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
주제명: 고구려의 起源과 族源에 관한 제문제
일 시: 2007년 5월 3~4일(목, 금요일)
장 소: 경성대학교 누리관 이미지홀
주 최 : 고구려연구회·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3. 高句麗의 族源과 濊貊
發表 : 송호정 (교원대) 討論 : 박경철 (강남대)
머리말
1. 古代 南滿洲 지역 주민집단과 濊, 貊, 濊貊
1) 先秦 시기 遼河 以東 住民集團과 濊貊
2) 濊, 貊, 濊貊의 상호 관계
2. 高句麗와 貊族
1) 高句麗 社會의 形成과 貊族
2) 細竹里-蓮花堡類型 文化와 句麗 種族 社會의 성립
맺음말
高句麗의 族源과 濊貊
송호정(교원대)
<목 차>머리말
1. 古代 南滿洲 지역 주민집단과 濊, 貊, 濊貊
1) 先秦 시기 遼河 以東 住民集團과 濊貊
2) 濊, 貊, 濊貊의 상호 관계2. 高句麗와 貊族
1) 高句麗 社會의 形成과 貊族
2) 細竹里-蓮花堡類型 文化와 句麗 種族 社會의 성립
맺음말
머리말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는 朱蒙으로 대표되는 貊族에 의해 기원전 37년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건국 설화나 고고학 자료를 보면 상한은 소급될 수 있다.
高句麗의 성립은 선행하였던 古朝鮮과 扶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새로운 고대국가의 출현이라기보다는 선행하였던 고대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발전해 나갔음을 유념해야 한다.
文獻 기록에 濊貊과 朝鮮이 共存하고, 漢郡縣의 하나인 玄菟郡의 屬縣에 高句麗縣이 존재하는 사실에서 高句麗는 처음에 古朝鮮의 외곽세력으로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처음에 扶餘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하였다.
청동기시대 이래 중국 동북지방, 즉 南滿洲 일대에서 펼쳐진 청동기문화는 古朝鮮과 扶餘를 거쳐 貊系 주민을 주체로 하는 高句麗로 이어진다. 따라서 고구려 역사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국가 古朝鮮史와 扶餘史와 직결되고 있다. 특히 扶餘는 지금의 만주 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는데, 거기에서 東扶餘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高句麗의 지배층이 된 朱蒙 집단(桂婁部 王室)이 나왔으며, 주몽 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卒本扶餘, 즉 高句麗를 세우게 되었다. 이처럼 扶餘는 고구려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고구려는 扶餘의 ‘別種’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요동 일대에서 펼쳐진 지석묘․석관묘, 미송리형 토기문화, 요령식 청동기문화의 주인공이 濊貊族일 것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高句麗의 族源과 民族系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압록강 중류 유역의 초기 철기시대 고고 자료와 濊貊族 관련 문헌 자료를 종합 고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겠다.
종래 濊貊은 濊와 貊으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와 그 종족적 계통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풀이되어 왔다. 본고는 기본적으로 濊, 貊, 濊貊族에 대한 문헌 자료 검토를 바탕으로, 그들이 고구려사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고고 자료와 종합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古代 南滿洲 지역 주민집단과 濊, 貊, 濊貊
1) 先秦 시기 遼河 以東 住民集團과 濊貊
先秦文獻에는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중반 이전에 渤海 연안지대에 山戎을 중심으로 한 여러 戎狄들과 그 이동에 ‘濊貊’․‘朝鮮’이 존재했음이 보인다. 이들 가운데 山戎을 비롯한 令支․孤竹․屠何 등 戎狄들은 기원전 8~7세기 경에 長城․熱河 일대에서 灤河․遼西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문헌과 고고학 자료로써 입증되었다.
따라서 遼西 일대에 분포하는 夏家店上層文化의 주인공은 바로 戎狄들이었고, 濊貊․朝鮮을 중심으로 한 종족들은 처음부터 大凌河 以東지역에 위치하면서 支石墓 및 石棺墓를 축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당시 중국 東北地方의 청동기문화가 크게 遼西地域의 夏家店上層文化와 大凌河 이동의 遼寧式銅劍文化로 구분되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일찍이 濊貊은 移動에 의해 요동 지역과 길림성,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통용되고 있다. 통설처럼 이들 濊貊(또는 濊와 貊)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집단을 이루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오늘날까지 발표된 여러 견해들은 아직 믿을 만한 증거를 잘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고고학 자료를 결부시킴에 있어서도 아직 신빙성이 미약하다. 다만 후대의 『史記』기록에「濊貊」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종족연합체로 등장하고 匈奴가 盛勢일 때 이와 東接한 사실에서 우리는 기원전 3세기~2세기 경 濊貊은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夫餘와 高句麗가 나왔음이 『三國史記』․『後漢書』 등에 기록되어 있다.
