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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
주제명: 고구려의 起源과 族源에 관한 제문제
일 시: 2007년 5월 3~4일(목, 금요일)
장 소: 경성대학교 누리관 이미지홀
주 최 : 고구려연구회·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4. 高句麗의 夫餘 出源에 관한 認識의 變遷
發表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討論 : 이병로 (계명대)
1. 머리말
2. ‘고구려’ 국호의 계승 배경
3. 주몽 집단의 출원지
4. 시조 출원지에 대한 인식의 변천 배경
5. 맺음말
高句麗의 夫餘 出源에 관한 認識의 變遷
李道學(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목 차> 1. 머리말
2. ‘고구려’ 국호의 계승 배경
3. 주몽 집단의 출원지4. 시조 출원지에 대한 인식의 변천 배경
5. 맺음말
1. 머리말
高句麗라는 정치세력이나 국가의 존재는 漢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BC. 107년에 설치한 현도군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玄菟郡의 屬縣인 高句驪縣의 존재를 통해 적어도 BC. 107년 이전에 고구려라는 이름의 국가를 설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BC. 37년 무렵 주몽 집단이 건국한 국가 이름 역시 고구려였다. 동일한 국호를 사용한 현도군 이전의 고구려와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와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구명이 미흡하였다. 이 점을 본고에서는 고찰하고자 하였다.
주몽 집단의 출원지와 관련해서는 북부여에서 南下했다는 금석문 기록을 취신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주몽 건국 전설은 東明의 夫餘 건국 설화의 借用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얼마든지 고구려 건국 세력의 계통을 造作할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 주었다. 그런 만큼 주몽 집단의 출원지를 문헌 자료에서 동부여로 기록한 사실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주몽의 출원지에 대한 2가지 설은 마치 충돌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여기서 始祖의 출원지에 대한 異說이 생겨난 배경과 인식의 변천에 대한 구명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발견했다. 본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명을 시도하기 위해, 고구려 건국 전승과 관련한 한국과 중국측 문헌 자료의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고구려 시조의 출원지를 밝히고 나아가 그러한 인식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고자 했다.
2. ‘고구려’ 국호의 계승 배경
BC. 107년에 漢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현도군을 설치할 때 ‘고구려’의 존재는 이미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부여족의 일파에 의한 고구려 건국은 인정할 수 없다. 더구나 고구려 시조인 주몽 건국설화는 부여 시조인 東明 설화의 借用에 불과할 뿐이다. 고고학적으로도 부여 묘제가 환인 일대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와 관련해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적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관성적으로 고구려 건국 세력은 북부여에서 남하했다는「광개토왕릉비문」(이후 ‘능비문’으로 略記한다)이나「모두루묘지」기록을 받아들인 게 아닌가하는 自省의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환인의 望江樓 고분군에서 고구려 早期 적석총이 발굴된 바 있다. 이 적석총에서 출토된 銅柄·철검·귀고리·串珠·도자기 등이 모두 西岔溝 고분 출토품과 대략 동일하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실의 출신지가 부여라는 기록을 입증해 주는 근거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망강루 고분은 입지 조건을 비롯해서 고구려 건국과 관련한 오녀산성이나 下古城子 주변의 고분군과 직접 결부 짓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고구려 건국 세력의 계통적 다양성에 의미를 둘 수는 있을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주몽 집단의 부여 출원설에 대한 반대 견해가 다른 각도에서 제기된 바 있다. 즉 주몽의 건국 시점에 비추어 볼 때 부여 출원설은 너무 늦게 문자로 정착되었다. 현도군의 속현인 고구려현의 존재를 통해 주몽의 건국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때 불과 몇 명밖에 대동하지 못했다. 따라서 고구려는 결코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없다. 다만 부여인 중의 일부가 고구려족에 가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면 먼저 주몽으로 대표되는 건국 세력이 국호를 여전히 고구려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漢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郡 가운데 BC. 107년의 현도군 관하에는 上殷台와 西蓋馬 그리고 高句驪라는 3개 縣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3개 현의 이름은 주지하듯이 현도군이 설치되기 전에 이곳에 소재하였던 토착 세력의 小國 이름으로 파악되고 있다. 26년에 대무신왕이 정벌한 개마국이나 개마대산도 이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BC. 107년 이전에 현도군 관내에는 고구려라는 이름의 정치 세력이 소재하였음을 알게 된다. 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전에 고구려라는 이름의 정치 세력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현은 현도군의 首縣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사실은 현도군 관내의 토착 諸勢力 가운데 舊高句麗國의 위상이 지대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토착 세력의 저항으로 인해 BC. 75년에 현도군과 그 예하 속현인 고구려현은 지금의 요녕성 新賓 일대로 이동하였다. 주지하듯이 이것이 제2현도군이 된다. 제1현도군이 떠난 空地에는 당연히 토착 세력들이 그 공간을 메꾸면서 할거하였을 것이다. 이는 충분히 예상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1현도군이 축출된지 40년 가까운 기간이 흐른 뒤 이곳에 주몽 집단에 의한 고구려 건국이 이어졌던 것도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가 건국한 환인을 비롯한 그 일대에는 통일된 단일한 정치 세력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주몽 집단의 건국이 비교적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주몽이 홀본에 건국하면서 국호를 현도군의 首縣 이름인 고구려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국호는 상징성이 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국호는 계승성에 대한 의미가 지대하기도 하다. 그랬기에 궁예나 진훤이 당초 국호를 고려와 백제로 삼은 게 아닐까.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구려 국호는 현도군의 수현을 계승한다는 차원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들이 축출한 현도군을 토착 세력이 계승해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 보다는 현도군의 수현이었던 고구려현은 현도군 이전에 이곳에서 독립 소국 이름으로 존재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즉 유이민인 주몽 집단은 토착인들이 축출한 현도군 관내에서 그 수현이었을 정도로 비중이 지대했던 고구려라는 독립 소국의 이름을 부활시켰다. 그럼으로써 주몽 집단은 자연스럽게 그 계승자가 되는 동시에 구고구려국이 지녔던 정치적 영향력의 재현과 복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위만이 기습적인 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했지만 朝鮮이라는 국호를 여전히 사용한 사례도 이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BC. 75년에는 현도군과 그 首縣인 고구려현이 쫓겨가서 ‘고구려’가 해체된 상황이었다. 이는 바꿔 말해 현도군을 축출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 고구려현 인근에 결집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에도 동가강과 압록강유역에 강력한 단일 정치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현도군 축출 이후 토착 세력들이 세력 균형을 이루며 할거하는 상황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런데 이곳에 정착한 유이민인 주몽 집단이 세력 규합 명분으로 내세운 게 고구려의 재건이었을 것 같다. 주몽 집단이 舊고구려국 왕실인 소노부 세력과의 연합을 기도하는 상황에서 국호를 고구려로 삼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주몽의 계루부 왕실이 이례적으로 舊王室의 종묘와 사직까지 보존해 주었다. 사실 이는 유례가 드믄 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이것도 주몽의 건국기에 이루어진 소노부와의 세력 연합의 산물이라고 할 때 이해가 쉬워진다.
