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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공개, 고구려 박작성(泊灼城)!

10여년 전 중국 학자들이 애하첨고성 동쪽에 있는 호산(虎山)에서 명나라 장성을 찾다가 고구려 산성을 하나 찾아냈는데 이 성이 바로 고구려 박작성으로 알려졌다. 보장왕 7년(648) 당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박작성은 산을 이용하여 요새를 세웠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까지 압록강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은 애하첨고성과 이 호산산성 뿐인데 애하첨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유일한 산성인 호산산성이 박작성이 되는 것이다. 1998년 7월 말, 호산에 도착해 보니 고구려산성은 보이지 않고 최근 중국이 복원한 어마어마한 명나라 장성이 앞을 가로막는다. 몇 년 전 일본 방송국에서 제작한 [만리장성]이란 프로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잠깐 보여준 것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고구려산성이었다. 그 리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명나라 장성이 등장한 것이다. 어려운 경제사정 아래서도 중국이 압록강 가에 대규모 장성을 새로 복원한 것은 이민족인 청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오히려 그 땅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강력한 의사표현과 같은 것이다. 기록에는 이 장성 끝 어디에 고구려 산성이 남아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새로 쌓은 명나라 장성만 괴물처럼 버티고 있다. 끈질기게 수소문한 끝에 고구려 산성은 현재 명나라 장성을 복원해 놓은 산 뒤쪽, 다시말해 압록강 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트럭을 타고 애강 가 둑을 달려 조그만 마을에 닿아 옥수수 밭을 한참 동안 헤치고 가자 드디어 호산산성이 나타났다. 고구려 이후 1300년이 지나도록 땅속에 묻혀 있던 산성유적이 발굴된 것은 1991년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이었다. 그러니까 필자도 1998년에야 처음 대하게 된 고구려 유적이고, 이 글이 호산 고구려 유적에 대한 국내 첫 발표이다.

 

대형 우물과 다양한 유물

우선 이곳 유적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을 치라면 역시 우물이다. 고구려 산성에는 어디나 반드시 우물이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처럼 완벽하게 남아있는 대형 우물은 처음 본다. 우물은 둥근꼴인데 안벽의 지름이 4.4m나 된다. 우물 벽은 모두 잘 다듬은 쐐기꼴 돌을 곧게 올려 쌓았는데 아직까지도 53층이나 남아 있고 깊이가 11.25m나 된다. 지금도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되도록 깊이 팠던 것이다. 고구려 산성에서 보았던 메주같이 다듬은 돌로 절묘하게 쌓은 우물은 '고구려 우물'의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물 바로 앞에 만든 부채꼴 건축물도 특이한 것이다. 이 유적은 비교적 큰 돌로 쌓았는데 평면은 대개 부채꼴이고 반지름이 14m 쯤 되고, 둘레는 담을 쌓았는데 뒤끝이 비교적 뾰족한 쐐기꼴 돌로 정연하고 단단하게 쌓았다. 계단은 없지만 평면이 마치 로마의 원형극장처럼 생긴 이 건축물은 무엇에 쓰였을까? '물을 담아 놓은 저수지일까?' '그렇다면 바닥이 바위여야 할텐데 돌을 깔아놓았으니 물이 다 새버릴 것이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빠르다. 우물 윗쪽에 있는 돌벽도 그 쓰임새가 분명하지 않다. 성벽 같기도 하고, 성벽에서 튀어나온 치성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밖으로 물이 흐르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은 흔적이 계속 이어져 있어 발굴을 더 해 봐야지만 그 분명한 쓰임새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물 속에서 잘 보존된 통나무배(獨木舟), 삿대, 나무구유, 나무통, 나무주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통, 널빤지, 호리병 쪽박, 갈대자리, 동아줄, 질그릇 항아리, 쇠저울추, 고기뼈, 새뼈, 식물의 씨앗 같은 30여 가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고구려 문화를 밝히는 획기적인 유적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온 통나무배는 길이가 3.7m나 되는 것이고, 여러 가지 나무로 된 기구들도 대단히 특이한 유물들이라 앞으로 고구려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유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중국이 아직 발표를 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고구려안평성 표지만 지명을 따서 애하첨고성이라고 했다

한·중간의 교역장이었던 「책문후시」자리는 지금도 시장이다

호산산성의 성벽(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법이다)

