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발표자료 (고구려발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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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 高麗 국호의 소릿값(音價)에 관한 연구-2007춘계학술발표논문-서길수-
2007년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

주제명: 고구려의 起源과 族源에 관한 제문제
일  시: 2007년 5월 3~4일(목, 금요일)
장  소: 경성대학교 누리관 이미지홀
주  최 : 고구려연구회·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1.   ‘高句麗’ ‘高麗’ 국호의 소릿값(音價)에 관한 연구
     發表 : 서길수 (서경대)  討論 : 김위현 (명지대)

Ⅰ. 머리말
Ⅱ. 국호변천 과정
Ⅲ.  高句麗와 高麗의 소릿값(音價)
Ⅴ. 맺는말

‘高句麗’ ‘高麗’ 국호의 소릿값(音價)에 관한 연구

서길수(서경대)
<목 차>  Ⅰ. 머리말
Ⅱ. 국호변천 과정
Ⅲ.  高句麗와 高麗의 소릿값(音價)
Ⅴ. 맺는말

Ⅰ. 머리말

* 잘 못 읽기 쉬운 한자
車馬 : (O)거마 (X)차마 / 句讀 : (O)구두 (X)구독 / 龜鑑 : (O)귀감 (X)구감 / 遊說 : (O)유세 (X)유설 / 惡寒 : (O)오한 (X)악한

* 역사에서 잘 못 읽기 쉬운 한자
契丹 : (O)거란 (X)계단
樂浪 : (O)낙랑 (X)악랑
玄菟 : (O)현도 (X)현토
回紇 회흘,
朝見 : () 조현 () 조견
契 : 欺訖翻 又音喫; 契丹 上欺訖切 下 並同
靺鞨 : 音末曷;  上莫撥 下何葛切 狄種 上莫撥 下胡葛切 蕃人出北土
厥 : 九勿翻  突厥 下九勿切
濊 : 呼會切
조현 朝見


이두사전

Ⅱ. 高句麗가 나라이름을  高麗로 바꾼 시기
  
高句麗의 나라이름을 高麗라고도 불렀다는 것은 이미 많이 논의되었다. 그러지만 아직도 高句麗는 추모(주몽)가 삼국시대(BC 37년 ~ AD668년) 세운 나라이고, 高麗는 왕건(王建)이 세운 왕조(918∼1392)라고 아는 사람이 많으며, 어떤 사람은 “高麗는 高句麗에서 ‘句’자를 빼고 줄여서 부른 이름이다”고 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에 이 점을 더 분명하게 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高句麗 때 이미 高麗라는 국호를 썼고, 나중에 高麗(918∼1392)는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高句麗가 나라이름을 高麗로 바꾸었느냐 하는 시기의 문제이다.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高句麗와 高麗를 읽는 소릿값의 문제이지만 高句麗가 두 가지 나라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소릿값 읽는 법도 이 두 가지 나라이름에 함께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1. 한국 학자들의 高句麗 나라이름 바꾼 시기 문제 논의

高句麗를 高麗로 바꾼 시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우선 전체적으로 내용을 정리해 보고 필자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1) 이병도의 ‘수ㆍ당(581~) 이후 高麗’ 설

이병도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는 高句驪를 高句麗로 쓰고, 수ㆍ당대부터는 高麗라 줄여서 불렀다”고 주장하였다.

中國에서도 三國時代로부터는 ‘高句驪’를 대개 ‘高句麗’로 書하고, 隋唐代로부터는 「高麗」라 略稱하여 지금까지도 韓國人은 一般的으로 Kauli 라고 부르고 있다.

수나라가 건립이 581년이기 때문에 6세기 후반부터 高麗고 불렀다고 보았다. 여기서 수ㆍ당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구분을 하기 위한 깊이 있는 연구 결과라기보다는 수서와 당서에 高麗라고 나오는 것을 가지고 간단하게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정구복의 ‘장수왕 10년대’ 설

1991년 정구복의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표된 이 방면의 논문 가운데 가장 자세하고 치밀한 분석을 한 수작이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중심으로 논문을 전개하고 있지만 삼국사기가 인용하였던 원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대조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분석 결과는 명확한 년도를 유보하고 대체적인 시기만 제시하는 소극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高麗’라는 국호가 중국 문헌에 나타난 것 중 확실한 시기는 장수왕 8년 이후 11년과 23년(435)이지만 국호의 개칭 시기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대체로 장수왕 10년대에 국호의 개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광개토대왕 시기로  올려 잡을 수 있는 개연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정구복은 高麗가 가장 일찍 기록된 것은 위서(魏書)와 송서(宋書)이기 때문에 이 두 사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먼저 위서를 분석하여 두 가지 기록을 가지고 접근한다.

① 산동 6주의 백성과 관리 및 도하와 高麗 오랑캐 36만, 각종 장색, 공인 10만여 명을 옮겨 서울의 인구를 채웠다(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伎巧十萬餘口,以充京師)
② 태원 원년 6월 병오, 고려와 선선(敾善)이 함께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太延 元年 六月 丙午 高麗敾善國竝遣使朝貢).