BC. 37년 무렵 주몽 집단에 의한 건국은 고구려 국호의 부활을 가져 왔다. 물론 舊高句麗 왕실과 주몽의 고구려 왕실은 엄연히 구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삼국지』에서 언급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는 이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에 관해서는 그 시점을 태조왕대 高氏 왕실의 출현이나 주몽왕대 송양과의 경쟁 등을 지표로 운위하고 있다. 그러나 태조왕대의 왕실 교체설을 취신하는 경향은 이제 희박해졌다. 그리고 주몽이 송양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자체가 송양을 중심한 5부연맹의 장악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송양이 연맹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삼국지』기사는 BC. 107년 이전의 구고구려국과 BC. 37년에 건국된 고구려를 서로 연계시켜서 해석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일한 국호를 사용한데다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최고 지배세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응당 왕실 교체 현상으로 이해할 법한 일이라고 하겠다. 물론 시간의 공백이 없는 계승 관계에다가 2개 왕실이 시간적 틈새없이 맞물려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로서『고려도경』에 따르면 高麗는 漢代에 주몽이 건국하여 내려오다가 일시 망했지만 後唐 무렵에 재흥되었다. 이 때 고씨에서 왕씨로 왕실이 교체되었다는 인식을 꼽을 수 있다. 주몽의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는 엄연히 실체가 다른 국가였고, 각기 새로운 왕조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국호의 동일함과 계승 의식으로 인해『고려도경』의 저자로 하여금 동일 국가 내에서 이루어진 왕실 교체로 오인하게 하였다. 마찬 가지로『삼국지』에서의 왕실 교체 기록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진다.
주몽 집단은 건국지가 舊高句麗國 故地와 무관하지 않았기에 고구려 국호를 부활시켰다. 즉 구고구려국이 지닌 상징성이 지대하였기에 현도군에 편제되었다가 쫓겨간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과 부활 차원에서 고구려 국호를 사용하였다. 또 그러한 차원에서 고구려는 현도군에 대한 공격에 박차를 가했던 것 같다. 고구려가 14년(유리왕 33)에 제2현도군 관내의 고구려현을 襲取하였다. 그리고 26년(대무신왕 9)에 고구려는 비록 서개마와는 연결되지 않는다하더라도 개마국을 점령하는 일 등은 현도군의 뿌리를 뽑아 명실상부한 구고구려국의 복원과 그 계승자임을 염두에 둔 현상으로 보인다. 더욱이 유리왕의 고구려현 습취는 눈에 보이는 2개의 ‘고구려’를 용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후자는 주체가 구고구려국과는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실제 건국이었기에「능비문」에서 ‘創基’라고 했던 것 같다.
