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발표자료 (고구려발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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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공정의 고구려 옛 땅 민족사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김위현-
동북공정의 고구려 옛 땅 민족사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

김 위 현(명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1. 중국과 한국 서로 관계되는 성의 씨족 원류를 논함(요령대학 왕아헌)

중국이나 한국 어느 쪽에서도 양국의 관계되는 성씨원류를 논한 글은 없다. 다만 자국의 성씨에 관한 글은 몇 편이 있을 뿐이다. 참고로 나열하면

羅香林, 『中國族譜硏究』, 中國學社, 1971.
常建華, 『宗族志』, 『中華文化通志』, 上海人民出版社.
徐俊元外, 『中國人的姓氏』, 香港, 南奧出版社, 1987.
衛聚賢, 『姓氏的起源』, 臺北, 1985.
歐陽宗書, 『宗譜家譜』, 北京, 新華出版社, 1992.
來新夏外, 『中國的年譜與家譜』, 臺灣商務印書館, 1994.

등의 전문서가 있고 논문으로는

張澤成, 「譜牒與門閥士族」, 『中國史論集』, 天津古籍出版社, 1994.
常建華 「中國族譜收藏與硏究槪況簡說」, 『譜牒學硏究』1, 1989.

등이 있고 직접 한국의 씨성을 다루거나 비교연구한 논문이 몇 편 있다.

陳捷先, 「族譜資料與韓國關係硏究」, 『韓國學報』6, 中華民國韓國硏究學會, 1986.
   〃  , 「中韓族譜比較硏究」, 『中日韓文化關係演討會』, 中央硏究院.
壽春山人, 「朝鮮姓氏淵源考」, 『民族文化論叢』1,2, 1981.

우리나라에서 연구된 책으로는

金斗憲, 『朝鮮族譜の硏究』, 1937.
朴玉杰, 『高麗時代의 歸化人硏究』, 國學資料院, 1996.
윤창현, 『조선씨족통보』, 대창서원,  1924.
李樹健,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출판부, 2003.

또 논문으로는

金九鎭, 「朝鮮初期에 韓民族으로 동화된 土着女眞」, 『白山學報』58.
김명진, 「韓國姓氏의 由來」, 『국립중앙도서관』, 1974.
金渭顯, 「麗元間의 人的交流考」, 『關東史學』6, 1994.
宋俊浩, 「族譜를 통해 본 韓․中 양국의 전통사회」, 『李丙燾博士九旬紀念論叢』, 1987.
黃雲龍, 「歸化姓氏始祖東來說」, 『부산여대사학』10,11, 1993.

등등이 있으며 日本人들의 연구로는 주로 한국의 족보와 종보에 많은 관심을 보인 글이 몇 편 있을 뿐이다. 미국인으로는 E.W. Wagner가 우리 족보에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왔다. 그리고 이십여년 전에 성씨에 대한 붐이 일어나서 창조사에서 『한국성씨대관』(1971)이, 중앙일보사에서 『성씨의 고향』(1989), 예빈사에서 『자랑스런 나의 족보』(1997)가 나와서 새로운 족보찾기 운동인 듯 비쳤다.
이 글의 논점은 ① 한국 274개의 씨성 중에서 중국과 족원관계가 있는 성을 찾는다. ② 중국과 관련 있는 성씨의 본관 분포지역, 인구수, 진화, 역사에 영향을 연구. ③ 한국으로 이동전의 중국에서 득성, 명망가 갈래 분포 인구수가 역사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여 민족적으로 하나로 묶겠다는 것이다.