『呂氏春秋』에 보이는 “북쪽 바닷가의 동쪽인 夷穢의 지방에서는 큰 게와 릉어가 난다”고 한 기사는 기원전 3세기 이전 濊貊의 위치를 명확히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에 “非濱之東”의 ‘非’는 ‘北’자의 誤寫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면 북쪽 바닷가의 동쪽, 즉 渤海灣의 동부가 濊貊의 거주지였던 것이니 그들의 서쪽 한계는 발해만 동부의 바닷가였던 것이다. 이것은 古朝鮮이 기원전 3세기 이후 大同江유역에 있을 당시 遼東地方의 기본 주민이 濊貊이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濊貊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록이 『管子』에 보인다. 『管子』小匡篇에 齊 桓公이「北으로 孤竹․山戎․穢貊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濊貊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그것이 설령 후인이 첨가한 구절이라 해도 그 기록은 매우 사실성을 갖고 있다. 이 기록에서 분명한 것은 濊貊(=穢貊)의 위치가 燕나라 동북쪽에 있는 山戎의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山戎을 중심으로 한 戎狄들은 대개 遼西 일대의 夏家店上層文化를 담당한 족속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濊貊은 당연히 그 以東의 遼東地域 일대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先秦 時代에 遼河 이동에는 모두 濊貊族이라는 동일 계통의 주민집단이 전체적으로는 요령식동검문화권 내에서 지역적인 특색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 이전에 이 지방에 이미 강력한 토착 세력이 집결되어 있었던 것은 이곳에 群在하는 탁자식(북방식) 지석묘의 존재로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渾河유역에서 吉林省일대에 이르러 支石墓․石棺墓와 美松里型土器․西團山文化를 영위한 세력은 문헌에 보이는 濊貊族으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遼東地域의 청동기문화는 다양한 地域性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渾河-太子河 유역에 중심을 둔 미송리형토기문화를 대표 문화로 설명할 수 있다. 종래 북한 고고학자들은 미송리형토기를 초기 고조선문화의 배경이 되었던 대표적인 요소로 보았다. 반면 남한학계에서는 청동기시대 고조선의 전형적인 문화로 보면서, 한반도 출토 토기를 형식분류 할 때 중요하게 언급해 왔다.
최근 鄭漢德은 요하 중․하류에서 한반도 서북부 청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에서 석관묘를 조영하고 활약하던 민족은 濊貊이고, 그 가운데 貊系 민족으로 보고 있다. 연대관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미송리형토기 분포권은 貊의 지역이고, 그 이남에서 支石墓를 조영한 세력은 濊族이라는 것이다.
과연 遼東 地域의 주민집단이 濊族과 貊族으로 구분되었는지는 더 고찰되어야겠지만, 미송리형토기 분포의 중심지역과 요동반도에서 서북한에 이르는 지역은 출토 토기나 무덤 형식의 차이로 볼 때 어느 정도 구분되는 문화권이라 할 수 있다. 이점을 고려할 때 渾河~太子河에서 桓仁에 이르는 미송리형토기 중심 분포 지역과 요동반도 지역을 같은 계열의 다른 지역집단으로 구분한 鄭漢德의 견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체적으로 美松里型土器를 조영한 주민집단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필자는 미송리형토기문화의 특성이 西團山文化와 그 문화적 특성이 비슷하므로 서단산문화와 비슷한 주민 계통이 남긴 문화로 보아도 좋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西團山文化를 남긴 주민집단은 濊貊族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西團山文化가 扶餘 先主民의 문화이고, 扶餘는 濊貊族이 세운 고대 국가이기 때문이다. 서단산문화의 중심 분포 지역은 송화강 중류로서 땅이 비교적 平闊하며 5곡 농사에 적합하다. 이것은 『三國志』 東夷傳에 기재된 “東夷의 지역에서 가장 평창하고 五穀에 적합하다”는 기록과 들어맞는다. 吉林市 東團山 일대에서 漢과 漢 이전의 유적 중에 대략 원형을 나타내는 土城이 발견되고 있다. 이점은 부여가 “圓柵으로 성을 쌓고 궁실․창고․감옥이 있다”는 기재와 부합한다. 따라서 西團山文化는 濊族, 즉 扶餘 先住民의 문화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그렇다면 미송리형토기문화의 주인공도 濊 또는 濊貊 계통의 주민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요동 산지의 本溪․太子河 上流 지역에 대한 고고 조사가 진전됨에 따라 고구려 건국 이전 요동 지역의 “廟後山 문화유형”․“馬城子 문화유형”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개 요동반도 북부, 압록강, 혼강, 태자하 상류에 미치는 지역에서 발견되는 기원전 12세기경의 초기 청동기문화를 “馬城子文化”라고 부른다. 전술했듯이 미송리형토기문화는 이 문화에서 계승․발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일 이 문화가 서단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면 馬城子文化 주민집단 역시 濊貊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체질인류학적 연구 결과 마성자문화의 사람은 고동북유형에 속한다고 한다. 