지금은 밭이 된 고구려 안평성 터에서 유물을 찾고 있는 회원들

국경도시 변문

다시 1993년으로 돌아간다. 호후 6시, 날씨 탓인지 스모그 탓인지 아직 해가 남아있는데도 어둑어둑 하여 나그네 발길을 바쁘게 한다. 시내는 들어가지 않고 오룡배 쪽으로 돌아서 북쪽으로 갔는데 길이 좋지 않아 애를 먹었다. 변문(邊門)이라는 곳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일행이 모두 봉황성까지 가서 자자는 것을 내가 우겨 변문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1991년 단동에 갔을 때 만난 우리 동포가 "봉황성 좀 못가서 고려문(高麗門)이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나라 산신들이 중국을 다녀올 때 그 문만 나오면 고려 땅이기 때문에 '고려문'이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부터 240여 년 전 이곳을 지났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여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책문]이라 하고, 이 곳 사람은 [가자문(架子門)]이라 하며, 중국 사람들은 [변문(邊門)]이라고 한다"고 쓰고 "책문에서 봉황성까지 30리이고 압록강까지 120리다"고 기록하였다. 여기가 바로 조선 후기 청나라와 무역을 했던 책문(柵門)인 것이다. 연암이 이 변문을 들어서며, "한 번 이 문을 들어서면 중국 땅이다. 고국의 소식은 이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섭섭히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섰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천천히 책문 안으로 향했다."고 한 것을 보면 책문=변문=고려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려가 망하고 조선 500년이 더 지나도 이곳은 왜 계속 고려문이라고 했을까? 바로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여기서 하룻밤을 묵는 것이다. 함께 자는 기사들이 10시 반이 넘도록 술 먹고 11시 반이 넘을 때까지 떠들어 대 일찍 잘 수가 없었다. 자동차들이 자는 여인숙은 온돌을 이용하여 불을 때주는 것이 특이하였다. 바로 이 온돌도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풍속이 아닌가!

 

 

 

 

 

 

 

 

 

 

 

 

고려문이 사라진 사연

5월 11일, 아침 일찍 일어나 변문 구경을 나섰다. 조선족 상점이 하나 있어 이른 아침이지만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찾아들어가 물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어르신이 누구신가요?" 억센 평안도 말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집을 찾아가니 두 노인네가 반갑게 맞아준다. 신의주 농천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오영만 할아버지와 이이숙 할머니는 모두 71세의 나이지만 건강하고 표정도 밝다. 지나온 반 백년 타국에서 지내온 이야기를 시작하자 한도 끝도 없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일제시대, 해방, 육이오전쟁 같은 험난한 세월들을 보낸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도 없더니,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동포들은 거기다 힘든 이국 생활이 덧붙여진다. 그러나 두 노인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세타령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 어떤 학자도, 힘센 젊은이도 알려줄 수 없는 귀중한 이야기가 많았다. "이곳은 원래 고려문역이 있던 곳입네다. 기런데 1962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할 때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에 역 이름을 일면산역(一面山驛)이라고 바꾸어버렸디요" "이곳 변문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조선촌'이라는 곳이 있었디요, 그 때 이곳도 김일성이가 지나가다가 조선땅이다고 할까봐 이름을 탕하(湯河)라고 바꾸어 버렸씨요". 심양에서 단동까지 철도를 놓았던 일본 건설회사의 기록을 보면(間組百年事 185쪽) [고려문역]이 분명히 있었다. 안동현(安東懸)-사하진(沙河鎭)-합마당(蛤마塘)-오룡배(五龍背)-탕산성(湯山城)-고려문(高麗門)-봉황성(鳳凰城) 그러나 현재의 역 이름을 보면 단동-사하진-합마당-오룡배-탕산성-일면산-봉황성으로 되어 있어 건설할 때 붙인 역 이름이 모두 있는데, [고려문]만 [일면산역]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의 고구려성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내가 고구려산성을 찾아다닌다고 했더니, "5리만 가면 개소문(연개소문)과 쉐리(설인귀)가 싸우던 성이 있는 고성리(古城里)가 있다" "그곳에 가면 연개소문이 앉았던 엉덩이 자리가 남아있다. 지금은 공군 폭단기지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거다. 내가 아침 일찍 혼자서 우리 동포를 찾아 나선 것은 바로 이런 살아있는 진실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고구려가 가고, 발해가 가고, 천년 세월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연개소문 이야기가 우리 조선족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오랜 세월 한을 묻고 살아왔던 우리 노인네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귀중한 경험담이다. 그들에게는 그냥 지나간 이야기처럼 쉽게 건네준 말이지만, 이런 노인네들이 가시고 나면, 불과 몇 년 뒤만 가도, 이런 사실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영원히 묻혀버릴 일들이다. 만주지방에 알알이 박힌 우리 역사도 빨리 찾아 기록해 놓아야 하겠구나 하는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변문에는 조선족이 30호쯤 살고 있는데 다 돈벌이 가고 이제는 20호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늙어서 자세히 모르니 봉성(鳳城)에 가면 조선초중학교 선생하고 있는 맏사위를 찾아가라"고 여러 번 당부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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