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무룬강가


고구려 땅에 선 이성량(李成梁) 패루(牌樓)


후 3시30분 북령시(北寧市)로 돌아왔다. 이 북령시는 오랫동안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땅이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금주부지(錦州府志)}에 나온다. 북진을 떠나기 전 답사단은 잠깐 이성량(李成梁)을 기리는 패루(牌樓)를 찾아갔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은 이 패루의 주인공인 이성량이 바로 우리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철령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최진보산성을 오르다가 우연히 이성량의 후손을 만나 입수한 족보에 보면 이성량의 고조할아버니 이영(李英)이 명나라 초 압록강을 넘어 철령에서 터를 잡았다고 했으며, [이씨의 원적은 조선인이다]고 분명하게 적고 있다.
이성량은 16세기 진수요동(鎭守遼東)의 대장이었다. 철령에서 태어난 이성량은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다. 마흔 살이 넘어서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된다.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고족과 여진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누루하치의 부친과 할아버지를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이 인정된 것이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이성량이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이 더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원군 사령관으로 4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온 이여송이 이성량의 맏아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 이성량 패루를 방문한 많은 선인들은 이성량이 대국에 가서 큰 벼슬 한 것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당나라에 가서 벼슬한 고선지나 이정기를 찬양하는 것과 같은 정서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역사 전체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 적국에 가서 벼슬한 사람은 찬양하는 반면 현지에 남아 30년 동안 피를 토하며 독립운동을 해 발해를 세운 세력을 잊고 있었고, 명나라를 사대한 나머지 우리와 가장 가까운 형제였고 고구려 옛 땅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물리친 이성량은 추앙하면서 여진족은 오랑캐라고 깔보았던 것이다.
'만일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이 미국을 칠 때 큰 공을 세웠다면 이들은 과연 자랑스러운 것이며, 국내에서 어렵게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과 비교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곳을 떠난다.

부산(負山)을 넘어 거란으로


무려산에 도착한 고구려 광개토태왕 군대는 그 다음 어디로 갔을까? 의무려산에서 거란의 본거지인 내몽고 임동으로 가려면 노노아호(努魯兒虎)산맥을 넘어야 하고 이 산맥을 지나면 거란의 본거지까지 가는 동안 큰 산이 없기 때문에 이 산맥이 바로 부산(富山)을 지나서 나타나는 부산(負山)일 수밖에 없다.
노노아호산맥을 넘는 길은 두 군데가 있는데, 북표시(北票市)에서 내몽골 오한기(敖漢旗)로 가는 길은 당시 후연의 수도인 용성에서 40㎞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탐사단은 부신시(阜新市)에서 내몽골 나만기(奈曼旗)로 넘어가는 길을 골랐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의무려산 부신터널
북령시 이성량 패루
부신시

7월 8일, 하루 종일 연나라가 쌓은 장성을 탐사하고 저녁 7시 장성터를 떠나 노노아호산맥을 넘는다. 뜻밖에 산맥을 넘는 길은 험하지 않고 마치 대관령을 넘듯이 구릉 같은 경치가 계속된다. 가끔 최근에 특수한 수종을 개발해 심은 나무가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초원이 계속되어 나무가 많은 의무려산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태왕군은 왜 이곳을 부산(負山)이라고 했을까?"
아무래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부(負)는 '(등에)지다, (싸움에)지다, 빚을 지다, 잃다, 부정의 조동사' 처럼 상당히 마이나스(-)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성한 의무려산을 플러스(+)적인 부산(富山)으로 표현한 반면 아무 것도 없는 민둥산을 본 고구려군에게 노노아호산맥은 마이너스적인 모양으로 보였을지 않을까?."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차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요령성을 벗어나자 도로가 갑자기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시작한다. 9시 10분 내몽골에서 처음 맞는 구하자( 河子)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10시에 출발하여 한밤중인 1시 25분 나만기(奈曼旗)에 도착할 때까지 3시간 25분은 정말 암흑 속의 사투였다. 비온 뒤 내몽골의 길은 완전히 흙탕길이었다. 죽죽 미끄러지는 노면은 빙판보다 더 했고, 갈래길이 나와도 물어볼 사람이 없고 밤늦게 다니는 차도 없어 막막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산(負山)을 넘는 일은 차로 달리는데도 정말 힘든 길이었다.
사막을 지나 시라무룬강으로


