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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 없이 자라는 누에

1994년 8월 19일, 금년 들어 벌써 네 번째 중국 동북지방을 찾아가 만주지역에 있는 고구려 산성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요동지방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고 있는데 이번 계획된 일정도 이제 막바지에 이른다. 수암현 어느 산골의 여인숙. 세벽 5시에 일어나 아침 명상을 마치고 어제 답사했던 산성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는데, 6시쯤 함께 다니고 있는 조선족 청년 광휘 군이 들어와 산에 올라 가잔다. 심양 공항을 떠난 첫날부터 열흘간 매일 올라 다니는 산, 이젠 내가 깨우지 않아도 자기들이 일찍 일어나 서둔다. 밖을 나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고구려 산성의 위치를 아는 현지 안내인을 찾아내는 일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어렵지 않게 안내인을 찾아낸다. 광휘가 여인숙 바로 앞에서 부자간에 일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잠간 말을 주고 받더니 성이 추(鄒)씨라는 74세의 할아버지가 기꺼이 앞장을 선다. 열흘 동안 시골 동네를 돌아다니며 산성을 아는 안내인을 찾아내는 광휘의 실력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큰소리로 시비를 거는 기운 찬 추씨 할아버지는 그 소리만큼이나 가볍게 산을 오른다. 한국에서 사 간 7만 원 짜리 등산화도 할아버지가 신고 있는 몇 천 원 짜리 장화를 못 당하고 이슬에 젖어 양말까지 온통 젖어와 불편하기 그지없다. 산 위에는 여기저기 누에를 치고 있는데, 뽕잎을 먹여 기르는 것이 아니다. 상수리나무를 심고 어렸을 때 꼭대기를 꺾어 옆으로 낮게 자라게 한 뒤 그 나무 잎에다 누에를 올려 누에가 그 잎을 갉아먹고 자라게 하는 특이한 방법이다. 산성 안이 모두 누에 밭인데 먹이가 모두 뽕이 아닌 참나무 이파리다. 뽕를 딴다는 개념도 없다. 누에가 주위의 잎을 다 먹어치우면 누에가 붙어있는 가지를 꺾어 바구니에 담아 다른 나무로 옮기면 그만이다. 우리가 흔히 '누에는 뽕을 먹고 자라고 ....' 라고 말하는데 그게 아니다. 세상을 넓게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가 너무 상식화되어 있는 것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 일들이 많다.

 

연개소문의 봉홧불

추씨 할아버지가 안내하는 성벽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성벽의 모습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고 누에밭이라 큰 나무가 없고 키 작은 나무들만 있어 쉽게 성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큰 계곡 하나를 산등성이를 따라 쌓은 산성인데 성벽 양쪽으로 말이 달릴 수 있는 마도가 계속 나 있는 것이 참 특이하였다. "여기서 개소문이 봉화를 올렸다" 묻지도 않은 역사 이야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개소문이란 연개소문을 말한다. 당 태종의 아버지 이름이 '연'자이기 때문에 중국 사서에는 연개소문을 "연"이란 성을 없애고 '개소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중국의 산간 벽지에서 새벽에 우연히 만난 한 할아버지로부터 연개소문의 행적을 듣고, 이곳이 분명히 고구려 산성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 할아버지는 단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했을 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연개소문의 신화는 이렇게 막강하게 남아있는데, 우리는 삼국사기 기록만 가지고 왕을 죽인 나쁜 사람으로만 보고 있으니 이것이 올바른 역사보기인가?' 하는 생각이 계속 일어난다. 여기서도 여지없이 쐬기에 쏘였다. 쏘이자마자 빨갛게 부어오르며 처음에는 몹시 아프고 이어서 가렵기 시작한다. 쏘일 때는 순간적으로 쐬기를 원망해 보지만 한 편 생각해 보면 쐬기의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사실은 잘 살고 있는 쐬기를 내가 건드려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토성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7시 40분. 우체국에 가서 전화를 하려 하니 자석식 전화기의 손잡이를 돌려가지고 전화국에 신청을 하라고 한다. 신청을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깜깜 무소식이다. 결국 포기해야 했다. 국제전화는 물론 시외전화도 이렇게 어려운 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도시와 농촌간의 경제적 부의 격차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마침 여관 앞에 시장이 열려 포도 복숭아 등 과일을 잔뜩 샀다.


