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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s.ac.kr/~palhae
2007년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
주제명: 고구려의 起源과 族源에 관한 제문제
일 시: 2007년 5월 3~4일(목, 금요일)
장 소: 경성대학교 누리관 이미지홀
주 최 : 고구려연구회·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2. 高句麗의 淵源으로서 肅愼과 古朝鮮
發表 : 한규철 (경성대) 討論 : 선석열 (부산대)
머리말
Ⅰ. 肅愼 硏究의 問題點과 肅愼 記錄의 檢討
1. 肅愼에 대한 爭點들
2. 中國史의 外國列傳 批判
3. 肅愼 記錄의 變遷과 問題點
Ⅱ. 古朝鮮과 濊貊의 先住民으로서의 前期肅愼
1. 前期肅愼과 後期肅愼의 區分
2. 前期肅愼 時代와 그 分布地域
3. 前期肅愼과 古朝鮮, 濊貊
맺음말
머 리 말
夫餘와 高句麗의 족원은 濊貊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濊貊은 과연 自稱의 종족이었는가 아니면 타칭의 종족명이었는가? 이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또한 濊貊 이전의 종족은 없었는가? 예맥과 관련된 만주지역의 최초 주민들은 기록에 어떻게 나오는가? 예맥과 관련이 있으며 만주지역 최초의 주민으로 기록된 사람들이란 단연 肅愼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요동과 요서지역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주지역 최초의 국가를 한국사에서는 대체로 古朝鮮으로 보는 데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중국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보고 있는 것이 다르지만 일단 단군조선이건 기자조선이건 최초로 ‘朝鮮’이란 국호를 가졌던 국가를 고조선으로 보면서 이의 진실성을 따져보는 것이 순리인 것 같다.
고조선의 국가단계나 국가성립시기 등에 대한 고고학적 발전단계 등에 대한 의견은 일치되어 있지 않다. 다만 청동기시대가 되어야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한다. 그런데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 최근 赤峰 등 요서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그 상한연대가 점차 올라가는 추세가 주목되고 있다. 물론 신석기유적을 중심으로 문명발생지로서의 의미가 더해가고 있지만, 황하문명권에 버금가거나 더 앞섰다고 할 수 있는 이른바 ‘遼河文明’이 주목을 받아 오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夏商周斷代工程(1996~2000)과 中國古代文明探源工程(2003이후)으로 재정립된 ‘遼河文明’은 각 유적에 대한 해석을 만주지역 최초 주민의 문화인 肅愼文化說이 논외로 밀리고 있는 형세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夏商周斷代工程은 기록상으로 불명확한 전설적인 夏商周시대를 역사화하는 국가 기획 작업이었다. 결과는 夏나라는 紀元前 2070년대로부터 紀元前 1600년까지로, 商나라는 紀元前 1600년으로부터 紀元前 1046년까지로, 周나라는 紀元前 1046년부터 기원전 771년까지로 보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사의 悠久性과 中華民族의 自矜心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東夷族이 세운 商나라는 中華民族이 되어 버렸다. 이것의 후속작업은 2003년 이후에 실시된 中國古代文明探源工程에서 재정립되고 있는데 이것의 가장 큰 성과는 ‘遼河文明’설로 집약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것의 본래 목적은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3황5제’의 시대까지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여 중국사를 끌어 올리고, 이를 통해 중화문명이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보다도 오래된 ‘世界最古의 文明’임을 밝히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 결과로 나타난 것은 黃河文明보다 앞선 것으로 주장되는 ‘遼河文明’이 창출된 것이다. ‘遼河文明’을 이렇게 강조하게 된 것은 紅山文化 이후 이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夏商周斷代工程과 中國古代文明探源工程의 기획하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문명의 기원을 黃河나 長江유역이 아니라 요하유역에서 찾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黃帝의 후예라는 3황5제의 중국전설시대를 논리를 입증해 보이려는데 분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만주지역을 연고로 기록된 肅愼은 멀어지고 商나라의 시조인 高陽氏 전욱(顓頊)과 高辛氏 제곡(帝嚳)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中國古代探源工程이 끝나면 濊, 貊, 朝鮮, 肅愼, 東胡, 鮮卑, 몽골, 만주족 등 동북 지역의 모든 고대 민족들은 모두 黃帝의 후예로 중화민족의 일부가 된다. 古朝鮮, 夫餘, 高句麗 등 모든 요하를 근거로 하고 있는 모든 고대국가도 중국사로 편입된다는 것이다. 사실 ‘東北工程’도 이러한 논리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遼河文明의 悠久性은 古朝鮮文明圈으로 한국 독립운동기 崔南善, 申采浩 등으로부터 한국학계에서 주장되어 오던 바다. 물론 현대 정통사학이 실증성의 문제로 인하여 이를 적극 수용하지 못한 한계는 있었지만 남북한에서 공히 이를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 중국측 기록에 秦 이전에 나오며 요하문명과 관련된 최초의 주민은 肅愼밖에 없다. 肅愼人들의 문명단계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이것은 오히려 최근 遼河文明으로 언급되는 다수의 문화유적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1988년 말갈의 실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선조로 알려진 ‘肅愼’과 ‘挹婁’에 대하여 살펴본 적이 있다. 만주지역 최초의 주민으로 기록된 숙신의 실체를 밝히는 것에 있었다. 이것은 ‘肅愼’과 ‘朝鮮’의 어원적 유사성을 인정하면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되기 전의 종족명은 ‘숙신’이었으며, 이것이 국가명이 되면서 ‘朝鮮’이 되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아울러 숙신은 예맥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예맥이나 고조선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족명이라는 점을 밝히는 계기도 되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숙신’이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의 선조이면서 예맥이나 고조선과도 계통이 다르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숙신의 계통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막연히 肅愼(先秦)→挹婁(漢)→勿吉(後魏)→靺鞨(隋唐)→女眞(宋이후)이라는 單一 系統論의 편견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숙신에 대한 기록은 시대에 따라 남만주 주민으로부터 흑룡강 중하류 주민을 대상으로 그 대상이 달랐음을 지적하면서 전자와 후자를 같은 계통의 종족명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필자는 남만주 주민을 일컫던 숙신을 ‘前期肅愼’으로 그리고 흑룡강중하류 주민을 일컫는 숙신을 ‘後期肅愼’이라 명명하고 이들은 종족 계통적으로도 서로 다른 두 종족계통의 동일한 종족명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중국학계에서 두 지역의 숙신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된 원인이 남만주에서 흑룡강중하류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라는 ‘이동설’로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고 이것은 기록자의 인식의 차에서 나온 결과로 간주하기 하였다. 즉 기록자가 초기의 동이 미개인으로 숙신을 상정하다가 隋·唐代가 되어서는 흑룡강 중하류 주민으로 인식한 것에 불과하였던 소치였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숙신을 前期肅愼과 後期肅愼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던 것은 肅愼의 출현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先秦代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기원후 3~6세기까지도 나오고 있으며, 이것을 단순히 挹婁의 잘못된 기록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이기도 하다. 아울러 「肅愼 ·挹婁 硏究」는 肅愼 기록이 주로 중국측의 기록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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