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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
주제명: 고구려의 起源과 族源에 관한 제문제
일 시: 2007년 5월 3~4일(목, 금요일)
장 소: 경성대학교 누리관 이미지홀
주 최 : 고구려연구회·경성대인문과학연구소
6. 高句麗의 起源에 關한 考古學的 考察
發表 : 지병목 (경주문화재연구소) 討論 : 홍보식 (부산시립박물관)
1. 머리말
2. 요하 이동지역의 초기 금속문화의 발생과 그 추이
3. 압록강 중, 하류지역의 고고학적 양상과 고구려
4. 맺음말
高句麗 起源의 考古學的 考察
지 병 목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목 차>1. 머리말
2. 요하 이동지역의 초기 금속문화의 발생과 그 추이
3. 압록강 중, 하류지역의 고고학적 양상과 고구려
4. 맺음말
1. 머리말
최근 들어 고구려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가 한, 중 양국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삼국의 한 주축으로서 의심 없이 인식되고 다루어지고 있던 고구려사는 이렇게 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삼국의 맹주로서 민족사의 가장 우월적 자긍심을 일깨워 주던 고구려가 마치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되는 현재의 논쟁은 우리에게 역사 사실 이상의 의미와 충격으로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민족이라는 범주 속에 고구려를 어떻게 자리 매김하고, 규정지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인 채 말이다.
이러한 고구려사에 대한 위기감을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주요한 문제의 하나가 바로 그 기원(起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과연 고구려가 중원의 정권과 어떤 관계 속에서 태동하였으며 발전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이야 말로 고구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열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 사회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더욱이 그에 대한 역사 기록과 자료가 영성한 상황 하에 놓인 상고 시대의 그 것은 더욱 그러하다. 특히 대부분의 물질적 증거와 자료가 후대의 변형이나 말살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기원에 대한 단상을 지금까지 확인된 고고학적 물질 자료들의 일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 작업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고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찰하는 수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한 사회의 태생과 발전이 단선적인 과정과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엉뚱한 결과를 양산할 수 있는 오류마저 내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고구려가 생겨나는 시기 무렵의 주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상황을 살펴보고, 그를 통해 고구려 초기의 모습이 어느 부분들과 상사성(相似性)과 상이성(相異性)이 있는지를 검토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향후 고구려의 기원 연구와 관련하여 요구되는 몇 가지 과제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정리를 하고자 한다.
2. 요하 이동지역의 초기 금속문화의 발생과 그 추이
요하 이동지역의 현 중국 동북지방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알려지기 시작한 본계(本溪) 묘후산유적(廟后山遺蹟), 영구(營口) 금우산유적(金牛山遺蹟) 및 장산유적(藏山遺蹟) 등은 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한반도 내에서도 평양 검은모루유적과 연천 전곡리유적 등 유적의 확인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인류의 활동시기에 해서는 중국 내지의 것과 비교하여 그리 늦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단계인 신석기시대의 문화 양상은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양(沈陽) 신락유적(新樂遺蹟), 신민(新民) 편보유적(便堡遺蹟), 요동반도(遼東半島)의 대련(大連) 문가둔(文家屯), 석회요(石灰窯) 등 많은 유적이 알려져 있다. 압록강하류지역에서는 평북 신의주 미송리유적이 유적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른바 ‘미송리 하층문화’로 알려진 유형은 이 지역 일대에서 이 단계의 표지적 유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압록강 중류지역에서의 이 단계의 상황은 훨씬 미약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일대에 확인되고 있는 이 단계의 것들은 대부분이 정식의 발굴 절차를 거친 것보다는 수습 차원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 그 양상을 파악하는데 더욱 어려움을 주고 있다. 태상향(台上鄕) 황위자유적(荒葳子遺蹟), 두도향(頭道鄕) 장강유적(長崗遺蹟), 동촌유적(東村遺蹟) 및 요영향(腰營鄕) 이수유적(梨樹遺蹟) 등이 알려지고 있다. 특히 많은 유적들이 문화상으로는 석기문화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주변지역이 이미 금속문화의 단계에 이른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 역시 그러한 문화 양상에 노출, 혹은 직, 간접적인 영향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러한 복합적인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물질자료가 부족한 데에는 당시 이 지역이 지닌 특수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하 이동 지역에서의 물질문화의 양상은 금속기시대가 되면서 보다 명확해 지고 다양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지역의 금속기문화는 자생적인 발생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요하 이서 지역에서의 발달된 선진문화가 전래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요하 이서지역의 초기 금속문화가 보다 복잡한 양상(북방계, 중국계, 비파형동검계)으로 나타나는데 비하여 이동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을 표지로 하는 비교적 단순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은 이 지역 초기 금속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에 금속기가 언제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론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늦어도 2000년기 말에 이 지역에 금속이 알려졌으며, 1000년기 전반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은 요하 이동에 있어서도 지역적인 편차를 보이고 있음도 확인되고 있다.