주몽 집단이 고구려라는 국호를 부활시킨 것은 후광 효과 외에 자기 역량이 열세인 관계로 토착 세력들에게 익숙하고 전통적 권위를 지닌 기존의 국호를 사용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몽 집단이 이곳의 토착 묘제인 적석총을 수용한 것도 그 일면을 보여준다. 아울러 주몽과 송양과의 대결이나 소서노와의 혼인은 경쟁과 혼인 동맹을 뜻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전자는 토착 세력과의 경쟁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하는 주몽의 세력 구축 배경이 된다. 이 경우도 송양의 딸이 유리왕의 왕비가 되어 대무신왕을 낳았으므로, 혼인을 통한 세력 연합이라는 속성을 지녔다. 후자의 경우도 혼인 동맹이라는 세력 연합을 통해 新住地에 세력을 견고하게 구축한 사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서노의 ‘서’를 사이 ㅅ으로 읽게 되면 ‘솟노’가 되어 인명이 아니라 那名에 근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때 주몽과 소서노와의 혼인은 곧 고구려 건국 세력과 소서노와의 혼인 동맹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3. 주몽 집단의 출원지
주몽 집단의 출원지는 어디일까?「능비문」이나「모두루묘지」에 따르면 북부여로 명시하였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A. 옛적에 始祖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다. 北夫餘에서 나오셨는데, 天帝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 오셨는데, 태어나시면서 聖스러운···이 있었다. 수레를 남쪽으로 내려 가게 하여 巡幸하시는데, 夫餘의 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王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皇天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신 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 오르게 하여라!” 그 소리에 호응하여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 올랐다. 그런 연후에 건너가서 沸流谷 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삼았다.(「능비문」)
B. 河泊의 손자이시며 日月의 아드님이신 鄒牟聖王께서는 근원이 北夫餘에서 나오셨으니(「牟頭婁墓誌」)
위의 금석문 기록에 따라 주몽의 출원지를 북부여로 간주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비록 당대의 금석문이라는 1급 자료이기는 하지만 정치 선전문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강한「능비문」과 고구려 시조에 대한 가 없는 칭송과 영합하는 글귀로 짜여진 문장이「모두루묘지」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금석문이나 문헌 자체에서도 적어도 2개의 부여가 竝存한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주몽의 북부여 출원설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첫째, 북부여의 성립 시기를 동부여가 성립되었다는 285년 이후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고구려를 기준해서 동부여와 더불어, 원부여는 345년 이후에 북부여로 불리었다는 것이다. 주몽 집단이 남하·정착한지 무려 4세기가 가까워서야 북부여가 성립되었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이는 시간상으로 선후가 倒置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몽의 북부여 출원설은 내용상의 신뢰성에 의문을 심어줄 수 있다. 당초 생겨나지도 않은 북부여에서 주몽이 남하했다는 것은 형식 논리상 어불성설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능비문」이 작성되는 414년의 관점에서 당시 북부여는 원부여의 후신이므로 북부여라는 표현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능비가 건립되는 시점에는 북부여와 더불어, 국경의 표지로서 ‘부여 엄리대수’라는 표현을 통해 故夫餘(原夫餘) 영역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였고, 또 동부여가 竝存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앞서 제기한 견해는 따르기 어렵다. 즉 북부여나 동부여 같은 方位名 夫餘가 (비록 당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原夫餘를 기준으로 한 국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魏書』에서 吉林의 原夫餘를 舊夫餘라고 하였다. 이는 농안으로 이동한 부여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여기서도 原夫餘를 기준으로하여 파생·이동한 부여를 언급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엄리대수의 ‘부여’를 북부여의 한 지방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엄리대수’라고하면 될 터인데 굳이 ‘부여 엄리대수’라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
둘째,「능비문」을 통해 볼 때 동부여는 285년 이전에 이미 건국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북으로는 읍루·부여와, 남으로는 예맥과 접했다”고 한『삼국지』동이전 동옥저 조 기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동옥저(함흥~함경북도 소재)의 북쪽에 소재한 세력으로 읍루와 부여를 지목했다.『삼국지』동이전 濊 條에 보면 “濊의 북쪽으로 고구려·옥저”가 접했다고 하였다. 濊의 북쪽에 이들이 모두 소재했다고 하였지만 고구려는 동예의 서북쪽이고, 옥저는 정북쪽이 된다. 즉 濊의 북쪽에 소재한 고구려와 옥저라는 兩大 세력 가운데 앞에 적힌 세력이 좌편인 서북쪽에 소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삼국지』의 방향에 대한 사례를 원용해 보자. 그러면 동옥저의 북쪽에 소재한 세력 가운데 읍루는 서북쪽, 부여는 정북쪽에 가까움을 알게 된다. 따라서 동옥저의 북쪽에 소재한 ‘부여’는 길림 일대가 아니라 두만강유역의 동부여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준다. 실제『삼국지』에 보이는 부여의 東界는 張廣才嶺까지였다. 장광재령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中滿洲의 東西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므로 길림시 일대의 부여가 두만강 하류와 함경북도 지역에 소재한 東沃沮와는 인접할 수가 없다.『삼국지』에 등장하는 부여가 동옥저의 北界가 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런 만큼『삼국지』동옥저 조의 ‘부여’는 동부여 외에는 달리 비정할 만한 대상이 없다. 이렇듯 동부여는 285년 이전에『삼국지』에서 이미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셋째,「동명왕편」과『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에는 주몽의 출원지를 동부여로 적어 놓았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이다.
C. 本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부여왕 해부루는 늙바탕에 아들이 없어 山川에 제사를 지내고 뒤를 이어 주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서는 큰 돌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아들을 내림이로다”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왕의 정승 아란불이 “요사이 하늘에서 저에게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울까하니 너희들은 여기를 피하라. 東海 가에 땅이 있는데, 迦葉原이라고 이르는 곳이다. 토지가 농사 짓기에 알맞아 도읍할 만하니라’ 하시더라”고 아뢰고는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겨 東夫餘라고 이름지었다. 그 옛 도읍 터에는 해모수가 天帝의 아들이 되어 와 도읍하였다.…
왕이 천제 아들의 妃임을 알고는 別宮에 있도록 했더니 그녀는 품속에 햇빛이 비치어 잉태했다. 神雀4년 癸亥 여름 4월에 주몽이 탄생하였는데 울음 소리가 아주 크고 골격이 뛰어 났다. 처음에 날 때 왼쪽 옆구리에서 한 알을 낳으니 크기가 닷 되들이 가량이었다. 왕이 이상하다고 여져 말하기를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不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를 외양간에 두었더니 모든 말들이 밟지를 않았고 깊은 산속에 버려도 온작 짐승들이 모두 지켜 주었다. 구름이 끼고 음침한 날이면 알 위에 항상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왕은 알을 가지고 오게 하여 그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였다.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男兒를 얻게 되었다. 낳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언어가 모두 정확하였다.
