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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성 수암(岫巖)의 고구려 낭낭산성


1993년 5월 10일, 수암에 있는 고구려 낭낭산성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수암은 제1차 방어성인 안시성이 무너지면 바로 2차 방어선의 센터인 오골성(현재 봉성시 봉황성)을 치게 되는데, 오골성 함락되면 적군은 바로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기 때문에 오골성 전방에 강력한 산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암에는 무려 20 개가 넘는 고구려 산성이 몰려있다. 차가 수암 벗어나 얼마 안되어(13㎞) 양가보향(楊家堡鄕)이 나타나고,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들어 물길(개천)을 따라 조금 가니 낭낭산성이 나온다. 차로 성문 안까지 들어가니 초라한 시골집이 한 채 있고 기둥에 [문화재관리소]라는 빛바랜 간판이 붙어있다. "산성을 좀 구경하러 왔는데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관리인 손씨가 두말없이 안내를 자청하고 나선다. 가족과 함께 이곳에 살며 고구려 성을 지키고 있는 이 젊은이는 "1년에 800원씩 받고 산성을 관리하고 있는데 작년부터는 예산이 없는지 그것도 안나온다"며 급변하는 세상을 걱정한다. 내 사진기 가방을 메고 앞장서는 손씨에게 6살 짜리 외아들이 합류한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잘 쌓은 성벽이 나타났다. 산등을 따라 화강암으로 쌓은 성벽은 길이가 2835m로 아주 큰 성은 아니지만 가운데 오목한 계곡을 둥그런 능선이 둘려 쌓아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성벽은 쐐기꼴 돌로 마치 메주를 쌓아놓듯이 정연하게 겉쌓기를 해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혁명 때 허물어버린 고구려 산성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허물어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완벽하게 남아있을 것이다"며 손씨가 혀를 찬다. 가는 곳마다 문화혁명 때 고구려 유적들이 훼손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니 문화혁명이 얼마나 [반문화혁명]이었는지 알 수 있다. 아늑한 봄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선조들이 애환이 서린 성벽을 따라 올라가며 705년간 동북아를 호령했던 고구려역사를 되씹어본다. '옛날 고구려 장병들이 이 길을 이렇게 걷고 있었겠지'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손씨가 성벽 아래로 내려가더니 무슨 풀을 뽑아 꼬마친구에게 주자 껍질을 벗기더니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 먹어보라고 주는 풀을 먹어보니 아삭아삭하고 새콤한 맛에 올라오느라고 힘들었던 피로가 씻기는 듯 상큼하다. 이름을 물어보니 쏸장(酸漿)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괭이밥(괴승아, 산거초, 초장초라고도 한다)이라고 하는 풀이다. 그 뒤 만주에서 고구려산성을 오르내리며 목마를 때 배고플 때 괭이밥은 필자의 필수 간식이 되었다. 산성 위를 따라 걷는 길은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편안하다. 때때로 철늦은 철쭉이 반기고 양가보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니 아주 상쾌한 산보길이다. 서북 산꼭대기에 올라서자 낮은 수림사이로 아주 튼튼한 성이 마치 용처럼 누어있는 것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 중간쯤 내려가다 보니 성안 쪽에 10m쯤 이중으로 쌓인 겹성이 보이고 조금 내려가면 북문 나왔다.

 

 

 

 

 

 

 

 

 

 

을지문덕이 대첩한 살수, 청천강인가?

북문에서 다시 완만한 경사를 따라 망대를 지나 봉화대에 오르니 사방팔방이 훤히 트인다. 머지 않은 북쪽으로 낮은 산 한 둘만 넘으면 바로 수암이 보이고, 수암에서 남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대양하(大洋河)가 성 동쪽을 끼고 유유히 흐른다. 천산산맥에서 발원하는 대양하는 초자하(哨子河)라는 지류와 합류한 뒤 큰 물줄기를 이루어 황해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초자하가 바로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수공으로 물리친 살수다'는 주장이 북한에서 나왔다. '살수는 청천강이다' 이렇게 알고 있는 독자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고 반문할 것이다. "청천강이 살수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만일 이런 질문을 되받는다면 '교과서에 그렇게 써 있다'는 대답 이외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사실 청천강이 살수라는 물증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평양까지 쳐들어왔던 수나라 군사가 도망가다 처음 만나는 큰 강에서 을지문덕 장군한테 몰살한다는 기록이 전부다. 이 경우 수나라의 침공을 받은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면 살수는 청천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한 학자의 논리는 다르다. '수나라가 처들어온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단동 위에 있는 봉황성이다"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 압록강 이북을 통치하기 위해 봉황성에 북평양을 설치하였는데 수나라가 쳐들어온 것은 바로 북평양이고, 수나라 군이 도망가다 만나는 첫 번째 강은 바로 대양하 지류인 초자하이기 때문에 '초자하가 살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우리 역사의식이 한반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살수가 요동반도에 있다'는 가정을 가져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되씹어 볼만한 주장이다.