폐허만 남아있는 연개소문은 아성

 

고구려산성으로 가는 무궁화길

아침 식사를 하고 9시 출발, 11시 40분쯤 장하(庄河)에 들어서니 황하가 보인다. 산골만 찾아다니다 오랜만에 툭 트인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후련해진다. 우리는 장하에서 머무르지 않고 바로 시내를 벗어나 서북쪽으로 달렸다. 오늘의 두 번째 목표인 선성(旋城)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장하에서 서쪽으로 대련 가는 대로를 따라 달리다 평산향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5㎞를 달리면 상점이 하나 나오고 여기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시골길을 2㎞ 쯤 가니 선성촌이 나온다. 마을에서 찾아낸 왕금상(王金祥)이란 48세의 중국인은 대낮인데도 얼굴이 벌겋게 술에 취해 있었으나 이곳 사정에 대해서만은 정통하다. 왕씨는 말이 많았으나 산에도 잘 올라가고 아는 것도 많아 우리에게는 최고의 안내인이었다. 산성이 있는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은 뜻밖에 좋았다. 1988년부터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평산공사(平山公社)에서 30만 유안(한국 돈 3000만원)을 들여 3개월간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광지를 만들어 놓고도 관광객을 끄는 일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직선에 가깝도록 보기 좋게 닦아 놓은 길이 빗물에 씻겨 훼손된 곳이 많고 손질을 하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해두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길옆에 가로수처럼 심은 무궁화나무에는 마침 건강하고 화려한 꽃이 만발하고 있어 답사에 지친 나그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이 노랫말을 마음속에서만 읊조렸지 밖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8월의 폭염 아래서 산을 오르는 일은 쉽지가 않다. 하도 빛이 따가워 왕씨의 밀짚모자를 빌려 썼는데 모자가 작아서 자꾸 바람에 날려간다. 직선의 찻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길이 왼쪽으로 굽어지데 바로 머리 위 산꼭대기에 산성이 보인다. 산성을 본 필자는 순간 더위도 잊고 샛길을 따라 급히 올라가 보았으나 산성을 바라고 크게 실망하였다. 모두가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새로 쌓은 성벽뿐이기 때문이다. 한 바퀴 다 돌고 나서 간신히 옛성의 흔적을 일부 찾아냈으나 옛 성의 축성법을 알기에는 너무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새로운 성을 쌓으면서 원래 성벽으로부터 조금 들여쌓은 것을 보면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옛날 고구려 산성을 재현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관광지의 볼거리를 만들기 위해 성의 없이 쌓았다는 것을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쌓은 돌들은 전부 옛날 고구려 성에 사용했던 돌이라고 하니 정말 아쉽다. 이렇게 해서 관광지라는 명목으로 고구려산성 하나가 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르기는 어려웠지만 산성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니 확 트인 것이 정말 아름다웠다. 산아래로 주완(珠琓) 저수지가 시원하게 자리잡고 있고, 넓은 들판을 꾸불꾸불 흐르고 있는 삼차하(三 河) 건너 끝에는 선마산(旋馬山)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어 자리는 공원 자리인데 고구려 산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떠쳐버릴 수가 없다.

 

성산으로 가는길

평산향(平山鄕) 선성촌(旋城村)에 있는 산성을 답사하고 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내친 김에 성산산성까지 가기로 했다. 필자가 찾아다니고 있는 고구려 산성에 관한 기록은 단지 주소뿐이기 때문에 찾아가는 산성마다 부딪치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이번에 가려는 성산산성에 관한 정보도 장하현(庄河縣), 성산향(城山鄕) 사하촌(沙河村) 만덕둔(萬德屯)이라는 주소가 전부이다. 장하에서 대련으로 가는 대로를 따라 ?㎞를 달리면 명양(明陽)이라는 곳이 나오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꺾어들어 한참만에 성산향에 도착하였다. 성산향 소재지의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해서 들어가는 시골길은 제법 잘 닦여 있었으나 마지막 만덕둔 앞에서 다리가 끊겨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 물난리 때문에 유실된 길이 곳곳에 많다. 이런 경우 대부분 중국 운전사들은 더 이상 갈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간 김영빈 씨는 본인이 더 우겨서 기어이 이 어려운 길을 건넜다. 그도 단군의 아들인 조선족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성산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동네를 지나 북쪽으로 산길을 달려 올라가자 얼마 안 가 거창하게 지은 중국식 성문이 나온다. 고구려 산성에 왠 중국식 성문인가? 최근에 입구를 막고 입장료를 받기 위해 중국인들이 지은 건물인데, 작년(1993년)부터 고구려 산성이 있는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여 금년(94년) 5월 18일부터 한 사람 앞에 5원씩을 받고 있다. 입장료를 내고 조금 올라가니 임시로 지은 것이지만 숙소와 식당이 있다. 우선 방을 잡아 놓고 중외합작(중국과 외국 자본의 합작) 개발회사 사장과 함께 차를 몰아 성안에까지 들어갔다. 아직 길을 고치고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경제학박사라는 필자의 명함을 본 중외합작 개발회사 사장은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한국의 자본이 개발에 참여하는 것을 바라는 눈치이다.