D. 시조 東明聖王은 성이 高氏이고 이름이 朱蒙이다[혹은 鄒牟 또는 衆解라고도 한다]. 앞서 扶餘王 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개구리는 다른 책에는 달팽이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天帝의 아들 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太白山 남쪽 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熊心山 아래 鴨淥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 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에 비치자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금와]은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 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 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주몽에게]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 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烏伊·摩離·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淹氵虒水[또는 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 고려의 鴨淥江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外孫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毛屯谷에 이르러[魏書에는 “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黙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克氏, 무골에게 仲室氏, 묵거에게 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卒本川[魏書에서는 “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다만 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高로써 성을 삼았다.
위에 인용된 C와 D의 주몽 출생 설화는 상징성을 띠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주몽의 출생 배경과 관련하여 동부여 성립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동부여 성립 과정은 주몽 출생담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서 맞물려 있다. 다만 설화상으로는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의 건국과 출생지인 동부여, 이 2곳에 주몽은 일정한 관련을 모두 맺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주몽은 설화상 해모수가 건국했다는 북부여와도 연결 고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주몽이 동부여에서 출원했음은 “王母 柳花가 동부여에서 세상을 뜨자 그 왕 金蝸가 太后의 禮로써 장례 지냈고, 드디어 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어 方物을 바치고 그 德에 보답하였다(E)”는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E 기사는 설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을 수록한 것이므로 허구로 돌리기 어렵다. 물론 E 기사는 동부여가 285년 이후에 성립되었다는 관점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부여=285년 이후 성립설 자체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실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까지 제기된 바 있다. 그러므로 기왕의 견해가 동부여의 태동 시기를 결정 짓는 傳家의 寶刀가 되기는 어렵다. 그런데 C와 D 기사를 통해 주몽왕과 관련한 구체적 실체로서 동부여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다. 게다가 앞의 E 기사를 통해 류화가 세상을 뜬 ‘동부여’와 고구려가 사신을 보낸 ‘부여’가 동일한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삼국사기』에서 ‘동부여’는 ‘부여’로도 표기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경우는『삼국사기』동명성왕 19년 조에서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왔다”는 기사의 ‘부여’가 동부여인데서도 뒷받침된다.
동부여의 존재는『魏書』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F.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妻가 잉태하였는데, 주몽이 도망한 후에 한 아들을 낳았으니, 字는 처음에 는 閭諧였다. 장성하게 되자 주몽이 國主가 된 것을 알고는 즉각 어머니와 더불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돌 아왔다. 그를 이름하여 閭達이라고 하는데 國事를 그에게 위임하였다. 주몽이 죽자 閭達이 이어서 왕이 되 었다. 閭達이 죽자 아들인 如栗이 죽자 아들 莫來가 이어서 즉위하였다. 그리고는 夫餘를 정벌하자 夫餘가 大敗하여 드디어 統屬되었다. 莫來 자손이 서로 傳하여 裔孫인 宮에 이르렀다.
위의 F 기사의 고구려 왕계를 살펴 볼 때 朱蒙→閭達→如栗→莫來…宮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 관계를 살필 수 있다. 여기서 閭達이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리왕을 가리킴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리고 宮은 제6대 태조왕이다. 문제는 夫餘를 大敗시켜 統屬시킨 莫來의 존재이다. 莫來를 字形이 유사한 慕本王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본왕대에 夫餘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고구려의 夫餘 정벌과 연관 짓는다면 22년(대무신왕 5)의 다음과 같은 동부여 정벌을 관련시킬 수 있다.
G. 2월에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平地를 가리어 陣營을 베풀고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여 긴장하는 모습이 없었다. 부여왕은 전국을 들어 나와 싸웠는데 고구려 군대의 방비하지 않음을 엄습하려 하여 말을 몰아 전진해 왔다. (그러나) 진수렁에 빠져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자 고구려왕은 이에 怪由를 지휘하였다. 怪由가 칼을 빼어 고함을 지르며 돌격하자 (敵의) 萬軍이 이리저리 밀려 쓰러지며 능히 버티지 못하자 怪由가 直進하여 부여왕을 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인이 그 왕을 잃고 기운이 꺾이었지만 오히려 굴복하지 않고 두어 겹으로 我軍을 에워쌌다. 왕은 軍糧이 다하여 군사가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天神에게 陰助를 빌었다. 홀연히 큰 안개가 끼어 7일 동안이나 지척에서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사람을 시켜 짚으로 만든 사람을 만들어 무기를 쥐어 陣營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를 벌여놓고 사잇길로 군사를 숨기어 밤에 탈출할 때 骨句川의 神馬와 沸流原의 大鼎을 잃었다. 利勿林에 이르러 군사들이 몹시 굶주려서 움직이지 못하자 野獸를 잡아 나눠 먹이었다. 왕이 還國한 후 여러 신하들을 모으고 飮至하여 말하기를 “내가 부덕한 바탕을 가지고 가볍게 부여를 치다가 비록 그 임금을 죽였지만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고 또 우리의 軍資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하고는 드디어 친히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방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로써 國人은 왕의 德義에 감동되어 모두 國事에 몸을 바치기로 하였다. 3월에 神馬 駏䮫가 扶餘馬 100필을 거느리고 함께 학반령 밑의 차회곡이라는 곳에 왔다.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曷思水濱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칭했다. 이는 부여왕 금와의 막내동생이니 역사상에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이에 앞서 대소가 피살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알고 從者 100여 인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러 海頭國王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그를 죽이고는 그 백성을 취하여 이곳에 와서 도읍을 정하니 이가 曷思王이었다. 7월에 부여왕의 從弟가 國人에게 말하기를 “우리 先王이 身亡國滅하자 백성들은 의지할 바가 없고 王弟는 도망하여 曷思에 도읍을 정하고 나는 또한 不肖한 사람이라 나라를 興復시킬 수 없다”하고는 이에 萬餘人과 더불어 來投하자 왕은 그를 봉하여 왕을 삼고 掾那部에 安置하였다.