서단산문화의 사람 뼈를 계측한 결과 역시 마성자문화의 사람들과 비슷한 계통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요동 지역에서 미송리형토기 분포권은 넓게 보면 지석묘 분포범위와 겹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한반도~요동 지역에서 지석묘를 수용한 지역은 미송리형토기 중심 분포지역의 외연지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요동 지역에서 미송리형토기의 분포권은 대체로 석관묘․요령식(비파형)동검의 출현지역과 일치하고 이후의 명도전 분포지역과 거의 겹친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 이래 濊貊 계통의 高句麗族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미송리형토기문화의 주민집단은 濊貊 계통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할 때 遼東 일대에서 펼쳐진 支石墓․石棺墓․美松里型土器文化․요령식 청동기문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대체로 濊貊族일 것이라는 점에서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古朝鮮이나 濊貊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라 합치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고조선을 건국한 穢族의 문화로 보거나, 고조선의 배경문화로 보는 견해, 고조선과는 별개로 고구려의 선조인 貊族의 문화로 보는 견해, 고조선의 세력권, 箕子朝鮮侯國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史記』나『漢書』등에는「濊貊朝鮮」 및 「朝鮮濊貊」등으로 항상 濊貊과 朝鮮이 병칭되었고, 北에는 濊貊, 南에는 朝鮮 식으로 위치 비정 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두 개의 구분되는 집단으로 서로 밀접한 위치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반드시 동일한 시대의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濊貊은 부여지역에도 있었으며 고구려에도 있었으며, 또한 單單大嶺(낭림산맥) 以東과 以西에도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濊貊族들은 ‘朝鮮’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바, 이것은 古朝鮮이 濊貊族과 다같이 친연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지역집단이라 생각된다.
이 점은 遼河 以東의 청동기문화 내에서도 渾河 유역, 遼東半島, 韓半島 西北地方의 문화가 구별되면서도 전체적으로 土壙竪穴墓나 石棺墓가 혼재하고 長頸壺와 甕의 조합을 이룬 형태의 土器나 그 石器가 유사한 점에서 알 수 있다.
결국 先秦 시대에 요하 동쪽에서는 濊貊族이라는 동일 계통의 주민 집단이 전체적으로는 요령식 동검문화권 내에서 지역적인 특색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遼寧式銅劍文化가 遼東地域에 전파되었을 때 그 지역에는 ‘濊貊’과 ‘朝鮮’이라는 동일 계열의 다른 세력 집단이 서로 밀접히 연관을 맺으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종족적․지역적 개념으로서 ‘朝鮮’이란 본래 오늘의 遼東地方과 西北韓 地方을 가리킨 地域(種族) 또는 政治體의 이름이며, 그 주민은 濊․濊貊으로 불린 종족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2) 濊, 貊, 濊貊의 상호 관계
종래 高句麗의 種族起源과 관련하여 濊․貊․穢貊이 많이 주목되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정설이 없고, 고구려의 종족 기원에 대해서는 濊族說, 貊族說, 濊貊族說, 예맥족에서의 分化說, 원래는 濊族인데 名稱上 貊族이라는 설 등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어느 하나로 단정지을 수는 없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濊貊’에 대해서는 이를 「濊와 貊」으로 갈라놓고 보려는 견해,「濊貊」의 범칭으로 보는 견해, 「濊貊」은 「貊」의 일종이며 「濊」는 「濊貊」의 略稱이라는 견해 등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있다. 본고에서 이들 입장을 일일이 정리하기는 힘들다. 다만 현재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본 결과 필자는 마지막의 견해가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일찍이 茶山 丁若鏞은 「我邦疆域考」와 「濊貊考」에서 貊은 범칭이며 濊貊을 濊와 貊으로 나누어 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논술하였다. 정약용은 濊貊을 濊와 貊으로 갈라 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濊貊의 濊를 고장 이름 또는 물 이름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논거로서 梁貊, 小水貊, 句麗貊이라는 것이 있는 것과 隋가 高句麗를 나무라는 말에 遼濊 지방에서 유목하면서 산다고 한 것을 들었다. 즉 그는 濊를 遼東 지방의 어느 고장 이름이거나 물 이름이라고 보려고 하였는바 거기에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管子』 小匡篇에는 “북으로 孤竹․山戎․濊貊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管子』小匡篇의 다른 곳에서는 “北으로 山戎을 정벌하고 令支를 제압하고 孤竹을 斬하였다”라 하였고, 『史記』 齊太公世家에서도 이에 해당한 것을 “北伐山戎離支孤竹”이라고 하여 濊貊이 보이지 않는다.
