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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평양간 최고 요충지 오골성

1993년 5월 11일 9시, 변문을 출발하여 고개를 넘자 얼마 안가 철길이 나온다. "꾸청(古城)이 어디 있습니까?"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물어보자 선뜻 입구까지 안내해 준다. 철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입구에 '봉황산성'이란 표지판이 붙어있는 남문 입구에 다다른다. 높다란 산봉우리들이 둘러 쌓인 별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산 속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함지땅(盆地)이 있단 말인가!' 젊은 아가씨가 '친구들과 놀러간 적이 있다'며 알려주는 것을 보면 이곳이 주변 마을들의 소풍 코스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차로 개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 마을 앞까지 갔다. 옛날 성이 있다고 해서 동네 이름까지 고성리(古城里)라고 한다. 개울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니 북쪽 산의 한 지점을 가리킨다. 올라가면 바로 성벽을 볼 수 있으니 안내인도 필요 없다고 한다. 뜻밖에 대단한 고구려산성을 만난다.

봉황성은 고구려의 오골성

봉황성은 고구려 때 오골성이라고 불렀다. 봉황산의 최고봉은 찬운봉( 雲峰, 836.4m)이고 오골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찬운봉을 정점으로 오골성 서벽이 뻗어가고, 맞은편 동대정자(東大頂子, 약 800m) 남북으로 동벽이 이어진다. 동대정자가 있는 산은 고구려 성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고려성자산(高麗城子山)이라고 부른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바위 절벽들이 이어지는 험준한 지형이 자연 성을 이루고 있고, 산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는 성을 쌓아 철통같은 방어벽을 형성하였다.

남문 입구에 서 있는
(봉황산 산성)표지판

오골성의 규모는 수 백 개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크다. 최근 현지 전문가들이 측량한 오골성의 둘레는 15,955m로 거의 16㎞에 가깝다. 오골성은 86구간의 돌로 쌓은 성벽과 87구간의 천연장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총 길이는 7,525m이다. 오골성의 천연 절벽은 높이 50m가 넘는 대형만 34구간이나 된다.

오골성은 압록강 이북 경략의 중심

봉황산에 쌓은 오골성은 요동반도 동남부의 교통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 오골성은 서쪽으로 낭낭산성를 비롯한 수암의 여러 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으로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접하며, 동쪽은 압록강 물길 따라 "박작성(泊 城)"을 지나 중 상류에 있는 고구려의 내지로 직통할 수 있다. 명나라 {요동지}에 오골성은 "10만의 무리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산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며 현존 상황도 가장 좋다. 오골성이 위치한 곳은 전쟁이 빈번한 요하 일선과 비교적 멀다. 그러나 고구려 역사에서 한 역할은 매우 뚜렷하다. 645년 당나라 이세적(李世勣)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고, 648년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박작성을 쳐들어가 포위하자 고구려는 장군 고문(高文)을 보내 오골성과 안지성 같은 여러 성의 군사 3만 남짓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 이처럼 오골성이 그 당시에 주위의 크고 작은 성들을 지원하는 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이곳을 압록강 이북의 땅을 경략하는 센터로 삼아 군사를 양성하고 전력을 축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골성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도 중요한 공격 대상으로 등장한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수없이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고혜란이 "오골성 욕살은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그 성의 군수 물자와 양곡을 빼앗아 평양으로 전진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10만 병력과 안시성의 병력이 퇴로를 막고 뒤를 칠까 두려워 오골성을 치지 못하고 결국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간다. 여기서 오골성은 압록강 이북에서는 평양으로 가는 좋은 길목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다.

북한 학자들(채희국, 전준현)은 봉황산성은 곧 환도산성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의 산상왕 13년(209)에 "왕은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이 환도가 바로 봉황산성이라는 것이다. 후에 수도를 현재의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봉황성을 부수도로 삼고 전쟁이 나면 국왕이 직접 이 성으로 나아가 지휘했으며, 관구검이나 모용황이 쳐들어왔던 환도성도 바로 이 봉황성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 "안시성은 옛날 안시홀이다. 혹은 환도성이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에 "임인 8월에 안시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곧 환도성이다"라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환도, 즉 안시성이 한 때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환도.안시는 곧 지금의 봉황성이라는 논리도 추가된다. 봉황성이 안시성이라는 주장은 홍대용의 [담헌서]와 이익의 [성호새설류선]에도 나오지만 230여 년 전 이곳을 지나던 연암은 해박한 역사지식을 이용하여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 이라고 한다.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는데,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하니 무엇을 이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地志)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懸) 동북 70리에 있다고 했으니, 대체로 개평현에서 동쪽으로 수암하(水巖河)까지가 300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2백리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봉황성을 옛 평양이라고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00리란 말과 서로 부합된다." {당서}의 기록 때문에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같은 {당서}에서도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지지]에서 안시성이 개평현 부근에 있다고 봉황성에서 서쪽으로 500리를 가면 안시성이 있으니 봉황성이 안시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오골성의 수수꽃다리(라일락, 丁香花)