 

 

계란 삶아 줄테니 쉬어 가세요

처음에는 외적들이 쳐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봉화를 올려 봉황성에서 지원군인들이 달려왔다. 나중에 진짜 당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왔을 때는 봉화를 올렸으나 이번에도 거짓이라고 생각해서 중원군이 오지 않아 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옛날부터 구전되어 내려온다며 손씨가 들려주는 고구려 전설은 마치 이솦 우화의 [늑대와 소년] 이야기 같다. 고구려가 명망한지 1300년이 지났지만 화려했던 고구려 전설은 아직도 현장에 남아있어 나그네의 심사를 울적하게 한다. "아빠 문이 잠겼어요, 빨리 내려오세요!" 학교 갔다 집으로 점심 먹으러 온 딸이 집 열쇠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와 버린 아버지를 찾아 부르는 소리가 봉화대까지 또렷하게 들린다. 내려오니 부인과 딸이 반갑게 맞아준다. 안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어 받아주는 물을 단숨에 세 그릇이나 비웠다. 산을 오르느라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물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계란을 삶아 줄 테니 잠깐 앉아서 쉬십시오" 화려하지 않지만 착하게 살고 있는 이 가족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삶아주겠다는 달걀은 시장에서 산 것이 아니고 뜰에 노니는 암탉이 난 것이다. 손씨는 뜰에는 닭 말고도 돼지가 돌아다니고 노새도 세 마리나 있는 부자다.

 

이성계가 말머리 돌린 위화도

5시가 다 되어 단동에 도착하였다. 단동은 주위에 고구려가 첫 진출한 서안평, 당나라 침략군과 대전을 벌인 박작성, 압록강 이북의 최대 기지 오골성 같은 고구려 2차 방어선의 중심 유적들이 배치되어 있어 며칠을 머물어야 하는 곳이다. 단동에 오면 우선 유람선을 타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깃들은 압록강을 보는 것이 첫 순서이다. 유람선이 출발하자 먼저 뱃머리를 압록강 상류로 돌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배 앞에 푸른 숲처럼 나타난 것이 위화도(威化島)이다. 위화도는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에 속하는 우리 땅으로 상단동, 하단동 같은 마을이 있는 한 개의 면 단위다. 위화도 하면 생각나는 것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다. 1388년(고려 우왕 14년) 5월 요동정벌에 나섰던 고려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이 위화도에서 왕명을 어기고 요즘 말하는 소위 구테다를 일으키므로 해서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위화도에 올라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며 크지 않은 섬이니 구석구석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기만 가지 못하는 땅을 바라만 보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압록강 철교는 왜 개폐식으로 했는가?

유람선은 섬 가까이 갔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하류 쪽으로 5분쯤만 달리면 압록강 철교에 다다른다. 길이는 944.2m 압록강 철교는 12개의 다리말뚝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인원 50만 9,319명을 투입한 공사는 1911년 10월 18일 안동 측의 열두 번째 강철 다리말뚝을 설치하므로 해서 끝이 나고, 10월 27일 시운전한 열차가 통과했으며, 그 뒤 안봉선(안동-봉천) 개축공사의 준공을 기다려 11월 1일 개통식을 가졌다. 압록강 철교가 명물이 된 것은 배가 지나갈 때는 다리를 들어올리는 개폐식이라는 것인데 처음 설계에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철교를 만들면 정크(중국의 범선)나 기선의 항해를 방해하고, 나아가서는 청국 내 통상에 대한 기회균등을 약속한 일본 정부의 취지에 반하는 행위라며 미국과 영국의 공사들이 항의하고 나서자 1908년 11월 급히 설계를 변경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다리말뚝 가운데 하나를 가동식으로 변경한 것인데, 한국 쪽에서 세어 아홉 번째 다리말뚝 한 가운데다 교각을 하나 더 추가하고, 이것을 축으로 하여 다리를 90도 회전할 수 있게 하여 배가 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두 번째 철교도 일제 때 만들었다.

한국인들이 쓴 대부분의 기행문에 육이오 때 폭격을 맞아 압록강 철교가 불통되자 새로 다리를 놓았다고 되어 있는데, 신·구 두 다리는 모두 일제 강점기 때 놓인 것이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일본과 중국을 잇는 한국 철도의 중요성이 급속히 증대되자 1937년부터 경부선과 경의선을 복선화하고 이어서 압록강 철교도 복선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뒤, 퇴로 차단과 중국의 보급품 유입을 막기 위해 미군 폭격기들이 압록강 철교에 폭격을 가했다. 1950년 11월 9일 폭격을 받은 하류 쪽 구교는 이때 파괴되어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구교도 남쪽만 파괴되고 북쪽은 폭파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압록강 철교가 국제교이기 때문에 교전당사국인 북한측만 공격하는 한정된 전략 때문이었다고 한다. 1991년과 1993년 갔을 때는 철교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재빠른 중국인의 상술 덕분에 입장료만 내면 끊어진 다리 끝가지 가 볼 수 있고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건너다보는 국경도시 신의주

압록강철교 밑을 지난 유람선은 조금 가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뱃머리를 돌려 북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바닷가 제방의 큰길에는 한가롭게 오가는 사람들도 있고 길가 의자나 계단 위에 앉아서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 측 유람선에서 유람객들이 손을 흔들면 가끔 손을 흔들어 대답하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사진과 비디오 촬영으로 어느 정도 위안을 삼고 돌아오면서 아쉬운 생각에 신의주와 압록강 철교를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다. 언젠가는 아니 머지않아 신의주 쪽에서 단동 쪽을 바라볼 날이 있겠지, 그리고 두 도시를 마음대로 오가며 갈증나게 바라보았던 오늘을 옛날 얘기처럼 얘기할 때가 있겠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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