 하고 여러 가지 비상조치를 취했다. 알고 보니 바로 의무려산에 주둔하는 군부대에서 주변 농촌에 농사일 지원 나온 군인들인데 사람들이 몰려있으니 구경하러 왔던 것이다. 담배를 나누어주며 의무려산 이야기를 꺼냈더니 잘 알고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서북쪽에는 성벽이 남아 있어 판축한 흔적이 분명한데 둘레가 7∼8km로 상당히 큰 성이었다. 나오면서 뒤돌아 나오면서 보니 돈대는 사방 1백50m 전후의 높은 지형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채소를 심은 밭을 조사해 보니 기와조각이나 토기 조각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터인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 이전, 서한 때의 붉은 토기들이 나오고 고구려 때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과 요나라 때의 기와조각들도 나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여러 시대에 걸쳐 요충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하평원을 가로막는 의무려산

전 10시15분 출발, 불과 20분 뒤 우리는 북녕(北寧)에 다다랐다. 이곳 북녕은 나중에 다시 들르기로 하고 우선 의무려산으로 가기로 했다. 북녕에서 불과 10분 남짓 가니 멀리 의무려산이 산세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잔뜩 흐린 날씨 속에 장대한 바위산이 아스라이 나타난 것이다.
요하 동쪽 천산산맥 아래 있는 요동성을 떠나 서쪽으로 평야를 달리다 요하를 건너면 또다시 낮은 산 하나도 없는 넓은 요하평야(遼澤)이 이어진다. 이처럼 평지만 계속 되다가 갑자기 앞을 콱 가로막는 산이 바로 이 의무려산인 것이다.
"이 산이 광개토태왕이 패려를 정복하려 갈 때 만났던 첫 번째 산 부산(富山)이다"
광개토태왕이 거란의 소굴인 현재의 내몽고 임동 지방을 쳐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란까지 가는 루트를 알 수 있는 힌트는 광개토태왕비에 나타난 3곳의 지명 뿐이다.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필자는 처음 요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그 길에는 '부산(富山)'"부산(負山)"이 없다. 산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성이나 요동성을 떠난 태왕 군대 어디로 해서 갔을까? 그 길은 당시 이미 확보해 두었을 요하평야를 건너갈 수밖에 없고 요하평야를 지나면 어디서든지 처음 만난 산은 의무려산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의 서북정복로를 따라 탐사길에 오른 우리는 그 첫 번째 힌트인 '부산(富山)'에 도착한 것이다.
"왜 부산이라고 했을까?"
"당시의 산 이름일까? 아니, 당시에도 의무려산인데?"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오르지만 우선은 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옥천사 부근의 절경



















(위) 요하평원 끝을 가로막는
     의무려산
(아래) 옥수수밭의 무려성 돈대


의무려산은 부산(富山)


장권 뒷면 설명을 보니 요순 때부터 12대 명산의 하나로 불렸다고 하는데 유적들은 대부분 요나라 이후 청나라 때의 것이다. 이 때는 이 산이 신령한 산으로 꼽혀 절, 문묘, 전각, 정자 같은 것들이 많이 지어졌고, 산기슭엔 북진고성도 있다. 황산의 기묘함(黃山之奇), 아미산의 수려함(峨嵋之秀), 태산의 웅장함(泰山之雄), 계림의 아름다움(桂林之美)"을 모두 갖추었다고 자랑하는 이곳은 이제 가족과 연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동호족 말로 의무려란 말은 크다는 뜻이라고 한다.
청나라 때의 몇 가지 절과 문묘를 본 뒤 우선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를 타고 옥천사로 가면서 우리가 왔던 요하평원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자그만 정자에 앉아 백두산, 천산(千山)과 함께 중국 동북 3대 명산이라는 의무려산의 절경을 감상하며 오랜만에 한가한 한 때를 보낸다. 이제 필자는 동북의 3대 명산을, 아니 봉황산까지 합해 4대 명산을 모두 올라본 것이다. 음산(陰山)산맥 의 가지인 이 산은 길이 45㎞, 넓이 630㎢이고, 이름난 봉우리만도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싫증날 정도로 인간의 손이 많이 간 주변 경관이 다른 3개의 명산과 비교된다.
주위를 감상하면서도 나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화두로 가득 차 있다.
"왜 고구려는 이 산을 부산(富山)이라고 불렀을까?"
소나무, 가래나무, 보리수 같은 울창한 숲과 밤나무, 대추나무 같은 유실수가 보이고, 잘 자라지는 않았지만 머루넝쿨도 보인다. 지금은 치수사업이 잘되어 옥토로 변했지만 옛날처럼 범람하던 요하를 간신히 건너 계속되는 늪지대를 달리다가 의무려산에 도착했을 때 나타나는 이러한 풍부한 산림자원이 산 속에서 훈련을 받은 고구려 군들에게는 혹시 부산(富山)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든다. 오랜 화두가 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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