위에 인용한 G 기사를 따른다면 F에 보이는 莫來 때 고구려가 부여를 統屬시킨 시점은 G의 대무신왕 5년인 22년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 정벌은 적어도 宮인 6대 태조왕(『三國史記』상: 53~146년 재위) 이전 어느 때임은 분명하다. 그러면 F에서 고구려가 통속시킨 부여와, 3세기 중반을 下限으로 한『삼국지』에 보이는 부여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는 “그 나라는 殷富하여 先世 이래로부터 일찍이 破壞된 적이 없다”고 했다. 적어도 3세기 중반 이전까지 부여는 外侵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놓인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삼국지』에 보이는 부여와 고구려에 大敗하여 1세기 전반경에 일찌감치 고구려에 統屬된 부여는 서로 다른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이 破壞된 적이 없다”는 부여와 고구려에 統屬된 부여, 적어도 2개의 부여가 1세기 단계에서 共存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사료가『삼국사기』태조왕 69년(121) 조의 다음 기사가 된다.
H-1. 10월에 왕이 扶餘에 行幸하여 太后廟에 제사하고 곤궁한 백성을 存問하여 물건을 내리되 차별이 있게 하였다. …11월에 왕이 扶餘에서 돌아 왔다.
H-2. 12월에 왕이 馬韓·濊貊의 1萬餘 騎를 거느리고 가서 현도성을 에워싸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兵 2萬을 이끌고 漢兵과 힘을 합쳐 拒戰하므로 我軍이 大敗하였다.
위의 H-1 기사에 따르면 태조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 태후묘는 태조왕의 어머니가 부여인이므로 태조왕의 母太后廟일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모태후는 태조왕이 유년에 즉위함에 따라 섭정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통치했던 태조왕 모태후가 부여 땅에 묻혔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 객관적인 판단이다. 반면 “王母 柳花가 동부여에서 세상을 뜨자 그 왕 金蝸가 太后의 禮로써 장례 지냈고, 드디어 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어 方物을 바치고 그 德에 보답하였다”라는 E 기사에 따르면 주몽왕의 모태후묘가 부여에 소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 땅을 탈출하지 못한 주몽왕의 모태후인 류화부인의 廟가 그곳에 소재하였기에 태조왕이 행차하여 제사를 올렸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더욱이 F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태조왕대 이전에 이미 부여를 통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왕의 부여 행차는 어려운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H-2 기사는 부여군과 漢兵의 연합 공격에 따라 고구려군이 대패한 사건을 기록했다. 여기서 H-1의 부여와 H-2의 부여가 동일한 국가라면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건인 것이다. 同年 11월에 왕이 부여에서 귀환했을 정도로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를, 그것도 바로 다음 月인 12월에 부여가 공격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H-1의 부여와 H-2의 부여는 서로 다른 별개의 국가로 지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더욱이 H-2는『삼국지』魏本紀에 등장하는 기사를 轉載한 것이다. 이 역시 “先世 이래로부터 일찍이 破壞된 적이 없다”는 길림시 일대의 부여를 가리킨다. 따라서『삼국사기』에 수록된 고유 전승을 토대로 한 H-1의 부여와 중국측 사서에 등장하는 H-2의 부여는 서로 다른 별개의 세력임을 다시금 환기시켜준다. H-2의 부여는 길림시 방면의 原夫餘를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H-1의 부여는 자연 동부여를 가리킨다고 볼 수밖에 없다.
넷째,『魏書』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동부여의 존재와 관련한 근거로서 제시해 본다.
I.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이라 한다. 주몽의 어머니인 河伯의 딸을 부여왕이 방 안에 가두었는데 해가 비치는 것을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 왔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들이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나 말들이 피해 다녔다. 뒤에 들판에 버려두었더니 뭇새가 깃털로 그 알을 감쌌다. 부여왕은 그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어미에게 돌려 주고 말았다. 그 어미가 다른 물건으로 이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가 성장하여 이름을 주몽이라고 하니 그 나라 俗言에 주몽이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고하여 그를 없애 버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치도록 하였다. 주몽은 말마다 남모르게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고는,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굼뜬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화살 하나로 한정시켰지만, 주몽은 비록 화살은 적었지만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자, 주몽의 어미가 알아차리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너를 해치려하니, 너 같은 재주와 경략을 가진 사람은 아무데고 멀리 떠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몽은 이에 烏引·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 大水를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게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河伯의 外孫이다. 오늘 도망길에 추격하는 군사가 바짝 쫓아오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 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 올라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騎兵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마침내 普述水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무명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과 함께 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여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하고 인하여 성을 高氏라고 하였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妻가 잉태하였는데, 주몽이 도망한 후에 한 아들을 낳았으니, 字는 처음 에는 閭諧였다. 장성하게 되자 주몽이 國主가 된 것을 알고는 즉각 어머니와 더불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를 이름하여 閭達이라고 하는데 國事를 그에게 위임하였다.
