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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 - 심양의 석대자산성


심양의 고구려산성, 관광지 명물로 등장

1998년 9월 1일, 9시 50분에 서울을 출발한 대한항공은 10시 30분 중국 심양의 도선(桃仙)공항에 착륙한다. 마중 나온 정의파 선생과 함께 심양 시내로 들어와 마로만(馬露灣)에서 휘산관광지(輝山旅游區)로 가는 330번 마이크로버스를 탔다. 가을의 초입인 9월임에도 30도가 넘는 이상 폭염은 여기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기가 기반산댐(棋盤山水庫)입니다" 심양을 떠나 1시간쯤 가자 넓고 시원한 호수가 나타난다. 최근의 중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관광지 개발붐이 일어나면서 심양에서 가까운 이곳은 갑자기 호텔, 연수원 등이 들어서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까지 등장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고구려산성을 찾아 온 것이다.

[7월 16일 심양시장은 1500년 전 고구려 산성 유적을 8월 12일부터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개방한다고 선포하였다]. [시정부와 유관기관의 지시에 따라 남문, 치성, 146미터의 성벽을 복원하여 공개한다]. [발굴한 곳에 전시실을 건립하여 출토된 500여 점의 문물을 전시한다]. 7월 20일자 중국 신문에 난 기사의 내용이다. 필자는 이 기사를 보고 마음이 벌써부터 이곳에 와 있었다. 중국이 고구려산성을 발굴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것을 국내외에 공식적으로 개방한다는 것도 처음 듣는 뉴스이기 때문에 2학기 개강을 하였지만 보강계획서를 내고 2박3일 일정으로 달려온 것이다. 한 일간지의 취재의뢰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저기 동북쪽 호수 가에 산성이 보입니다" 1991년 이미 이곳을 자전거 타고 와 답사했다는 정의파 선생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멀리 새로 복원한 성벽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나지막하게 뻗어 나온 산 위에 분명하게 드리워진 고구려산성은 이제 이곳에 명소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

 

새로 복원한 고구려 성

시간은 이미 1시가 넘었지만 우리에겐 점심식사가 문제가 아니다. 5분만 올라가면 바로 남문에 도착한다. 새로 복원한 남문 앞에는 대리석에 초록 글자로 고구려산성이 설명되어 있다. 아직 페인트가 다 마르지도 않은 듯 선명하다.

 

고구려산성 복원

8호 치성부터 벼랑이 있는 곳까지 산성을 본떠 만들었다. 길이는 약 140여 미터이고 관계 자료를 참조하여 건조하였다. 문 밑 하수도는 (고구려) 당시의 유물이다.

 

이 석대자산성이 발견된 것은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된다. 1993년 시굴에 대한 보고서가 나오면서부터 학자들간에는 이미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고구려산성을 다시 완전히 발굴하고 복원하게 된 것은 심양 시장의 강력한 지시 때문이라고 한다. 시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1997년 5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고, 1년 3개월 정도 작업을 마치고 8월 12일 서둘러 국내외에 개방한 것이다.

 

완벽한 수리시설

사실 출발할 때 성벽을 재현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불안했다. 혹시 고구려 성벽을 복원한다면서 옛날 흔적마저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벽의 재현은 상당히 신경을 써서 했다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선 성벽이 잘 남아있는 서북벽은 그대로 보존하고 파괴가 심한 남문 주위를 복원하였으며, 남문 주위에 있는 두 군데의 수리시설을 찾아내 원상을 최대한 살리면서 복원했다는 점 등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바로 문턱 아래 배수구가 있는 시설은 필자도 처음 보았다. 물론 이런 시설은 대부분 땅속 깊이 파묻혀 있어 특별히 발굴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겠지만 필자가 만주에서 찾아다닌 103개의 산성이나 북한에서 나온 유적유물도감 등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것이었다. 새로 복원한 146m의 성벽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고구려 성벽의 특징인 쐐기형 돌을 만들어 쌓았다던가 새로 출토된 돌쩌귀를 만들어 문을 복원한 점 등은 성을 고대 성곽을 연구하는 사람도 한 번쯤 가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성가퀴 같이 고증이 어려운 부분은 어색한 점이 많았다.

 

성벽을 모두 파내는 최초의 전면발굴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도 성벽을 돌아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복원한 146m 북쪽으로 성벽을 발굴한 모습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발굴은 마치 군사용 굴을 파나가듯이 했다. 원래 땅 위는 성벽이 완전히 무너진 뒤 흙이 뒤덮여 마치 토성처럼 보였다. 그러한 토성을 파내려 가자 고구려의 완벽한 석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구려 석성을 보는 필자는 마음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이런 작업을 해 준 심양시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것이 어느 나라이건 어느 기관이건 상관이 없다. 땅 속에 1500년간 묻혀 있던 고구려 산성을 파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산성을 발굴한다고 하면 성문이나 성벽의 일부를 발굴한다던가, 성안의 집터를 발굴하는 정도가 보통이다. 산성은 원체 크고 넓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도 많이 들어 성벽 전체를 발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석대자산성처럼 석벽들이 완전히 땅속에 묻혀있고 표면에는 토성처럼 흙이 덮여 있는 산성은 마치 땅에서 캐내듯이 모두 파내야 하기 때문에 엄두도 못내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 산성을 시장의 지시로 파낸 것이다. 이러한 발굴은 경제성장과 함께 관광지 개발이라는 명분과 맞물려 가능한 것이지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위 고구려 방어의 최초. 최대의 치성, 아래 고구려 지도릿돌