'라일락이 아닌가?' 북쪽 성문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며 촬영을 하다 동북 모서리에서 망대를 찍고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성벽을 찍으려다 발견한 꽃이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라일락을 산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봉황산에서 라일락을 볼 때까지는 '라일락은 서양에서 들어온 꽃나무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고구려 산성에서 라일락을 만난 것이다. '수수꽃다리' 이 이쁜 이름이 라일락을 부르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강의 도중 봉황산에 핀 라일락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우리말 꽃이름을 모른다고 했더니 수강생 한 명이 '수수꽃다리'라고 가르쳐주었다. 5월 11일 산기슭 양지인 동쪽 성벽에 핀 수수꽃다리는 여사로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수없이 많은 산을 오르고 고구려 산성을 찾았지만 이곳, 봉황성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 뒤 중국인이 쓴 [오골성고]란 논문에 '오골성 위의 정향화(丁香花)'란 절을 설치하고 특별히 수수꽃다리를 다룬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일대의 라일락은 그 향기가 몇 리씩 흩날린다. 우리가 오골성을 고고조사 할 때 마침 라일락이 만발하는 계절을 만났다. 가슴속에 파고드는 꽃향기는 우리가 조사하는 전 과정을 따라다녔다. 오골성의 라일락은 보통 꽃과 다르다. 이 성과 특별히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오골성 안팎에 이 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라일락은 성벽이 달리는 방향을 따라서 자란 것이다. 성벽이 이어지는 곳을 따라 꽃도 따라 갔다. 그러므로 우리가 숲 속에서 성벽을 찾다가 성의 흔적을 놓치고 방향을 잃었을 때 라일락만 발견하면 곧 또다시 성벽을 찾게 되었다. … 오골성의 라일락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라일락(丁香花)과 사람의 培育????과 직접 관계가 있고, 옛 사람이 어떤 뜻을 가지고 심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른 봄(만주는 5월이 이른봄이다) 필자에게 향기와 감동을 함께 주었던 수수꽃다리는 중국인 발굴자가 극히 이례적으로 학술 논문에 한 절을 할애할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천년 전 고구려의 혼을 간직한 수수꽃다리는 왠지 무엇인가 몰래 간직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려는 것 같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가 본 봉황산성, 희한한 인연

1994년 8월 17일 이른 아침, 필자는 다시 봉황산성을 찾았다. [고구려특별대전]에 쓰일 봉황산성을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고성리에 도착하자 마침 마을 앞에 얘기를 하고 있던 성이 석(石)씨라는 사람이 안내를 자원하고 나섰다. 18살 짜리 석씨의 막내아들까지 합세하여 모두 6명이 등산을 시작하였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가니 역시 많은 사실을 새롭게 들을 수가 있었다. 12시 반에 내려와 식사를 하기 위해 석씨 집에 들어서자 점심 준비를 하고 있던 부인이 금방 나를 알아본다. 바로 작년 왔을 때 길을 가르쳐 준 아주머니였다. 대단한 인연이다. 달걀무침, 오이무침, 가지처럼 주로 농촌에서 나는 것만으로 만든 반찬인데 모두 맘에 들었다

있는 것은 모두 주고 싶어하는 성안의 인심. 석씨집에서의 점심시간

물도 시원한 게 맛있고, 한 보따리 따다 주는 배도 벌써 맛이 들었다. 어제 저녁 찐 강냉이라고 몇 개 주는데 그 맛도 괜찮다. 산에서 털어돈 가래를 한 되박 가져다준다. 하여튼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겠다는 태도이다. 정말 맛있고 즐거운 식사였다. 냇가에 흐르는 시원한 물에서 마음대로 머리를 감고 담궈 놓은 배도 먹고, 오늘은 완전히 소풍날이다. 돈을 50원 주었더니 펄쩍 뛴다. 친구간에 무슨 돈이냐는 것이다. "친구 집에 갈 때는 선물을 사 가지고 가야 하는데, 오늘은 선물을 사오지 못해 대신 하는 것이니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으라"며 간신히 설득. "다음에 올 때는 꼭 우리집에 오면 산도 안내하고 숙식도 제공하겠다, 친구를 보내도 똑같이 대접하겠다" 단단히 이른다. 식사를 마치고 섭섭해하는 부인과 장모를 뒤로하고 장대를 구경하러 갔다. 장대 위에는 옛날 연개소문이 앉았었다는 엉덩이 자국, 말 발자국, 소변이 흘러간 자국 따위가 있는데 대부분 중국사람들은 고구려를 이긴 당나라 장군 설인귀의 자국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석씨는 고구려 장수의 것이라고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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