『逸周書』(『汲冢周書』)는 저술 당시인 戰國時代에 중국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사방의 종족들과 그 고장의 특산물들을 城主 王會에 가탁한 것인데, 인용된 종족 어느 하나도 貊이라 하지 않았다. 또 전국시대 말경의 呂不韋의 저작인 『呂氏春秋』에서 穢를 ‘夷穢’라고 하고 濊貊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中國 東北方의 종족들을 貊으로 본 명확한 용례는 『史記』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山戎․東胡 등을 貊으로 본 사마천은 濊도 貊으로 보아 濊貊이라고 하였다. 즉 묵특(冒頓) 당시의 左方, 王將들이 차지한 땅은 東으로 濊貊, 朝鮮과 접한다고 하였다. 이 濊貊을 濊와 貊으로 갈라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렇게 보기는 힘들 것 같다. 山戎, 東胡를 貊으로 본 사마천이 濊는 貊으로 보지 않고 그 이동의 종족인 高句麗를 貊으로 보았을 수 없기 때문이다. 匈奴의 左方 王長들의 땅이 동으로 濊貊, 朝鮮과 접한다고 한 것은 바로 匈奴가 東胡를병탄하고 강성하여진 때의 동쪽 경계를 말한 것인 만큼, 東胡인 貊과 접경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史記』에 보이는 濊貊은 바로 『逸周書』에 보이는 ‘穢人’을 가리킨 것이며, 그것은 ‘濊라고 하는 貊’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中國 사람들이 東北方의 種族들을 貊으로 칭하게 된 것은 그들의 東方에 대한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서 북방 종족들을 汎稱한 貊의 범위가 확대된 데서이며, 匈奴가 흥기하여 북방이 匈奴 일색으로 되면서부터는 貊은 차츰 다만 東北方 種族들만을 가리키는 汎稱으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지로 흉노 흥기 이후부터는 중국 북방에서 개별적 종족으로서의 貊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 북방 종족을 貊이라고 汎稱한 예도 볼 수 없다.
이는 바로 중국 사람들이 중국 본토의 동부에 거주한 漢族 아닌 종족들을 東夷라고 하다가 그들이 동방에 대한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그 호칭이 가리키는 범위가 넓어지고 본토 내의 東夷가 완전히 漢族에 흡수된 후에는 다만 본토 이동의 漢族 아닌 종족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된 것과 마찬가지다.
『漢書』武帝記에는 “원삭 원년 가을에 東夷 薉君 南閭 등 28만인이 항복하니 滄海郡으로 하였다”고 나온다. 여기서 東夷薉君의 薉는 穢, 濊와 동일한 것인 바, ‘薉貊君’이라고 하지 않고 濊君(薉君)이라고 한 것은 濊貊을 濊와 貊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는 원래 濊라는 종족인데 중국 사람들이 ‘東北夷’를 貊이라고 범칭하게 된 데서 ‘濊라고 하는 貊’이라는 의미에서 濊貊이라고 한 것인 만큼 濊君 또는 濊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後漢書』 夫餘條에서는 부여를 ‘본래의 濊의 땅’이라고 하였는가 하면, 高句麗條에서는 고구려의 영역을 말하면서 “남으로 朝鮮, 濊貊과 접한다”고 하여 강원도 북부 방면의 濊를 濊貊이라고 하였다. 『三國志』 魏書 扶餘條에서는 扶餘王의 印章에 ‘濊王之印’이라고 새겨 있는 사실과 ‘濊城’이라는 옛 성이 있음을 말하고서는 부여를 본래의 ‘本濊貊之地’라고 하였다. 『三國志』 魏書 高句麗條에서는 『後漢書』에서처럼 “남으로 조선 예맥과 접한다”고 하여 강원도 북부 방면의 濊를 濊貊이라고 하였다.
『後漢書』에는 『漢書』地理志처럼 濊貊과 高句麗를 뚜렷이 구분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 『後漢書』高句麗條에 “高句麗가 濊貊과 더불어 玄菟를 공격하였다”고 한 것이라든가 “유주자사 馮煥이 2군 태수를 거느리고 高句麗와 濊貊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 것 등은 高句麗와 濊貊이 완전히 별개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명백한 예다. 이 濊貊을 濊와 貊으로 갈라서 그 중의 貊을 高句麗로 본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 濊貊에 고구려도 포함된다고 볼 여지가 없다.