7월 9일, 오늘은 좀 늦게 9시 40분 호텔을 출발하였다. 사막지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제 다녔던 요령성과 주위의 풍광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광개토태왕 군대가 거란을 치려면 반드시 시라무룬강(西拉沐倫河)을 건너야 하고 시라무룬강까지 가려면 산맥을 넘어 이런 사막지형을 지나가야 했을 것이다.
우리 탐사단은 이미 광개토태왕비에 나타난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났고 이제는 염수(鹽水)를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염수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가지였다. 압록강의 옛이름인 염난수(鹽難水)와 같이 소금염자(鹽)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압록강이라는 설, 당시 고구려의 강역이 요하를 건너지 못했다는 가정 하에 요하 이동이라는 설, 거란의 위치 등을 참작하여 시라무룬강(西拉沐倫河)이라는 설 등이다. 우리 답사단은 마지막 시라무룬강설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 험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압록강설은 염난수가 수도인 국내성 한 복판을 지나는 강이기 때문에 검토할 필요도 없으며, 광개토태왕이 거란을 치고 돌아올 때 요하 유역에 있는 고구려 고을들을 돌아보고 오는 것을 보면 요하 유역은 이미 고구려 땅이었기 때문에 염수는 시라무룬강(西拉沐倫河)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왜 염수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이 현지 지명이라기보다는 정복군대가 현지에서 부친 이름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염수(鹽水)도 짠맛이 나는 강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래서 지난해 대흥안령 자락에서부터 시라무룬강에 이르는 길을 뒤지며 물이 짠 호수나 강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파림우기(巴林右旗)에서 적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라무룬강에서 강물이 짠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가 세운 가설을 증명하지 못했다.
"시라무룬강이 짠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라무룬강설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래서 올 해 다시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넘어 시라무룬강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말라붙은 시령하
  염수를 찾아서 시라무렌으로


라무룬강 탐사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였다. 6시 임동(林東)을 떠난 탐사단은 11시 10분, 시라무룬강변의 하얼친이란 마을에 다다랐다.
'시령하(時令河)다'
속으로 소리쳤다. 강폭이 2∼3km나 되는 큰 강에 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시령하라는 것은 철따라 비가 많이 올 때는 물이 흐르다가 가물 때는 물이 말라버리는 강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말로 푼다면 계절강(季節江)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적봉으로 가는 길에 본 시라무룬강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물이 흘렀던 흔적은 약간 있지만 한 방울의 물도 없다. 이건 정말 뜻밖의 일이다. 막연하지만 이 계절강과 광개토태왕의 염수(鹽水)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마지막 작은 물줄기가 말라가며 만들어낸 섬세한 모래층이 신비하고, 가지가 거의 없이 몸통에 잎이 무성하게 난 강가의 버드나무들이 기이하다.
"그래도 이 강은 물이 짠 소금강은 아니다"
탐사단은 소금강을 찾으러 온 것이지 경치구경하러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라무룬강을 계속 탐사해 보기로 하였다. 차를 타고 시라무렌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지나 건너편 둑 위로 차를 달렸다. 물 없는 계절강은 계속된다.
"옌젠디다"
운전기사가 소리쳤다. 옌젠디는 염감지(鹽 地)를 중국어로 발음한 것이다. 염감지란 알카리성 토양을 말하는 것으로, 소금기가 많이 들어있고 썩은 유기물질이 겉을 검게 물들이고 알카리성 반응을 나타내는 땅을 말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소금기 있는 땅' 정도로 옮길 수 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염수다"
마치 요르단강의 사해나 미국 솔트 레이크 시티의 소금강처럼 짠 강물만 생각했던 필자에게 이 염감지란 단어는 염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지금은 둑을 막아 강 바깥쪽에 있지만 광개토태왕군이 이곳을 지날 때는 모두 강바닥이었을 것이고, 고구려 대군에게는 소금강과 같았을 것이다.

 

시라무룬강과 서요하가 염수(鹽水)였다


2시 30분, 대흥(大興)에 도착하여 우선 허기진 배를 채웠다. 4시 출발하여 조금 가니 시라무룬강과 노합하가 만나는 지점이 나오고 여기서부터는 서요하(西遼河)가 시작된다.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 얕지만 물이 보였다. 탐사단은 서요하 남쪽 강변을 따라 알카리성 토양을 계속 찾아갔다. 그러나 이곳에는 옛날엔 강바닥이었던 곳을 둑으로 막은 뒤 벼논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오후 6시, 드디어 시라무룬과 서요하가 소금기가 많은 강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명인향(明仁鄕) 신립둔(新立屯)에 도착하자 파란 벼논 사이에 풀도 나지 않은 알카리성 토양이 수 천 평 나타난 것이다. 하얀 소금기가 지표면으로 번져 나와있고 어떤 곳은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여기는 소금기가 있어 곡식이 안 되고 풀도 자라지 않는다."
"잿물(硝鹹)이 많이 들어 있어 시커멓다. 이건 물로 씻어도 씻기지 않는다."
몰려든 마을 사람들 가운데 쫘이 펑똥(翟鳳棟)이라는 젊은이가 자청해서 열심히 설명해 준다.
"이 서요하 남쪽 강변으로 쭉 있다. 동쪽으로 동래(東來)까지, 서쪽은 평안지(平安地)까지이다. 강변에서 멀리 떨어지면 없다. 시라무룬강 쪽도 이런 데가 있다고 친척들한테 들었다."
"소금기가 땅거죽에 나와 있는 것을 외연감지(外鹽 地), 땅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내염감지(內鹽 地)라고 한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내염감지도 풀을 심으면 죽는다."
마치 전문가처럼 토해내는 쫘이 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가슴속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사막을, 산악을, 초원을 헤매다 드디어 광개토태왕 군대가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건넜던 염수를 찾아낸 것이다.

 


(위) 시라무룬강 염감지
(아래) 염수를 찾은 기쁨으로
기념 촬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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