 

고구려 방어의 최초 최대의 발명품 치성(雉城)

발굴해 낸 성벽의 높이는 1.5∼2m 정도로 계속 이어지다가 60여 미터 간격으로 치성이 나타난다. 성벽를 쌓는 모양이 고구려의 축성법 그대로일 뿐 아니라 고구려가 가장 먼저 발명하였고, 또 고구려 방어시설 가운데 최대의 발명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치성의 존재는 이 성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치성이란 성벽에 굴곡이 없이 직선으로 쌓으면 약점이 된다. 따라서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전투를 할 때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네모꼴 또는 반원형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러한 치성은 고구려 성에 가끔 나타나지만 석대자산성처럼 10개가 모두 발견되어 그 전모를 알 수 있는 곳은 처음이다. 치성의 규모는 가로와 새로의 길이가 대부분 9∼10m로 바른네모꼴에 가깝다. 석대자산성의 치성 가운데 한 가지 특징을 든다면 바로 문 옆의 치성을 이용하여 마치 옹성과 같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문 왼쪽에 있는 치성은 바로 문 옆에 붙어 있어 북문으로 쳐들어오는 군사를 옆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해 오녀산성이나 환도산성에서 ㄱ자나 ㄷ자로 쌓은 성문과 같은 성능을 갖게 했다는 점이다.

 

중국 최초의 문지도리

석대자산성의 발굴 가운데 또 하나의 업적은 북문을 완전히 발굴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 양쪽에는 특이한 지도릿돌(樞石)이 두 개 남아있어 이채롭다. 지도릿돌에는 두 개의 네모난 구멍이 파져 있는데 하나는 문기둥을 세우는 곳이고 하나는 문을 다는 지도리(돌쩌귀)를 박은 곳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만들었다는 이 문지도리가 쇠로 만든 것이고, 중국 발굴사에서 최초라는 것이 중국 신문 기사의 내용이다. 필자도 쇠로 만든 고구려의 문지도리는 처음 보는 것이다. 석대자산성에서 나온 지도릿돌은 네모난 구멍의 깊이가 얕고 닳은 흔적이 전혀 없다. 그 대신 주변에 쇠의 녹이 붉게 물들어 있다. 바로 이 얕은 구멍에다 쇠로 만든 지도리를 설치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인데 이러한 쇠문지도리는 아주 발전된 모양인 것이다. 비록 성문은 불타 없어졌지만 1500년간 땅 속에 묻혔다가 튀어나와 고구려인들의 우수한 철기 사용 기술을 끝까지 전하는 전령처럼 오뚝하게 서있는 지도릿돌을 보는 필자의 가슴에는 기쁨과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문에는 또 한가지, 불로 공격한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당나라가 요동성을 수없이 공격하다 고구려인들의 결사항쟁 때문에 실해했으나 끝내는 불공격(火攻)으로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에도 성문에 엄청난 화공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 뚜렷하다.

 

옮겨버린 유물들

발굴은 북문 근방에서 그치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길 따라 조금 들어가니 바로 발굴했던 장소가 나오고, 바로 그 옆에 유물을 전시한 전시관이 나온다. 유물 전시관은 자물쇠가 굳게 잠겨져 있다. 사람을 찾았더니 윗통을 벗고 정신없이 자고 있던 한 청년이 귀찮은 듯이 일어난다. "유물들은 모두 가져가 버렸습니다." 시장이 약속한대로 전시관을 짓고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되어 유물을 철수해 버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 500 여 가지 유물을 전시한다고 해서 정말 큰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필자는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져갔는가? 어디다 연락하면 알 수 있는가? 아무리 물어봐도 젊은 청년은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처음에는 입장료를 25원씩 받다가 관람객이 없어 10원으로 내렸는데, 그래도 관람객이 없자 5원으로 내렸다." 정의파 선생이 그 청년과 얘기하여 찾아낸 답이다. 심양시에서는 엄청난 예산을 투자해 산성을 복원했기 때문에, 개방을 하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수익사업이 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사실 산성 안에 유물 전시장을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관람객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보름 동안의 결과를 본 당국에서는 입장료를 파격적으로 내리고 아울러 유물은 철수하도록 조치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가보기 쉬운 고구려 산성

심양으로 돌아와서 다음 날 오전 내내 각 기관을 돌아다니며 옮긴 유물을 볼 수 있는지, 혹은 사진이라고 찍을 수 있는지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유물만 찍어오면 대서특필하기로 국내 모 일간지와 약속을 하고 왔기 때문에 심양시 관광당국으로서는 대단히 좋은 기회인데 이런 것은 관심 밖이다. 시장이 관광진흥을 위해 지시하고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복원한 관광상품이지만 정작 이것을 알려야 할 관리들은 귀찮은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양에 가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석대자산성을 가보도록 권하고 싶다. 그것이 많은 돈을 들여 발굴하고 복원한 심양시에 대한 우리의 인사이고, 또 가장 쉽게 고구려의 유적을 접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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