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요동반도 최남단의 고구려 요새 비사성

1993년 5월 9일(일요일), 오늘은 고구려 비사성이 있는 대흑산을 찾아가는 날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 아무나 갈 수 있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7시 반쯤 역전에 가 운전사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대흑산(大黑山)을 알고 있다. 심양에서 만난 중국 학자가 '대흑산은 군사기지라 갈 수 없다'고 했었는데 다행이다. 가장 싼 빵택시를 120원에 계약하여 7시 50분 출발하였다. 작은 빵택시에는 기사 외에도 운전사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 한 명과 조수 한 명, 두 명인 손님보다 더 많이 타고 떠난다.


수 양제의 제4차 침공과 비사성

614년 가을 7월, 수나라 양제가 네 번째, 즉 마지막 고구려를 침략한다. 내호아가 이끄는 해군(水軍)은 7월 초순 산동반도에 있는 동래를 떠나, 2차 침공 때와 같은 항로인 묘도열도(廟島列島)를 따라 요동반도의 남단인 비사성 앞바다에서 상륙을 개시한다.

비사성의 고구려 군은 연안항로의 해상관문을 엄중히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내호아 군의 상륙 기도를 조기에 포착하고 상륙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소수의 자체 병력만으로는 수나라 해군의 대부대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 군은 해안에서 한 차례 접전한 뒤 바로 비사성으로 퇴각하여 단 하나뿐인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군이 작은 군사로 대군을 막는 전통적인 작전이었다. 한편 수나라는 계속되는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울러 고구려가 외교적 역량을 펴 화의를 요청하자 4차 침공도 아무런 성과 없이 철수하게 되고, 비사성에서 저지된 해군들도 함께 철수하게 된다. 598년 문제가 1차 침공을 한 뒤, 양제는 612년, 613년, 614년 해마다 몸소 참전하였으나 단 1개의 성도 빼앗지 못하고 참담한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수나라 왕조가 건국된 지 불과 40여 년만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당 태종의 침공과 비사성

645년 3월 중순, 500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에 나누어 탄 당나라 수로군 4만여 명은 내주항을 떠나 요동반도 남단으로 항진하였다.

당나라의 수로군은 비사성을 빼앗은 다음 육로군과 합류하여 요동반도의 여러 요새를 빼앗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4월 말 경 당나라 수로군은 비사성을 공격한다. 문헌에 나타난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결국은 공격이나 방어나 모두 서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5월 2일 당시 당나라 수로군은 정예병을 앞 새워 비사성 서문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야간에 기습공격을 받은 고구려 군이 서문을 빼앗기자, 이어서 막강한 후속부대가 밀려들어와 인해전술을 펴므로 해서 성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4면이 절벽인 비사성은 퇴로가 없기 때문에 저항하던 고구려인 생존자 8천 여명은 모두 당나라 군사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막강한 수군도 당 태종이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자 9월 18일 전군이 철군하고 만다.

 

4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

고구려가 막강한 수 당과 전쟁을 할 때 해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산성이었던 비사성이 있는 대흑산은 대대대흑산은 대대흑대 대흑산은 금주에서 7,5㎞ 떨어진 우의향(友誼鄕) 팔리촌(八里村)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금주를 떠나 얼마 가지 않아 구리둔(九里屯)을 지나자 바로 왼쪽에 대흑산명승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큰 산골로 접어들자 다시 안내판이 하나 서있고, 여기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비사성의 유일한 서문이 나온다. 우리는 우 선 산 위로 올라가 전체의 산세를 조망해 보고 나서 서문이 있는 계곡을 가 보기로 하였다. 산자락을 따라 더 들어가니 조양사(朝陽寺)라는 명 청시대의 사찰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산 위를 향해 계속 올라가다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돌로 쌓은 성벽이 나타나고, 성벽을 지나자마자 [대흑산산성]이란 표지판이 서있다. 찻길은 여기서 끝난다. 표지판이 있는 평지에서 뒤편 북쪽에는 금주구에서 가장 높은 해발 663.1m의 대흑산 주봉의 기암절벽 위에는 해군의 레이다시설이 있다. 주위에 보이는 성벽은 모두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새로 쌓은 것인데, 고증을 하지 않아 고구려 축성법과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 오히려 고구려 때의 성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판이 서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50여 미터 쯤 가면 평평한 곳에 네모난 토대가 있는데 이곳이 비사성의 장대이다. 이곳에서 고구려 때의 연꽃무늬 수막새 한 개가 나왔는데 이것은 여기에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장대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100여m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고구려 장대에는 놀러온 중국인 남녀들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가 지휘하던 장대가 중국인 남녀의 놀음터가 되다니.


비디오 찍다 군인이,

차를 타고 통과했던 새로 쌓은 성벽이 비사성의 서쪽 벽이다. 서쪽 벽을 타고 올라가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절경이다. 이곳은 고구려 산성이라는 역사적 유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꼭 와 볼만한 멋진 곳이다.

