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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암성을 찾아



 

 

 

 

 

 


백암성의 장대와 아성

5월 6일(목), 아침식사를 하고 돌아오니 8시 5분 전에 짚차는 이미 와 있었다. 화자( 子), 서대요(西大窯)를 지나, 9시에 분구(忿溝)라는 곳을 지나 왼쪽길로 들어섰는데 1미터 쯤 되는 돌에 고려채(高麗寨)라고 쓰인 표지판이 서 있다. 마침 지나가는 마차를 넣고 멋진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오던 길로 조금 돌아 나와 백암성이 있다는 관둔촌으로 향했다. 조금 가니 관둔촌. 멀리 산꼭대기에 안개가 끼어 있어 아련하게 보였지만 산성이 분명하다. 고구려 고성이 이렇게 분명하게 남아있는 곳이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9시 10분 연주성대대라는 산밑 동네에 도착하였다.

운전사는 전에도 와 봤는지 능숙하게 골목길을 따라가더니 차로 산성 위까지 올라가 버린다. 성 입구 바로 밑에 연주성 팻말이 서 있으나 글씨를 얕게 새긴 데다가 페인트가 지워져 연주성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산성 이름도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회손되어 있다. 차가 올라설만큼 허물어진 성벽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산 봉우리에는 아직도 장대가 우뚝 서있고 그 날개를 따라 왼쪽으로 완벽에 가까운 성벽이 그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 간직한채 이어내려오고 있었다. 성벽 위를 걸어 따라 올라가며 세 개의 치성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성벽을 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가장 웅장한 고구려 산성, 백암성

백암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자락 끝에 쌓았기 때문에 동쪽은 높고 서쪽이 낮으며, 남쪽은 태자하라는 강가에 깎아 지른듯한 절벽이 자연성벽을 이루고 있다. 동 서 북 삼면은 잘 다듬은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총 길이가 2500m이며, 성벽의 높이가 5-8m, 너비가 2-3m이다.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약 5m 높이의 장대가 있어 주위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장대 주위에 내성이 쌓여 있는데, 속칭 아성(牙城)이라는 것이다. 백암성은 고구려 양원왕 3년(서기 547년) 가을에 개축했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어, 적어도 이 연대보다 이전에 쌓았다고 할 수 있다. 양원왕 7년(551년) 돌궐이 침입해 오자 왕이 장군 고흘과 군사 1만 명을 보내 적군 1000명을 베고 개선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백암성은 오랜동안 요동지방에서 중요한 요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태종이 처들어왔을 때 당시 성주였던 손벌음이 요동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므로 해서 재 구실을 다 못한 슬픈 역사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산꼭대기 장대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태자하가 보이고 성 주위에는 넓은 벌과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벽쪽에는 산성은 이어진다. 성따라 조금 내려가니 천길만길 낭떠러지가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마을 바로 앞에 보를 막아 더욱 깊은 강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고구려 산성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제외하고도 그 경치만으로도 충분히 찾아볼 만한 곳이었다. 마을로 내려와 태자하에서 배를 타고 성을 관찰하기로 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온 젊은이가 제공한 조그마한 배를 탔다. 앞뒤로 우리 둘을 간신히 앉히고 가운데서 두 개의 노를 능숙하게 저어간다. 상류에 있는 다리까지 거의 가도 봉화대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가니 물 위에 떠있는 바위섬처럼 산의 전모가 나타나고 꼭대기에 성이 보인다. 강쪽에서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는 직벽인데다가 경사가 약간있는 골자기 위에는 성이 쌓여있어 남쪽은 정말 난공불락의 요세다. 돌아오면서 주위의 지명이나 생활 등을 듣고 산성 전체가 보이는 보 가까이까지 가서 사진촬영도 했다. 내리면서 20원을 주었더니 만족해 한다. 젊은이는 농사짓고 고기잡아 얼굴은 검붉게 탔지만 시골사람답지 않게 기동력이 있고 총기가 있어보였다 12시가 조금 못되어 출발, 다음 목적지인 요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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