위의 I 인용문에서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의 딸을 부여왕이 방 안에 가두었는데 해가 비치는 것을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 왔다”고 했다. 아무런 설명없이 대뜸 주몽의 어머니가 부여왕에게 감금되었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동명왕편」(C)·『삼국사기』(D) 등에 의하면 류화가 감금되기 이전에 그녀가 중매없이 임신한 관계로 하백의 분노를 사서 우발수로 귀양 왔다가 부여왕 금와를 만나게 된 저간의 사정이 언급되었다. D의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라는 구절이 류화가 금와왕을 만나게 된 사건의 마무리가 된다. 그런 만큼 I의 冒頭에 적힌 “주몽의 어머니인 河伯의 딸을 부여왕이 방 안에 가두었는데”라는 느닷없는 구절은 이 설화의 시작이 될 수 없다. I의 冒頭에서 언급했어야 할 하백의 딸이 쫓겨나게 된 스토리는 후대에 추가되어『구삼국사』나『삼국사기』에 수록된 것 같지는 않다. 이 설화의 전후 정황과 사건의 추이에 비추어 볼 때『魏書』에서 생략한 것으로 파악하는 게 온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I의 ‘부여왕’은 동부여왕 金蛙를 가리키는 게 자연스럽다. 나아가 I에서 주몽이 아들을 잉태한 후에 탈출한 곳으로 적혀 있는 부여 또한 동부여가 되는 것이다. E에서 보듯이『삼국사기』에서도 ‘부여’와 ‘동부여’는 竝稱되고 있다.
그러한 I의 고구려 건국설화는『魏書』가 편찬된 고구려 당대에 유포된 것이다. 또 그 내용을 맞추어 볼 때『위서』보다 훨씬 후대에 편찬된『구삼국사』나『삼국사기』등에 전하는 설화와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동부여 금와왕 관련 고구려 건국설화는 고구려 당대에, 그것도『魏書』의 주된 대상 시기인 5세기 전반기에는 이미 형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실제『魏書』고구려전의 내용은 435년에 고구려를 방문한 李敖의 견문기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구려 건국자의 동부여 출원설은 한층 무게가 실린다.
다섯째, 주몽의 동부여 출신 기록과 관련한 설화소가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금와왕과 류화가 만난 장소를 태백산 남쪽 우발수라고 하였다. 이는 원부여가 소재한 길림시 일대 보다는 태백산 즉 백두산과 상대적으로 인접한 동부여가 소재한 지리적 정황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는다. 주몽의 북부여 출원 기록을 후대에 동부여 출원설로 바꿔치기 했다면 이같은 구체적인 지명이 내용상에까지 등장하기는 쉽지 않다. 주인공들의 소재지 즉 등장 무대의 변동은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설화의 기본 골격을 바꿔야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소왕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피살된 것을 보고, 그 從弟가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곳이 압록곡이었다. 류화가 해모수와 사통한 곳도 압록수 가였다. 동부여왕의 활동 반경내에 태백산이 등장하고 있다. 또 이곳과 연결되는 곳에 압록강이 소재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정황에 비춘다면『삼국사기』에 보이는 부여의 소재지는 지금의 길림시 일대라기 보다는 두만강 유역의 동부여로 지목하는 게 온당해진다. 더욱이 주몽의 이주 방향과 관련된 淹氵虒水 즉 개사수의 위치를 D의『삼국사기』에서는 압록강의 ‘동북쪽’이라고 하였다. 이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이주해 왔을 때 크게 틀린 방향은 아니다. 그리고 주몽의 남하 설화는 부여 동명설화를 판에 박은 듯이 원용한 것인 만큼, 사료 가치에 무게를 두기는 어렵다. 그러나 C와 D 기사는 분명히 동부여 출원설에 맞추어 쓰여진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와 줄거리가 부합되는『魏書』단계인 5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인식이 관류하였음을 알려준다.