‘濊貊’은 濊와 貊으로 갈라 보기보다는 ‘濊라는 貊’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경우의 貊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북방 내지 동북방 종족들을 貊이라고 汎稱한 데서 유래한 것이고, 『詩經』韓奕章의 ‘其追其貊’의 貊이나 『戰國策』, 『荀子』, 『墨子』, 기타에 보이는 ‘胡貊’의 貊의 東遷에 의한 貊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貊은 匈奴의 興起 전까지도 중국 山西 북부에 있었는 바 그들은 匈奴의 흥기와 더불어 그것에 흡수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상의 정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정리가 가능하다. 先秦 시기의 여러 문헌에 나오는 ‘貊’은 원래 중국 北方에 거주하던 종족에 대한 명칭이었다. 이에 비해 발해만 동부지역은 先秦 시기에 대체로 ‘夷穢之鄕’ 곧 穢族의 거주지역으로 인식되었다. 濊族 가운데 朝鮮이 가장 일찍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 그 뒤 扶餘․眞番․臨屯 등이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 『史記』에서는 朝鮮을 둘러싼 주변 정치세력과 주민집단을 ‘穢貊’이라고 통칭하였다. 원래 중국 북방 종족에 대한 명칭이던 貊이 『史記』 이후 ‘濊’와 결합하여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던 濊族 일반에 대한 표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2. 高句麗와 貊族
1) 高句麗 社會의 形成과 貊族
고구려 발흥지인 渾江과 독로강 유역을 포괄한 압록강 중류 유역에 거주하던 주민은 貊族이라고 전한다. 貊族은 일찍부터 先秦文獻의 각종 典籍에서 그 명칭이 散見된다. 선진문헌에서 주로 ‘貊’, ‘胡貊’, ‘蠻貊’ 등으로 표현된 貊族과 압록강 중류 유역의 주민인 貊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일찍부터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전술했듯이 先秦文獻에 나오는 貊은 특정한 족속을 지칭하기보다는 先秦時代(春秋戰國時代)에 북방 족속들에 대한 汎稱으로 쓰였다. 汎稱으로서의 貊이란 말을 그 뒤 고대 중국 세력이 동북방으로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漢人들이 압록강 중류 지역 주민을 지칭하는 데 적용하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를 세운 貊族과 先秦文獻의 貊을 동일 족속으로 보아 양자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高句麗의 起源을 추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하겠다.
고구려는 원래 5개 族의 연맹 형태였으며, 매개 族들에는 또한 고유한 명칭이 있었으며 일정하게 독자성도 있었다. 이들은 원래 高句麗 族을 구성하는 부족들이었겠지만 거기에는 종족적으로 갈래가 다른 요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원래 高句麗는 濊貊의 거주지역에 扶餘의 일파가 남하하여 형성된 것이다. 『三國史記』에 보이는 高朱蒙과 沸流國 松讓王과의 관계라든가, 압록강 중류의 고구려 초기 유물에 遼東的 요소와 松花江 中流 요소가 병존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정을 말하여준다.
구체적으로 길림성 일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西團山文化의 土器가 압록강 유역 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된 公貴里形 土器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기원전 4~3세기경 유적으로 비정되는 吉林市 土城子 유적은 石棺 안에 木棺을 썼고 회색 토기가 많이 출토하는데, 그것은 압록강 유역의 노남리 유적 및 桓仁縣 東江村 11호 무덤의 출토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토기의 형태와 무덤의 구조에서 보이는 이러한 공통성에 근거하여 고구려 초기의 문화는 길림성 일대 부여 후기 단계의 문화를 직접 계승한 문화이며, 따라서 압록강 중상류 및 송화강 유역 일대의 청동기시대 말~초기 철기시대의 주민들은 다름 아닌 高句麗 주민의 직접적인 先祖의 한 갈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遼東 지역의 기본 주민집단인 濊貊은 고구려 연맹체 內部에도 있었고, 外部에도 통속 관계에 있던 濊貊이 있었다. 예를 들어 遼東郡과 玄菟郡의 기본 주민은 濊貊이었고 그 徼外는 모두 濊貊이었다고 할 수 있다. 漢郡縣 郊外의 濊貊은 처음에는 고구려 연맹체의 통제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완전히 그것에 흡수된 것이다. 이는 고구려 국가의 발전 과정을 통해 엿볼 수 있다.
『後漢書』 安帝紀에는 “幽州刺史 馮煥이 2군 태수를 거느리고 高句麗와 濊貊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을 同書 高句麗條에서는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유주자사 馮煥, 현토태수 姚光, 요동태수 蔡諷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塞에서 나와서 공격하여 예맥의 渠帥를 붙잡아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宮은 여기서 그 아들 遂成을 보내어 光을 맞아 싸우게 하고 사람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척하니 光 등이 믿었다. 수성은 여기서 협애에 의거하여 대군을 차단하였는데 모르게 3천인을 보내어 현토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지르고 1천여 명을 살상하였다. 여기서 廣陽, 漁陽, 右北平, 涿郡屬國의 3천여 기를 징발하여 함께 구원하게 하였는데 貊人이 이미 떠나갔었다”
이 기사에 의하여 濊貊은 漢 郡縣의 塞 밖에 있었으며 고구려의 보호 통제 하에, 또는 그 연맹체 내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光 등이 그들을 遮略하니 고구려에서는 대군을 보내어 반격한 것이다.
安帝紀에서 高句麗, 濊貊을 침략하다가 패배하였다고 한 기사에 뒤이어 “여름 4월에 濊貊이 다시 鮮卑와 더불어 요동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高句麗條에서는 宮, 즉 고구려가 그렇게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濊貊을 완전히 高句麗에 포함시켜 본 것이다. 이 경우의 高句麗는 濊貊을 포함한 高句麗로 볼 수 있다.