대처방안
① 274개 씨성중 약 40개 씨성이 족원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나 이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기자동래시 왔던 8성은 가신성이 없고 송대의 귀화인, 거란, 여진귀화인이 있으나 이때는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고려의 외국인 수용법에 따라서 선별수용 하였다(본인의 「고려의 송․요․금인 투귀자 수용책」에 있음). 그리고 원대는 원공주와 고려왕의 결혼으로 일부가 들어왔고, 명 만력 때 임란참전병사 중 일부가 있을 뿐이여서 그 연관성은 미미하다 하겠다. ② 그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토착 한국인과 혼인을 통하여 이미 한화(韓化)가 이루어져서 혈통상, 문화상 동화가 된 상태이다. ③ 실제 54개 씨성인데 이들이 풍속, 습관, 언어 등 어느것 하나 중국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한중역사를 하나로 귀착시키려는 시도는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2. 역대 왕조의 동복변방통치 연구(요령대학 서덕원 등)

여기에 대한 논문은 주로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이 지역에 관계했던 나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이미 송대에 《통전》 등 여러 서책이 청대에도 《만주원류고》 등 여러 책이 나왔으며 특히 일제때 《만선지리역사 보고서》 등 많은 연구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복이후 독립운동사나 만주이주사, 국경문제 등에 관심을 둔 단편적인 논문은 많이 나왔다. 중국도 처음은 지방사연구로 시작하여 지금은 중원역사에 예속시키는 작업으로 일관하여 자기들 나름대로의 완성단계에 와있다. 중국인들이 무엇을 왜곡하려 하는가? 이 논문에서만 해도
1) 위진남북조, 요, 금이 대체로 중원왕조에 예속되었다.
2) 기왕 연구는 중원역사상의 왕조교체와 변천에 발맞추어 천명하지 못했는데 반드시 중원왕조를 경(經)으로 동북은 위(緯)로 새로운 체계로의 연구를 필요로 한다.
3) 조선반도국가인 백제, 신라가 조금씩 북진하여 중당때에는 대동강을 경계로 형성하였다.
5) 광서 때 중․조가 도문강을 변계로 하는 회합에 이씨조선이… 보기 드문 속임수로 마감하였다.
6) 목극등이 세우고자 한 심시비(審視碑)는 몰래 장백산 주봉 동남부근 지방에 옮겼다. …변강영토를 편취한 것을 폭로한다.
이에 대한 대책은 사실을 그대로 대응해도 충분하다.
1) 남북조 때 북조는 오호가 세운 국가로 화북에서 남조와 적대시하며 세력을 떨쳤고, 요는 남쪽 송과 전연맹약을 맺어 형식상으로나마 대등평등한 입장을 유지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위에 있었으며 금은 남송고종을 책봉하고 고종은 금에게 봉표칭신(奉表稱臣)하여 왔다. 무엇이 무엇에 예속이라 하겠는가(송사, 금사 참조)
2) 세력의 중심국가가 경이 되어야 하는데 무엇을 가지고 경위를 논하는가?
3) 고구려, 발해를 자국사로 만들려니 자연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어떻게 고구려․발해가 중국사인가 만약 중국사였다면 어떻게 역사편찬도 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국사기》〈고려본기〉를 참고해 주기 바랄 뿐이다.
4) 도문강을 경계로 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데 어찌 속임수라 할까?
5) 「定界碑」는 무엇이고 「審視碑」는 무엇인가. 목극등에게 국계를 정하라고 했지 살펴보고 오라고만 했는가는 양국의 실록이 증명할 것이다.


                        3. 동북 한족인구사 연구과제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인구통계가 명확히 기재된 사서는 적은 것으로 안다. 이 방면에 간접적인 논문도 도엽암길(稻葉岩吉)의 《만주발달사》, 김육불의 《동북통사》, 동동의 《중국동북사》 정도이고 일제 만주국 때 조사보고서가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논문에서 그의 주장은

1) 한족과 소수민족과 융합되는 역사규율을 찾는다.
2) 동북지구 한족은 토박이다.
3) 동북지구 한족인구는 증축이 되어왔지만 제일 대족일 때도 있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1) 동북에서의 한족인구도 시대에 따라 증감이 있었는데 언어, 습관, 산업 등 문화가 많이 달랐음으로 쉽게 융합되지 않았는데 역사규율이란 있을 수 있었겠는가?
2) 한 곳에 얼마나 오래 살아야 토박이라 하는가. 이론이 있어야 한다.
3) 한족은 영원히 한족으로 계속 존재하고 다른, 이른바 소수민족은 쉽게 동화되거나 소멸되는가?