①은 위서에서 가장 먼저 高麗가 기록된 것으로 광개토태왕 8년인 398년이다. 정구복은 이 기록의 高麗 사용을 믿기 어렵다고 하였고, ②는 장수왕 23년(435)의 기사로 이 뒤부터는 거의 매년 본기에서 高麗 기사를 쓰고 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검토한 송서(宋書)에서는 다음 두 가지 자료를 선택하였다.

① 영초 원년(420) 7월 갑진, 정동장군 高句驪王 고련(高璉)을 정동대장군으로 호를 높여주었다(永初元年七月 甲辰 征東將軍高句驪王高璉 進號征東大將軍)
② 경평 원년(423) 3월 그 달 高麗國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景平元年三月 是月高麗國遣使朝貢)  

이 두 자료에서 420년에 高句驪 왕으로 썼으나 3년 뒤 高麗國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 사이에 나라이름이 바뀌었다는 심증을 가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평 원년은 423년으로 장수왕 11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혹 남송 대에 보궐(補闕)한 결과가 아닐는지도 모르므로 확실하다고 하기 어렵다.”고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사신 왕래 기록에도 본기에서는 모두 高麗를 썼기 때문에 ‘장수왕 10년대’라던가 ‘장수왕 연간’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썼다. 아울러 위서의 자료 ①번을 믿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광개토대왕 대의 국호 개칭 문제는 다른 자료가 더 나올 때까지 보류하여 둔다.”고 한다거나 “이를 광개토대왕 시기로  올려 잡을 수 있는 개연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여, 모든 개연성을 열어두었다.    

한편 高句麗가 국호를 고친 배경과 평양 천도와의 관계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국호의 개칭은 혹 장수왕 15년의 평양 천도와 관련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으며, 고구려의 대외적 문화적 발전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고구려에서의 국호 개칭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개칭의 배경을 신라와 백제의 경우를 통하여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 국호를 처음으로 정할 때에는 전통적으로 음을 비교적 그대로 표기하였으나 후일에 뜻이 좋은 한자로 바꾸는 경향을 신라와 백제의 경우에 생각할 수 있다. 즉, 백제의 경우 ‘佰濟’에서 ‘百濟’로, 신라의 경우 ‘徐羅伐’에서 ‘新羅’로, 바뀐 것은 이러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 광개토대왕 이후의 비약적인 발전과 한문화의 성숙된 이해 그리고 평양으로 천도함을 계기로 고구려에서 한자적인 의미가 없는 ‘句’자를 생략시켜 ‘高麗’라는 국호로 개칭함으로써 한자의 일반적 의미로 풀어도 좋은 의미를 갖는 국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중국 학자들의 高句麗 나라이름 바꾼 시기 문제 논의

1) 김육불(金毓黻) : ‘560년(평원왕 2년)’설

김육불은 560년 북제(北齊) 때 高句麗 왕 양(陽)을 ‘高麗王’으로 봉하면서 처음 구자를 빼고 驪자를 麗자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하나는 高句麗를 高麗로 바꿔 부른 것이다. 高句驪를 句麗로 줄여서 부른 것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의 왕은 일찍이 高句麗 왕이라고 자칭했고, 나중에 위나라 효문제 태화 16년에 고련(광개토왕 담덕의 아들)을 高句麗王으로 책봉했으며, 북제의 폐제가 그들의 왕 陽을 高麗王으로 책봉할 때 句자를 없애기 시작했고, 또 驪를 麗로 고쳤다
一曰高句驪之易稱高麗. 按高句驪本簡稱句麗,始於漢代,其王嘗自稱高句驪王,後魏孝文帝太和十六年亦封高璉(即廣開土王談德之子)爲高句驪王,至北齊廢帝封其王陽爲高麗王始去句字,又改驪作麗

이것은 중국 학자들 가운데서 “高麗”가 출현된 시간에 대해 제일 먼저 논술한 것이다. 그런데 김육불이 북위의 효문제 16년(492년)에 장수왕에게 ‘高句驪王’을 봉했다는 것은 큰 착오이다. 장수왕 고련(高璉)은 이미 491년 세상을 떴고 문자왕이 들어섰는데 어떻게 장수왕을 봉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북위 효문제 16년의 기록에는 장수왕이 죽고 손자 운(雲)이 이어받았다는 기록만 있지 책봉한 기사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 북위의 정사에서는 모두 나라이름을 高麗라고 썼고 열전에서만 高句驪를 썼는데 정사의 기록을 버리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열전의 기록만 택한 것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보다 68년이나 늦은 560년의 기록을 가지고 나라이름을 바꾼 해로 보는 견해는 성립할 수가 없다. 김육불은 중국 학자 가운데 처음으로 高句麗의 나라이름이 高麗로 바뀐 시기를 논하였다는 의의는 있지만 그 내용은 깊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이전복(李殿福) : 520년(안장왕 2년) 설