高句麗를 ‘貊’이라고 표현한 것은 紀元 以後 중국 사서에 집중되어 있다. 『漢書』권99 王莽傳에서 ‘高句驪侯 騶’의 집단을 ‘貊’ 또는 ‘穢貊’이라 칭한 이래, 『漢書』 地理志에서는 “玄菟 樂浪은 무제 때에 설치한 것인데 모두 조선, 濊貊, 句麗의 오랑캐들”이라고 하여 기원전 2세기 말경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에서 성장하고 있던 고구려 사회의 실체를 ‘句麗蠻夷’ 또는 ‘夷貊’이라 특칭하면서 ‘朝鮮’과 여타 ‘濊貊’ 집단과 구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三國志』․『後漢書』 등에서는 기원전 75년 玄菟郡 퇴축을 “沃沮城을 玄菟郡으로 삼았다가 뒤에 夷貊의 침입을 받고 句麗의 서북으로 옮겼다”고 하여 고구려를 명확하게 貊族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북방의 돌궐인도 고구려를 ‘Mὅkli’ 곧 高句麗로 불렀다. 몽골 Orkhon 河畔의 옛 돌궐 비문을 보아도 고구려는 Bökli 또는 Mökli 또는 貊句麗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原 高句麗人이 ‘貊族’에 속했기 때문에 ‘貊’자를 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貊은 狛과 통하는데, 일본에서는 高句麗를 ‘コマ’로 부르지만 狛도 ‘コマ’로 불러 狛犬이나 高句麗系의 渡來人과 관계있는 地名에 남아 있다. 이 역시 고구려가 貊으로 불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後漢書』에서는 『漢書』王莽傳에서처럼 高句麗를 ‘貊人’이라고 한 예가 적지 않게 보인다. 『後漢書』高句麗條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高句麗 王 宮이 파견한 군대를 貊人이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光武帝紀에서 “貊人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하였다”고 한 것을 高句麗條에서는 高句麗가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고, 화제기에서는 “고구려가 郡界-遼東郡界를 공격하였다”고 한 것을 耿蘷 傳에서는 貊人이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들은 高句麗와 貊人을 互用한 것이다.
한편 『三國志』에는 “大水 유역에 나라를 세운 句麗는 大水貊, 서안평으로 흘러드는 小水에 사는 句麗別種은 小水貊”이라 하여 高句麗를 貊族으로 인식하고 있다. 『後漢書』에서도 句麗를 貊族으로 보고 있다. 당시 중국인들은 高句麗 國家 形成과 관련, 그것을 주도할 두 세력으로서 ‘句麗’라 지칭되던 압록강 유역의 貊族 집단인 ‘大水貊’과 ‘句麗別種’으로 인식되던 渾江 유역 貊族 집단인 ‘小水貊’을 거론하고 있음은 고구려의 종족적 실체가 濊貊 가운데 ‘貊’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상에서 보면 기원 이후에 저술된 대다수 중국 문헌이나 북방 유목민은 高句麗를 貊族의 나라로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後漢書』 이후 史書에서 사용하는 ‘貊人’의 개념은 高句麗의 개념보다 폭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貊人은 濊貊까지도 포함한 여러 갈래의 貊들을 포괄한 그러한 高句麗를 가리킨 것이다. 만일 貊人이 오직 高句麗人만 가리키는 것이라면 貊人과 濊(濊貊)을 병렬할 수 있겠는데, 高句麗와 濊貊을 병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貊人과 濊(濊貊)를 병렬한 예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貊人이 단지 고구려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방증하여 주는 것이다.
『三國志』 魏書 鮮卑條 裵松之 註에 인용된 『魏書』에서 檀石槐 領地의 구분을 말하면서 “우북평에서 이동 요동에 이르러 扶餘와 貊에 닿는 데를 東部로 삼았다”고 한 것을 『後漢書』 鮮卑傳에서는 “扶餘와 濊貊이 닿는 데를 東部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魏書』에서는 檀石槐 領地의 東部가 濊貊도 포함한 그러한 高句麗에 닿았다는 의미에서 貊과 접하였다고 한 것이고, 『後漢書』에서는 실지로 닿은 데는 고구려 중의 濊貊이였기 때문에 濊貊에 접하였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貊(貊人)의 개념에는 濊貊도 포함된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後漢書』 高句麗條에서는 “高句麗는 일명 貊인데 別種이 있어 小水에 의거하여 거주하므로 小水貊이라고 한다”고 한 것도 高句麗族만을 貊이라고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高句麗 聯盟體를 貊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小水貊이라는 貊도 있다는 뜻으로서 나아가서는 梁貊, 沃沮, 濊貊도 그런 의미에서 貊, 貊人에 포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古朝鮮 주변에 거주한 濊貊 중에서 가장 북쪽에 미친 부분은 기원전 1세기 경에는 高句麗가 되었다. 이전에 고조선의 땅이었던 遼東의 濊貊은 기원전 2세기 경까지도 일정하게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高句麗化 하였다. 강원도 지역의 濊貊은 가장 늦게까지 독자성을 가지고 남아 있었다.