물론「능비문」과「모두루묘지」에는 주몽의 북부여 출원설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적어도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에는 이미 북부여 출원설이 나왔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시조의 북부여 출원설이 동부여 출원설보다 먼저 생성된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능비문」이나「모두루묘지」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공식적인 선언이라고 할 때 역사적인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I의『위서』에 보이는 주몽 건국설화에는 省略된 부분이 많다. 주몽의 동부여 출원설과 관련한 내용들이나 지명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우연한 생략이나 누락이기 보다는 시조의 출원지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도려낸 후에 소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조의 동부여 출원이 사실이라면 여전히 고구려에서는 시조의 동부여 출원설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고구려의 축제 이름인 東盟의 ‘東’과 隧神을 맞이하는 國東大穴의 ‘東’쪽을 비롯해서 일상에서 동쪽을 우월하게 여겼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즉 “그 나라에서 일을 할 때는 동쪽을 首位로 삼았다(其國從事 以東爲首)”라고 하였듯이 풍속에서도 동쪽을 중시했다. 이는 고구려 건국 세력이 동부여에서 출원한데서 유래한 게 아닐까. 단순히 태양이 솟는 동쪽을 중시하는 것이라면, 고구려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삼국사기』에 보이는 부여 관계 기사에는 그 방향이 고구려 북쪽에 소재한 게 많다는 지적을 한다. 그럼으로써 고구려와 접촉했던 부여는 북부여이고, 곧 이는 주몽의 출원지를 동부여가 아니라 북부여라는 근거로써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유리왕 29년 조 기사는 북쪽의 부여가 파멸할 조짐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할 때 건넌 개사수를 압록강의 동북쪽이라고 했다. 여기서 북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이 아니라 원부여의 북쪽에 소재하였기에 그러한 방위명이 붙게 되었다. 동부여의 경우도 고구려의 동쪽이 아니라 원부여를 기준한 동쪽에 소재했다는 관념의 산물이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동부여는 원부여의 동남쪽이 된다. 그런데 동부여 영역은 원부여에서의 分派 루트와 결부지어 볼 때 고구려의 동북이나 북쪽에도 영토가 걸쳐졌을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해서 방위를 논해야 될 듯하다. 그 나머지 관련 기사도 대체로 이러한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여섯째, 고구려는 주몽왕대부터 북옥저를 점령하는 등 영토가 두만강유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즉 백두산 동남쪽에 소재하여 훈춘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한 행인국을 점령한 후 북옥저를 복속시켰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북옥저 일원에 소재한 동부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 이전에 두 국가가 상호 충돌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역으로 말한다면 고구려가 초기부터 이례적으로 동쪽으로 깊숙이 진출하고 있다. 그곳이 주몽 집단의 출원지였기에 익숙한 지역인 관계로 정복이 용이했을 수 있다고 본다.「능비문」에서 “동부여는 옛적부터 추모왕 속민이었다”는 기록은 이 사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일곱째,「능비문」영락 20년 조에서 동부여를 “鄒牟王屬民”이라고 폄훼시켜 기록하였다. 여기서 속민은 고구려가 버거운 경쟁 상대국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고구려가 전쟁을 벌여 일찌감치 統屬시킨 동부여에 대한 지칭으로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능비문」은 주몽왕대에 동부여가 존재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한다는 것이다.
여덟째, 주몽 도하설화는 북에서 남으로의 이동 과정을 말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설화는 고구려가 만든 독자적인 설화가 아니다. 즉 부여의 동명왕 건국 설화를 借用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주몽 남하 설화는 판에 박힌 전승에 불과하므로, 고구려 건국 집단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아홉째, 비록 어설프게 짜여져 있기는 하지만 동부여의 탄생과 관련한 국가 移動 說話는 北魏와 대륙 이주민의 이동과 관련된 고대 일본의 탄생 과정에서도 보이는 등 북방적 설화소로서 유서가 깊다.
4. 시조 출원지에 대한 인식의 변천 배경
지금까지의 검토를 통해 주몽왕대에 동부여가 존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주몽이 동부여에서 출원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문은 고구려 왕실이 왜 동부여 출원설을 지우고 북부여 출원설을 내세웠는가 이다. 주몽 집단이 동부여에서 출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몽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설화에 응결되어 전하듯이 갈등을 빚고 탈출해 왔다. 고구려 건국 이후에도 동부여와의 관계는 험악한 대립으로 일관되었다. 그런데 궁극적인 사실은 고구려가 선조들의 本鄕인 동부여를 결국 통속시켰다는 점이다. 비록 고구려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동부여까지 확대시켰지만 명분의 손실이라는 중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 따라 고구려 왕실은 동부여 출원설을 내세우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 점을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 왕실은 4세기 말경 근원적인 出自로서 원부여가 이동한 북부여를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원부여의 후신인 북부여 계승을 표방한 것이다.
역사상 부여는 건국 설화를 놓고 볼 때 원부여→동부여→북부여 순서로 성립하였다. 주지하듯이 346년 이후 원부여가 이동하여 북부여가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5세기 말을 고비로 만주에서 부여를 칭한 국가들은 모두 소멸하였다. 494년경 고구려에 투항한『삼국사기』에 보이는 부여는 그 실체가 동부여로 밝혀졌다. 동부여왕이 妻孥를 이끌고 스스로 歸附함에 따라 고구려 왕실은 本鄕인 동부여 통속이라는 ‘原罪’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또 그럼에 따라 고구려 왕실은 동부여 출원설을 복구해서 史書에 등장시키는 게 가능해졌다.