 

해안 방어의 요지, 고구려 석성

우리가 들어선 남문 입구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세운 표지판이 있고, 그 표지판에는 [석성(石城)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구려 때의 석성이라는 표지인 것이다. 고구려 석성은 삼국사기나 중국의 사서에 분명히 나오는 고구려의 성이다. 보장왕 6년(서기 647년) 1차 고구려 침략에 대군을 끌고 왔다 실패한 당나라 태종이 다시 고구려를 침략할 계획을 세운다. 이 때 조종의 논의는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는 것이고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직접 나서는 것은 위험하므로 작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고구려 국내 정세를 혼란시키는 작전으로 나간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를 침략할 때 육군과 해군으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황제가 이에 따라, 좌무위 대장군 우 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이 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출동시켜, 누선을 타고 내주로부터 해로로 진격케 하고, 또한 태자 첨사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 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의 군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가을 7월, 우 진달·이 해안 등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다. 그러나 이 해안이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사망한 우리 군사가 3천명이었다. 태종은 송주 자사 왕 파리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하려 하였다. 당시 당나라의 혼란 작전에 참가해 해군을 지휘했던 우진달(牛進達)과 이해안(李海岸)이 산동반도에 있는 내주(萊州)를 떠나 요동반도에 상륙한 지점이 바로 석성에서 가까운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때 우진달과 이해안이 상륙하여 고구려 군과 무려 100여 차례나 싸운 뒤 석성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 659년 당나라 설인귀가 쳐들어와서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싸운 곳도 바로 이 석성이다. 봉천통지(奉天通志)에 따르면 석성은 연개소문이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거의 산정 가까운데 있는 도교 사원까지 올라간 뒤 산정에 올라가니 산성 북쪽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아있는 상태도 완벽했지만 성의 규모도 대단했다. 해가 넘어갈 때까지 계속 촬영하고 거의 보름달이 다 된 달빛을 받으며 8시가 다 되어서야 하산하였다. 이곳은 벌써 관광지 형태를 갖추어 시끄럽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공사 책임자가 이곳을 개발하기 위해 산성의 구조를 파악해 놓은 지도를 보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 주었다. 한국에서도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투자는 그 다음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석성에 대해 상세하게 작성한 지도가 탐이 났다. 학자들이 조사해서 작성한 개념도 보다 훨씬 자세한 설계도이기 때문에 이 지도 한 장이면 석성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도를 한 장 복사해 달라고 했더니 내일 시내에 나가 복사해 오겠다고 약속했다. 11시쯤 피곤한 몸을 허름한 임시 숙소 침대에 눕히고 잠을 청한다. 오늘은 참 피곤하고고 쐬기 물린 곳도 몹시 가렵다.

 

압록강 이북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고구려 산성

8월 20일(토), 아침 일찍 일어나 건너 산에 올라가 사진을 찍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는데 그것이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도록 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오늘 새벽 건너 산에 올라가 전체 사진을 찍은 뒤 이곳을 떠나도록 되어 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산성은 하루 더 머무르면서 좀 더 살펴보고 사진도 완벽하게 찍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정을 바꾸었다. 7시 30분 등반을 시작하여 1시 30분까지 6시간에 걸쳐 전 산성을 촬영하였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어 큰 우산을 가지고 어느 정도 직사광선을 가렸지만 정말 힘든 하루였다. 산꼭대기에 숲이 우거지지지 않아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노출되어 힘들었지만 반면에 산성의 여러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어 사진을 찍기에는 가장 알맞은 조건이었다. 마지막에는 힘이 빠져 렌즈를 갈아 끼운다는 것이 옆에서 도와주는 준화에게 사진기를 주고 렌즈만 받아 끼우려고 할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광휘 군이 병이 났다. 어제 저녁에 술을 먹고 늦게까지 안 잔 이유도 있지만 역시 무리한 일정 때문이다. 때문에 준화와 지용이가 고생을 했다. 지용이는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저녁에 일찍 자기 때문에 오히려 항상 건강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 다리를 들로 다니는 임무를 아주 잘 해 냈다. 성산산성은 정말 대단한 성이고 보존상태도 좋았다. 성산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다. 동남쪽 성벽에는 두 개의 문이 있는데 현지에서 정문이라고 부르는 남문을 들어선 후 북쪽으로 150미터쯤 가면 동문이 나온다. 정문이나 동문이 비교적 당시 성문의 구조를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서는 서풍의 성자산산성과 함께 고구려 산성의 성문을 관찰할 수 있는 극히 드문 현장이다. 두 문에 모두 그을린 곳이 있어 전쟁 때 불로 공격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을 들어서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동쪽으로 가면 동문을 지나 아성과 장대가 있는 쪽으로 올라가고 왼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못이 나온다. 길이 7미터, 너비 5미터, 깊이 3미터로 상당히 큰 저수지인데 이곳이 당시 성내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말들의 수원이 되었을 것이다. 현지에서는 죄를 진 군사들을 가두고 벌주는 곳이라고 한다. 바로 이어지는 사원에으로 올라오는 길을 따라 조금 가면 암문이 나오는데 암문이란 정식 문이 아니고 비밀리에 적을 친다거나 철수할 때 쓰는 비상문을 말한다. 서쪽 암문 주위에는 고구려 축성법을 잘 알 수 있는 곳이 많다. 암문 유지는 물론이고 절벽에 절묘하게 쌓아올린 성벽들, 특히 큰 바위를 그대로 두고 그래질을 해서 쌓아올린 축성법을 잘 볼 수 있는 곳 등이 있다.