2) 細竹里-蓮花堡類型 文化와 句麗 種族 社會의 성립
고구려는 기원전 4세기에 처음 중심 집단이 출현한다. 압록강과 그 지류인 渾江과 禿魯江을 중심으로 濊貊集團이 성장하는데, 이 지역에서 高句麗 國家가 기원한다. 따라서 高句麗의 起源은 주민 이동이나 분화에 따른 파악보다 기본적으로 渾江과 독로강 유역을 포함한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적석총을 남긴 주민집단의 성장 과정을 통해 파악되어져야 한다.
高句麗는 처음부터 濊(穢)族 또는 濊貊族으로 불린 주민집단과 종족적으로 구분되는 ‘貊族’이었다고 볼 수 없다. 高句麗를 이룬 주민집단은 원래 濊族 또는 濊貊族의 일원이었다가, 늦어도 기원전 3세기 말에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주변 濊貊 사회와 구별되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
기원전 3~2세 경 細形銅劍과 鑄造鐵斧 등 이른바 초기철기문화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였다. 압록강과 서북한 지역에서 발전한 세형동검문화는 흔히 細竹里˜蓮花堡類型 文化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 지역에 이른바 ‘濊君南閭’로 불리는 세력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기원전 3~2세기 경 요동 및 압록강 일대에 거주한 주민집단과 관련하여 세죽리-연화보유형 문화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遼東地域에 위치한 가장 대표적인 중국 戰國時代 住居 유적으로는 撫順市 蓮花堡 유적을 들 수 있다. 蓮花堡 유적에서는 돌로 쌓은 담장 기초와 부뚜막자리[竈(爐)址], 灰口, 灰坑 등의 유구와 비교적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鐵器가 중심이고, 이외에 청동기, 반량전, 승석문토기 등이 나왔다. 鐵器 가운데 鑄造品은 鍬先․斧․鍬․鋤․穗摘用包丁․鎌․刀․鑿이고, 鍛造品은 錐․錐形器․釣針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기원전 3세기~2세기에 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유물의 특성상 蓮花堡 유적은 중국 戰國時代 燕人들이 요령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燕에서 가져온 여러 戰國系 鐵器 제품들이 그대로 지배자의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 보인다.
遼寧省 지역에 위치한 초기 철기시대 주거유적과 비슷한 성격의 주거지가 한반도 서북지방 寧邊郡 細竹里 유적에서 나와 많은 주목을 끌었다. 細竹里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층으로부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는 여러 시기의 문화층이 나왔다. 동서 1~1.3km, 남북 200~300cm에 이르는 이처럼 넓은 범위에서 철기시대 문화층이 확인된 것은 이 지역에 적지 않은 철기시대 마을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큰 마을터에서 극히 일부(약 2100㎡)를 발굴한 결과 철기시대 집자리 5개를 확인하였다. 이 집자리들은 이전 시기(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집자리들과는 달리 움집이 아니라 지상가옥이었다. 그리고 이 중 2개 집자리에서는 구들이 드러났다.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쪽구들의 고래 안에서는 철기 및 그 조각과 토기편도 발견되었다. 또 집자리 안팎에는 鐵器, 靑銅器, 明刀錢․布錢, 토기 등의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이밖에 평안북도 渭原郡 龍淵洞 유적에서도 細竹里유적과 유사하게 鑄造鐵斧․鋤․鎌․半月形鐵刀․鍦와 같은 農工具와 함께 鉾․鏃 등의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渭原郡 龍淵洞 유적이나 寧邊郡 細竹里 유적 및 渾河 유역의 撫順 蓮花堡 지역 출토 鐵器는 주조 農工具類와 鍛造 武器類가 함께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 성격이 燕 下都의 戰國時代 중후기에 해당하는 철기와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 북한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유적, 유물의 성격을 細竹里-蓮花堡類型文化라는 명칭을 붙여 고조선 후기 단계의 특징적 문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鐵器들은 어디까지나 燕 나라 것인 만큼 燕 나라 철기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 철기 유물들은 토착집단이 제작한 在地的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한반도 서북지방 출토 초기 철기는 戰國系 철기가 遼寧省 지역을 경유하여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계기에 대해서는 燕 昭王代에 秦開가 遼東을 공략한 이후 또는 秦에 의해 燕이 멸망당한 직후 주민들의 이동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분명 중국제 鐵器가 출토되는 것은 당시 중국 동북지방의 전란으로 인한 어지러운 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退藏 유적은 地金으로서 가치를 지닌 청동화폐를 은닉할 목적으로 매장한 것으로 중국의 燕人이나 인접한 요동지방의 주민들이 병란을 피하기 위해 이주해 와서 남긴 유적으로 보인다. 어쨌든 요동 및 서북한 지역에서 철기가 공반되는 유적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지닌 세력과의 교류 또는 접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림-1>B.C4-3세기 丹東,桓仁,集安출토 靑銅器