사실 그간 정치 선전문적인 성격이 강한「능비문」과 비록 산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무덤 속의 묵서명임에도 고구려 왕실에 영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모두루묘지」에 적혀 있는 주몽의 북부여 출원설을 맹신한 감이 없지 않았다. 주몽의 북부여 출원설은 문헌 기록과는 배치되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역시 부여에서 출원한 백제와 시종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538년에 백제 성왕은 천도를 통해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가적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했다. 성왕은 이에 걸맞게 끔 국호를 남부여로 改號함으로써 부여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 계승을 선포하였다. 이는 단순한 관념의 산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실제 백제 건국 세력은 부여에서 유래하였다. 그것은 백제 시조 설화 5건 가운데 무려 4건이 부여 계통이라는 점과, 백제 왕실의 성씨인 扶餘氏는 “ 그(백제)의 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써 씨를 삼았다(『삼국사기』백제본기 건국설화 조)”고 했다. 실제로 370년의 상황에서 북부여 왕실의 성씨로 부여씨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백제는) 부여의 別種이다(『구당서』백제 조)”라고 하였듯이 백제는 부여의 支派 즉 갈래를 가리키는 별종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472년에 개로왕이 北魏에 보낸 國書에서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여로의 改號와 관련하여 성왕은 그에 걸맞게 부여 시조인 동명왕을 자국 시조로 설정하였다. 백제가 汎夫餘族의 宗家로 행세함으로써 시조 역시 동명왕으로 새롭게 설정되었다. 동시에 성왕은 부여적인 전통을 강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727년에 발해의 武王 大武藝가 일본에 보낸 발해 최초의 대일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한 구절이 상기된다. 이 문구에서 느낄 수 있듯이 부여적인 전통은 부여계 국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상이기도 하였다. 그랬기에 부여가 멸망한지 200여 년이 흘렀음에도 발해왕은 자국의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기까지 한 성왕은 무엇보다도 부여적인 전통과 풍속 등을 각별히 내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국호 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부여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그로 인한 정통성을 과시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유별나게 강하였던 시점이었다. 그런 만큼 성왕은 백제의 제사 체계나 언어·복장과 같은 면에 이르기까지 부여적인 전통을 크게 강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부여로의 改號 이전에 고구려는 동부여와 북부여를 병합하여 전체 부여 국가들을 통합한 정통 계승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구려는 604년의『新集』편찬 단계에서 부여 시조인 동명을 자국 시조인 주몽과 일치시켜 인식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영향은 629년에 편찬된『梁書』에 일정하게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양서』에서는 고구려의 淵源을 탁리국에서 출원한 부여 東明에서 찾았다. 즉 고구려 시조를 멀리 부여 시조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감지되는 것이다. 北朝系 史書인『魏書』이래로『北史』와『隋書』등에서 고구려의 출원지와 시조를 부여와 주몽에서 각각 찾았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연개소문 집권 후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에 힘을 빼기 위한 차원에서 부여 시조인 동명은 고구려 시조인 주몽에서 분리되어졌던 것 같다. 이 점은「천남산묘지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동해 가섭원으로의 移住 건국설화에서 보듯이 동부여는 당초 북옥저 지역에서 건국되었다. 그런데 주몽왕대에 고구려가 동쪽으로 진출하여 북옥저 지역을 정복함에 따라 동부여는 그 압박을 피해 점차 서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럼에 따라 동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대무신왕대에 통속되자 훗날 다시금 원주지인 두만강유역으로 이동하여 고구려 지배에서 벗어났던 것 같다.「능비문」에서 “동부여는 옛적부터 추몽왕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았다”는 구절은 이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5. 맺음말
주몽 집단의 고구려 건국은 부여계 주민의 이동으로 간주해 왔다. 금석문이나 문헌 사료에 그와 같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몽 집단의 건국지인 환인 일대에서는 정작 중요한 부여 관련 묘제와 같은 물증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주몽 집단의 출원지를 부여로 기록한 사료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물론 환인 망강루 적석총에서 서차구나 유수 노하심 관련 유물이 출토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極少한 것으로서 주몽 집단의 출원지를 입증해 주는 큰 흐름과 결부지어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주몽 집단은 정착 지역의 토착 묘제인 적석총을 채용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이 사실은 주몽 집단이 강대한 토착 세력과의 타협이나 협조를 얻어 건국했음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정황적 증거로서 주몽 집단이 동가강이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소재하였던 舊高句麗國의 국호를 부활·계승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주몽 집단을「능비문」에서도 ‘創基’라고 했을 정도로 건국한 것은 사실이지만, BC. 107년 현도군 설치 이전 그 영역 내의 중심 정치 세력이었던 구고구려국의 국호를 부활시킨 것이다. 이 역시 주몽 집단은 이 지역 사회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구고구려국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국호를 부활시켰다. 이 역시 유망민을 主軸으로 한 주몽 집단의 취약한 기반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주몽 집단의 구고구려국 국호 부활과 계승으로 인해 고구려 왕실이 교체되었다는 인식이 『삼국지』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주몽 집단의 출원지에 대해서는「능비문」이나「모두루묘지」에서는 북부여로 명기하였다. 그러나『구삼국사』를 비롯한 문헌 자료에서는 동부여 출원설을 적어 놓았다. 여기서 동부여는 285년 이후에 성립된 게 아니라 주몽 집단의 건국 이전에 이미 존재했음을 밝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삼국지』동이전의 부여와『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부여는 서로 실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다.『삼국지』동이전의 부여는 길림시 일대에 소재한 부여인 반면에,『삼국사기』의 부여는 고구려의 동북부와 두만강유역에 걸쳐 소재한 동부여로 구명하였다. 고구려는 주몽왕대에 북옥저를 병합하였다고 했듯이 이미 두만강 하류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동부여는 그 중심축이 두만강 하류의 서북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무신왕대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그 북쪽에 소재하였던 동부여는 고구려에 統屬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4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는 前燕과의 대결로 피폐해졌다. 이 틈을 타고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쪽으로 중심축을 이동시킨 후 고구려로부터의 통속에서 이탈하였다. 이것을 다시금 회복한 것이 영락 20년인 410년 광개토왕의 동부여 친정이었다.
494년에 동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됨에 따라 만주 지역에서 부여의 법통은 단절되었다. 고구려는 주몽 집단이 동부여에서 출원했지만 本鄕인 동부여를 통속시킴에 따라 그 출원설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538년에 백제 성왕은 사비성 천도를 계기로 국호를 남부여로 改號하면서 국가 중흥을 크게 모색하면서 왕실의 법통을 부여에서 찾았다. 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북부여와 동부여를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부여 계승국임을 자처한 고구려는, 494년에 흡수한 동부여 계승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러한 선상에서 부여 시조 동명을 자국 시조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즉 동명과 주몽을 일치시켜 인식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주몽 설화의 주인공은 東明으로 換置되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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