깃대봉- 현지인들은 이곳에 장수이 깃대를 꼽기 위해 돌로 쌓은 곳이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니 귀퉁이에 기단이 있고 돌들이 넘어져 있는 모양이 마치 적석묘갔았다.

 

천단-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천단고 너무나 닮았고 분위기가 같다

 

연개소문이 쌓은 앞성과 뒷성

암문 근방에서 성벽을 따라 올라가며 바라보느 경치는 정말 장관이다. 멀리 벽류하가 유유히 흐르고 성산산성에서 흘러들어간 협하(夾河)가 그 벽류하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이 지도를 보는 것처럼 한 눈에 보인다. 백운대 꼭대기에 올라온 것처럼 기묘한 모양을 한 바위를 오르내리다 보면 시원 경치에 빠져 시간 가는 것을 잊을 정도이다. 여기서 급하게 꺾이는 성벽을 따라 경사가 약간 심해지는 길을 오르면 바로 현지에서 깃대봉이라는 곳에 다다른다. 현지인들은 이곳에 장수의 깃대를 꼽기 위해 돌로 쌓은 곳이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니 귀퉁이에 기단이 있고 돌들이 넘어져 있는 모양이 마치 적석묘 같았다. 이러한 시설은 다른 고구려 산성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깃대봉을 지나면서 북쪽 계곡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가슴에 안겨온다. "계곡 건너 산을 자세히 보십시오. 거기도 고구려 산성이 있습니다." 만일 안내한 사람이 일러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곳이다. 자세히 보니 잘 쌓은 성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성산은 앞성과 뒷성으로 나뉘는데 앞성은 길이 2.878미터로 성아산(城兒山) 또는 홍적산(紅赤山)이라고 부르는 산 위에 있고 서북쪽 성벽 아래 계곡을 건너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 위에 뒷성이 있다. 뒷성은 립자산(砬子山) 위에 있는데 립자란 중국말로 절벽이란 뜻이다. 5000미터나 되는 큰 성이고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지만 산꼭대기에 끝없이 이어진 성벽이 분명하게 보일 정도로 아직 잘 보존되어 있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뒷성을 다 쌓기 전에 침략을 받아 당나라에 패배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당나라가 쳐들어오기 전에 뒷성을 완성했더라면 당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야, 천단이다

깃대봉에서 북서쪽 성벽을 따라 400미터쯤 가면 아주 잘 지은 네모난 단이 하나 나온다. 필자는 이 단을 보는 순간 '천단이다'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천단과 너무나 닮았고 분위기가 같기 때문이다. 현지 안내서에는 연개소문의 여동생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이곳은 사람이 살던 곳은 아니다. 위치로 보나 꼭대기의 모양새로 보나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단으로 보였다.

고구려는 성 안에 동명신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광개토태왕비에 동명은 '황천의 아들', '천제의 아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산 위의 높은 곳에 신단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천단에 올라 서 보니 성 안이 모두 보이고 앞뒤가 트여 그야말로 명당자리다. 한 변의 길이 가 대략 5.5m 정도 되는 네모꼴인데 밑변은 8m 정도로 더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절묘한 퇴물려쌓기를 하였다. 높이는 2.5m 정도로 높지 않지만 절벽이 있는 북쪽은 1m 이상 더 내려 쌓아 기초공사를 튼튼하게 하였다. 이러한 신단은 필자가 지금까지 100개 이상의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면서 처음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산성은 연개소문이 직접 주거했다는 설이 상당히 신빙성 있으며 중요한 전쟁 때는 고구려의 태왕이 거주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아성