고구려가 처음 성장한 압록강 유역을 포함한 요동˜청천강 유역은 이전 시기에는 古朝鮮의 영역에 속했다. 이 지역에서는 고조선 후기 단계에 세죽리-연화보유형 문화를 누리던 집단들이 거주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권 안에서 압록강 유역에는 ‘貊’으로 표현되는 집단이 거주하였는데, 이들 집단과 관련하여 丹東 지구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과 積石塚이 주목된다. 구체적으로 寬甸縣 太平哨鎭 돌무지 안의 石板 아래에서 4개의 청동검이, 同縣 長甸鎭에서 돌무지 안의 石棺에서 청동검 1개가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과 적석총은 압록강 중류 지역의 集安 五道嶺溝門 같은 적석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은 漢제국 세력이 밀려들기 이전 시기에, 압록강 중류 일대에 상당한 청동기 유물을 부장한 개인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할 만큼 계층분화가 진전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미 진전되고 있던 이 지역의 계층분화는 철기의 사용과 교역을 통해 촉진되어졌다. 집안 지역에서 중국 전국시대 화폐인 明刀錢, 布錢과 漢代의 半兩錢 및 五銖錢 등이 발견되었다. 이런 古錢들은 기원전 3세기 초 요동 지역이 燕의 지배 하에 들어간 이래로, 遼東地方과 渾江 및 압록강 중류 지역 주민들 간에 교역이 진전되었음을 말해 준다. 渭原 용연동을 포함한 세죽리-연화보유형 문화에서 다량의 철제 농공구와 명도전이 발견된 점은 이러한 점을 방증한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농경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아가 인구의 증가와 사회분화를 촉진시켜 혼강과 압록강 중류 지역 각지에서 점차 새로운 정치체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胎動시키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고구려 사회가 성립하게 되었다.
기원전 4˜3세기 이후 압록강 유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고 사회분화가 점차 진전되어 가자, 그 과정에서 유력한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일정한 계곡이나 하천 유역의 마을들을 규합한 지역 정치집단이 각지에 형성된다.
<그림-> 渭原郡 龍淵洞 유적 출토 鐵器 扶餘族의 일파가 처음 고구려를 세운 압록강 중류 지방에는 이미 기원전 4세기 경에 ‘濊貊’이라고 불리던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28만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濊君 南閭는 바로 이 정치적 사회의 君長이었음에 틀림없다. 기원전 128년 28만구를 이끌고 漢에 투항했다는 薉君 南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동해안과 압록강 중류 지역 주민집단들의 완만한 연합체라고 보는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위만조선의 압박이 계속되자 당시 동으로 세력을 뻗쳐오던 漢에 투항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이후 압록강 일대에 거주한 주민집단은 처음에는 ‘句驪’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高句麗라는 國家名으로 고정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貊’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렸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 말에 독자적인 문화 전통을 수립한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주민집단은 ‘句麗種族’, 그리고 高句麗의 母體를 이룬 사회라는 의미에서 ‘原高句麗社會’로 지칭할 수 있다. 이처럼 句麗種族은 濊貊族에서 분화하였으므로 처음에는 濊貊族의 일원인 東濊나 沃沮의 사회 상태와 비슷하였다고 추정된다.
한편 고구려 사회 형성기에 ‘貊’은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高句麗 建國集團과 ‘梁貊(小水貊)’으로 분화하였다. ‘貊’으로 통칭되던 주민 집단 가운데 寬甸縣, 本溪縣, 新賓縣 등 주로 高句麗 西邊의 靉河․浦石河, 太子河, 蘇子河 일대의 ‘梁貊(小水貊)’으로 분화되었다. 그리고 梁貊은 고구려의 피복속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句麗’ 종족 집단으로 존재하던 단계의 사회를 말해주는 고구려 초기 積石墓가 주로 압록강 일대에만 분포하고 있는 점에서 추정된다.
衛滿朝鮮이 멸망된 뒤에는 그 지역에 玄菟郡이 설치되었으나 이것도 30여 년 만에 滿洲로 쫓기어 갔다. 이때 玄菟郡의 屬縣 가운데 首縣으로서 高句麗縣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필경 토착 고구려 부족의 族名이나 혹은 地名에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玄菟郡의 이동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東沃沮條에 ‘夷貊’, 곧 이 지방의 高句麗 세력의 반항을 받은 때문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 만큼, 고구려의 초기국가 형성은 이미 이때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高句麗의 지배세력이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동해 온 자라 할지라도 이 先主 토착 세력과의 타협 없이는 국가 건설이 어려웠을 것이다. 濊君南閭가 衛氏朝鮮의 지배에 반항하여 漢에 의지하려고 하자 漢이 이곳에 滄海郡을 설치하려 한 것이라든지, 그 계획이 2년 만에 취소되어 결국 지도상의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이처럼 고구려 사회의 형성은 한군현, 특히 현토군의 설치 및 축출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구체화되어 갔다.
맺 음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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