                      4. 중국동북 고민족발전사(이덕산)

이 제목과 꼭 같은 저서는 없다. 다만 정체를 다루는 가운데 언급한 저서는 더러 있다. 즉 김육불의 《동북통사》, 능순성의 《송화강하류 혁철족》이 유일하며 우리나라 학자로는 상고사 중세사를 쓰면서 언급한 저서가 많이 나왔다. 이들 주장 중 주요문제는

1) 동북고민족 연구에 대량의 위배사실을 연구하였다는 것이다. 고조선 - 예맥 - 부여 - 고구려 - 발해로 일맥상전하는 조선고대국가로 여기는 것이 위배사실연구라는 것이다. 조선학자들은 「주체사관론」, 「남북국시대론」, 한국학자들의 「국사중심론」을 예로 들고 대표인물을 실명거론 하였다.
2) 동북 사대족계(華夏 - 韓族系, 肅愼系, 濊貊系, 東胡系)로 구분하였는데 부여나 고구려는 여기에서 제외시켰다.
3) 중화민족의식. 중화민족응취력은 동북지구 각 민족에게 증강시킨다.

여기에 대한 견해

1) 소위 동삼성의 4대 족계라면서 한족, 숙신, 예맥, 동호로 기술하였다. 그러면 부여나 고구려는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는가.
2) 동북과 중화민족 관계가 무엇인가? 부여와 고구려에 대한 용어는 가능하면 쓰지 않으려는 의도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의도적일 것이다.
3) 민족과 국가를 구분 못하는 논리이다. 민족이나 씨성은 문화적 요소이고 국가는 정치적 요소이다.


                               5. 흑룡강통사(步平)

이것은 지방사에 속하므로 이것을 책 이름이나 논문이름으로 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 필자가 소개했듯이 《흑룡강사고》가 유일하였던 듯하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꽉 찍어서 흑룡강…해서 쓴 책은 없고 다만 요금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더러 언급된 것은 있다. 이 저서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1) 흑룡강성은 일찍이 북대황(北大荒)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2) 흑룡강지구에는 서로 시대가 다른 유지와 유물이 발해문화와 금원문화를 형성하였다.
3) 흑룡강은 황하, 장강(양자강) 유역과 같이 중화민족 문명의 요람의 하나이다…흑룡강 각 종족의 선민들은 조국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일으키는데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
4) 우리들은 남하한 동북민족이 중화민족의 주요 성원(成員)이라 인정되며 한족과 같이 중화문명의 공동창조자이지 파괴자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장일 뿐

1) 누가 흑룡강성을 북대황이라 했던가. 이것은 산해경(山海經)에서나 하는 말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의 찬란한 문화가 그 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것은 일반의 오인을 불식시키는 것이니 필자의 착오이다.
2)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어디로 가고 발해와 금원인가.
3) 흑룡강, 황하, 장강은 지금 중국영토 내에 있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적다. 어찌 같이 묶으려 하는 것인가.
4) 정복왕조가 모두 창조자 역할을 한 것이 아니다. 요는 한족문화를 거부하였고 금은 함익하였었고, 원은 장점만 취하였고, 청은 한술 더 떠서 진일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지역연구는 사료의 결핍, 고고자료의 부족 등으로 앞으로 더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논법으로 새로운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역사는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빼앗아지는 것도 아니고, 왜곡을 해도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는 법이다.
한 시대가 지나면 새 왕조가 전조의 역사를 바로 편찬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고구려사는 중국인이 편찬한 것이 아니라 고려 때 《삼국사기》에 〈고구려본기〉로 엄연히 편찬되어 있음을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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