천단을 떠나 북쪽 성벽을 따라가는 길은 힘들지 않고 갈 수 있도록 잘 나있다. 서북벽 끝에 다다르면 마치 짤룩한 꼬리처럼 좁은 산정이 나오는데 이곳에 중요한 시설들을 많이 축조해 놓았다. 동쪽벽을 따라 북쪽 끝에서 맞닿는 정상에 아성, 즉 내성의 터가 나온다. 산성 전체의 둘레를 따라 외성을 쌓고, 주로 산 꼭대기 높은 곳에 작은 내성을 쌓는데 이 곳에는 이 성에서 가장 높은 장수가 직접 거주하면서 지키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어금니 아(牙)자를 써서 아성이라고 한다. 장수는 외성이 무너지더라도 끝까지 이 성을 사수하면서 구원병을 기다리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를 빼앗긴다는 것은 곧 완전한 패배를 일컫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 흔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아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이 아성을 중국식으로 자금성(紫禁城)이라고 부르며 연개소문과 그의 여동생 연개소정(延蓋蘇貞)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아성 서쪽에는 문이 나있고 이 문을 통해 보면 뒷성과 멀리 벽류하(碧流河)가 한눈에 보인다. 작은 문이지만 동문이나 남문처럼 빗장을 거는 구멍이 남아있어 고구려 산성의 성문을 연구하는데 큰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다. 아성의 북쪽 가장 높은 곳은 봉수대이다. 전방에서 전해오는 현장 상황을 최종 접수하고 사안에 따른 명령을 봉홧불로 알리기 위해 아성 바로 옆에 봉화대를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9미터가 넘는 높은 장대를 쌓았다. 아성에서 장대까지는 성벽을 쌓아 연결하였는데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고구려 산성의 장대 가운데는 그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장대 위 평평한 곳의 면적도 상당히 넓어서 그것만 보아도 이 성의 규모와 위치를 알 수 있다. 동문을 따라 내려오면서 군사 병영터 근방 바위 위에 인공으로 판 구멍을 발견하였으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완전에 가까운 치성이 하나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치첩부분은 관광지 개발을 하느라고 새로 쌓아올려 오히려 원형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공해였다. 동문은 왼쪽을 둥그렇게 튀어나오게 쌓아 적대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남문의 오른 쪽도 마찬가지다. 일자로 되었을 때보다 양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옹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고구려 성벽의 겉쌓기에 대한 표본을 볼 수 있다. 마치 메주를 가지런히 쌓아올린 것처럼 빈틈이 없는 성벽을 바라보며 '고구려인들은 돌을 다루는 마술사였구나!' 하는 경탄이 절로 나온다.

 

여기도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성역화

성산의 산성은 압록강 이북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 가운데서 가장 잘 보존된 산성으로 고구려 때의 산성 구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최적지이다. 산 이름과 행정구역인 향의 이름이 '성산'일 정도로 완벽한 고구려의 산성이 남아있다. 식사하고 2시 30분쯤 출발했으나 멀리서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좋아, 전면 사진을 찍지 않고는 갈 수가 없어 다시 돌아왔다. 3시 반쯤 돌아와 휴식하였다. 사실은 이 때도 휴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사업이 계속되었다. 이 때 개발회사로부터 지도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지도에 나타난 관광지 조성계획을 보니 성안에 호텔과 유흥장을 짓고 더구나 산꼭대기에 장군상을 세운다고 한다. 장군상이란 천산에서 보았던 설인귀의 석상과 같은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한국 관광객이 이 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오히려 사회주의나 가난했을 때는 손을 대지 못해 그대로 보존했던 고구려 산성을 설익은 사회주의식 자본주의가들이 설인귀를 영웅화하여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중국 동북지방에 갑자기 설인귀가 영웅으로 재등장하는 것이다. 어쩌면 성을 버려 두어 동네사람들이 성곽을 헐어다 집이나 지어버리는 것보다는 관광지를 개발해서 보존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옛성 위에다 고증도 없이 첨가해서 여장을 쌓는다던가 중요한 성 위에다 설인귀의 동상을 만드는 등 쓸데없는 역사조작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입장권을 받는 중국식 성문 밖에서 성 안 전경을 촬영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중국식 성문에 나부끼는 깃발에는 모두 "설(薛)"자가 써있다. 바로 고구려를 침략했던 설인귀의 영기가 나부끼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산성에 무슨 당나라 장군의 기인가? 역사는 마지막 승자의 전유물인가? 여러 가지 상념이 나그네의 마음을 심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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