高句麗 안장왕 때 양무제로부터 高麗王으로 책봉을 받으면서 처음 高麗國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논문은 1992년에 쓴 것인데 2000년 고구려연구회에서 주최한 중원고구려비 신석문 국제 워크샵에서도 똑 같은 주장을 하였다. 이전복은 중원왕조가 高句麗를 책봉하면서 내린 봉호(封號)를 장수왕 때부터 보장왕 때까지 표를 만들어 그 가운데 가장 먼저 高麗王으로 봉한 기사를 골라 그 해를 기점으로 삼았다.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양 무제가 보통(普通) 원년(520년) 2월 계축에 안장왕을 ‘영동장군고려왕(寧東將軍高麗王)’으로 책봉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句)자를 없애고 驪를 麗로 고쳤다.
高句驪王中原王朝冊封王號 年代出典備注長壽王
高璉
北魏
世祖遣員外散騎侍郞將, 遼東郡開國公,高句驪王長壽王二十二年北魏世祖太延元年(公元435년)《魏書》卷一百《列傳》八八《高句驪》高句驪王宋孝武 皇帝孝武七年에 조서를 내려 봉하기를 使持節散騎常侍督平、營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驪王。이라 함長壽王五十一年宋孝武大明七年(公元 463年)《宋書》卷九十《夷蠻傳․高句驪國》高句驪王北魏
孝文帝)東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驪王。長壽王七十九年北魏孝文帝太和十五年(公元491年《魏書》卷一百《列傳》八八《高句驪》高句驪王文咨王
高雲北魏
孝文帝遣大鴻臚拜璉孫雲爲使持節都督遼海諸軍、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驪王。文咨王元年北魏孝文帝太和十六年(公元492年)《魏書》卷一百《列傳》八八《高句驪》高句驪王安臧王
高安北魏
孝文帝雲이 죽자 靈太后爲擧哀于東堂……世子安을 安東郡開國公高句驪王으로 봉하였다.文咨王二十七年北魏孝文帝神龜元年(公元518年)《魏書》卷一百《列傳》八八《高句驪》高句驪王梁武帝普通元年二癸醜 高麗世子 安을 寧東將軍, 高麗王으로 봉하였다. 安臧王二年梁武帝 普通元年(公元 520年)《梁書》卷3三十本紀第二《梁武帝紀下》高句驪를 高麗로 고치고 驪를 麗로 고쳤으며, 高麗王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安原王 高延梁武帝7년 安이 죽고 아들延이 왕위에 올라 사 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침. 조서를 내려 延에게 작위를 세습하게 하였다.安臧王二年梁武帝 普通元年(公元526年)《梁書》卷五十四《東夷傳·高句麗》高麗王陽原王 高成北齊
文宣帝北齊文宣帝天寶元秊九月癸醜,散騎常侍郞東騎將軍을 護東夷校尉로 봉하고,王公은 이전과 같다.陽原王六年北齊文宣帝天寶元年(公元550年)《北齊書》卷四《文宣帝紀》高麗王平原王 高陽成北齊廢帝高麗世子湯(陽)을 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으로 봉하였다。王平原王二年北齊廢帝乾明元年(公元560年)《北齊書》捲五《廢帝紀》高麗王嬰陽王
高平陽隋文帝 高麗王으로 봉하였다.嬰陽王二年隋文帝開皇十一年(公元591年)《隋書》捲八十一《東夷傳·高麗》高麗王榮留王
高建武唐高祖上柱國遼東郡,高麗王으로 봉하였다.榮留王七年唐高祖武悳七年(公元624年)《新唐書》捲二百二十《東夷高麗》高麗王寶藏王
高  藏唐太宗藏을 遼東郡王,高麗王으로 봉하였다.寶藏王元年唐太宗貞觀十六年(公元642年)《新唐書》捲二百二十《東夷·高麗》高麗王
이전복은 1990년 중국 최초의 고구려사를 한국에서 출판할 정도로 고구려사에 정통한 학자이다. 그러나 1990년 이후 그의 고구려사 연구 성향을 보면 학자적 양심을 의심할 만큼 편견과 아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표를 보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북위(北魏)에 관한 기사들을 모두 高句麗 열전에서만 뽑고 가장 신빙성이 있는 정사는 손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 자신의 주장인 520년 설을 고집하기 위해 불리한 본기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료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위서의 열전 제목 -《魏書》卷一百《列傳》八八《高句驪》 -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高句驪라고 가라말 려(驪)를 쓰고 있다. 그러나 원 사료에는 제목은 물론 본문 어디에도 가라말 려(驪)를 쓰지 않았다. 이전복이 원사료를 잘 못 읽어 그렇다고 볼 수는 없고 스스로 내용을 왜곡한 것이다.  
이전복은 이런 자료를 가지고 520년에 가서야 ‘驪’자를 ‘麗’자로 고쳤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 못된 판단이었다. 우선 이전복 선생의 주장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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