사진 찍고 비디오 촬영하느라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데 경비를 서고 있던 군인이 오라고 한다. 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도 쉽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비디오를 내놔라" 사태는 상당히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외국인이라 중국말을 몰라 경고문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함께 간 이 박사가 아무리 여러 가지 통사정을 해도 막무가내다. 이곳은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2-3년 전만 해도 들어올 수 없는 출입금지구역인데 최근 관광지로 개방이 되긴 했지만 비디오촬영은 엄격하게 통제된다는 것이다. 비디오를 빼앗기면 지금까지 찍은 것을 다 빼앗기게 되는 것이고, 만일 비디오 촬영기까지 빼앗는다면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최악의 경우 조사하기 위해 부대로 끌려가면 특무(特務, 중국에서는 간첩을 이렇게 부른다)로 몰려 전체 일정에도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난관을 해쳐나가야 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사진을 찍는 것은 괜찮다는 것이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우리를 도운 것은 바로 우리를 태우고 온 운전사의 아내였다. 운전사는 운전만 하지 돈을 받거나 지출 등 운영은 모두 이 여인이 한다. 이 박사가 아무리 사정해도 안되더니 그 여자가 군인을 한 쪽으로 데리고 가 얼마간 이야기하더니 해결을 본 것이다. 현지에서 차를 빌리는 것은 이런 면에서 크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이 여인이 우리를 도와 준 것은 물론 차비를 받아야 한다는 자기 계산이 있겠지만 덕분에 큰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언제 당나라가 지배해 당왕전인가?

장대가 있는 등성을 넘어 동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석고사(石鼓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원래 당왕전(唐王殿)이었다.

수 당나라 때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고구려 때는 당나라 왕을 모시는 당왕전을 짓지 않았을 터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발해 금나라 청나라 같은 백두산족과 요나라 원나라 같은 북방 유목민족이 여기를 지배했기 때문에 당나라 왕을 모셨을 가능성을 희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승수사(勝水寺), 조양사, 향수관(響水觀) 같은 사찰처럼 명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현재 주위의 모든 건물은 명 청 때의 건축물들이다. 당왕전 앞에 1934년에 세운 석고사중수비(重修石鼓寺碑)가 있다고 해서 자세하게 관찰해 보려고 했는데 마침 일요일이라 그런지 석고사의 문이 닫혀 있어 관람할 수 없었다.


당 태종은 비사성에 온 적이 없다.

산에서 내려와 서문이 있는 계곡으로 갔다. 관문채(關門寨) 입구에 성문을 새로 쌓았는데, 이것도 거의 고증을 안하고 그저 담만 쌓아 관광지로 급조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냄새 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당나라의 승리를 기리는 당왕전이나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만든 복제품 성들만 본 것이지 진짜 고구려 성은 보지 못한 것이다. 서문에서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들어가면 심산유곡에 삼림이 무성하고 산세가 험해 그야말로 절경을 이룬다. 100여 미터 절벽 위가 바로 아까 위에서 내려다보던 장대인 것이다. 좀더 들어가면 당태종이 물을 마셨다는 적수호(滴水壺)가 있고,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만(飮馬灣)이 나온다. 적수호와 음마만에서 북쪽 절벽을 바라보면 걸어서 정상에 오르는 길이 있다. 찻길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 길이 정상으로 오르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길은 가파르고 구불구불한데 이곳을 올라서면 바로 당나라 왕이 병을 치료하고 군사를 지휘했다는 당왕전, 즉 석고사이다. 여기서 당 태종이 물을 마셨느니 설인귀가 말에게 물을 먹였느니 하는 것은 모두가 중국인들이 만들어 낸 황당한 전설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직접 참여하고 지휘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군을 끌고 온 일이 없고, 육군을 끌고 비사성에 온 적도 없다. 이 사실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와! 진짜 고구려 성벽이다

서문을 나와 차를 타고 아스팔트길로 들어서 계곡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 때 계곡으로 들어갈 때 잠깐 보았던 오른쪽 산이 생각났다.

"잠깐 차를 세우세요" 차를 세우고 길 건너(강변 건너) 산을 자세히 보니 숲 사이로 무엇인가 예사롭지 않은 흔적이 길게 나 있다. "저것이 혹시 고구려의 성벽이 아닐까" 제법 널따란 강변을 가로질러 산기슭에서 뛰어가듯 위로 올라붙었다. 소나무가 울창해 바로 머리 위도 보이지 않지만 끙끙대며 올라붙었다. "고구려 산성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고구려 사람들이 쌓은 산성이다." 백암성처럼 웅장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현지에서 나는 돌로 잘 쌓은 성벽이 윗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자리를 옮겨 앵글을 맞추며 건너 산을 보니 거기에도 험한 산허리를 감싸고도는 옛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진짜 고구려 성을 본 것이다. 산성을 따라 산봉우리에 올라가 보았더니 그 산보다 몇 배나 더 높은 꼭대기까지 성이 이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뜻밖에 엄청난 규모의 성터를 보고 감개가 컸다. 지금 비사성 평면도를 보니 필자가 올라섰던 곳이 바로 서남 모퉁이었다. 거기서 621.5m 고지까지 이어진 성벽을 따라 올라가다가 중간쯤 하산하는 길이 있어 그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시내로 돌아오자 빵택시의 여자사장은 원래 정했던 가격의 3분의 1을 더해 180원을 내란다. 군인한테 걸렸을 때 해결해 준 값에다 외국인이란 점을 계산한 것이다.

- 계속 -

서울 마포구 동교동 184-24 호평빌딩 3층 TEL: 02-337-1661,2 FAX:02-337-1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