우선 이 지역에서 금속기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는 그러한 금속의 보편적 사용을 전제로 한 문화권의 형성이 언제부터였는가를 규명하는 작업이며, 적어도 복합사회가 출현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의 큰 전제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복합사회를 규정하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보편적인 요소 중 하나이며, 비교적 그 실체의 유무 확인이 손쉽다는 장점으로 인한 그 표지로 금속의 존재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금속기를 통한 연구에서도 문제점은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지역의 금속문화가 자생적인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금속 유물의 계기적인 발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단계별 유형이나 유적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 유형의 유물이라 하더라도 그 공반 유적이나 유물 상에서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그들의 절대편년을 설정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지역의 초기 금속문화를 규명할 때 가장 표지적인 유물이 되는 비파형동검을 기준으로 그 출현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선동검기(先銅劍期)’, 와 ‘비파형동검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른바 ‘선동검기’의 양상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아마도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 지역의 초기 금속문화의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그 시기도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비교적 금속문화의 보급이 빨랐다고 보이는 요동반도지역의 상황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대련시 여순구구 철산진 곽가촌에 위치한 장군산, 노철산 및 우가촌 북산 등의 적석묘는 아마도 이 지역에 금속이 보급되기 직적의 상황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아직 이들이 금속의 존재를 인지하거나 사용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보다 명확한 양상은 우가촌 타두(砣頭) 적석묘유적일 것이다. 58개의 무덤곽이 확인된 이 유적에서는 풍부한 금속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청동촉(24호 무덤곽), 청동 낚시바늘(6호 무덤곽)과 같은 소형의 제품들이 확인되었다. 또한 소위 ‘미송리형토기’의 전단계로 보이는 집선문양이 있는 단지가 출토(30, 36, 40, 42호 무덤곽)되었다. 그리고 짧은 목에 구연부가 약간 밖으로 벌어진 배부른 단지는 강상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유사하여 이 유적의 하한을 규명하는데 참고가 되고 있다. 이 타두적석묘가 인근의 우가촌유적과 동시기, 혹은 조금 늦은 시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가촌 상층의 C14측정치(3230±90 B.P., 3280±85 B.P.)를 참고한다면 이 타두적석묘의 성격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밖에 요양 접관청 석관묘, 대련 대취자유적 제 1기층 등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지역에 금속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00년기 말(末)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추정된다.
초기 금속기 보급된 이후의 양상은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비록 어느 지역이 가장 이른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의 논란은 있지만, 요녕 동부지역에서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초기 금속의 보급에서 이른 양상을 보여주었던 요동반도 지역이 전형기의 모습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강상무덤의 금속문화 양상은 그 무덤의 구조, 매장 방식 등에서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부분이다. 비교적 풍부한 금속유물,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의 존재는 이 무덤이 지닌 고고학적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비록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누상무덤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무덤의 무덤 구조(적석묘)는 고구려의 적석묘와 관련하여 많은 논의가 진행된 바 있다. 한편, 요녕 동부지방(천산산맥 이동) 중 비교적 내륙 쪽에 속하는 요양이나 심양 등지에서도 초기 금속문화의 양상은 비교적 잘 나타나고 있다. 요양 이도하자유적이나, 신금 쌍방유적 등의 비파형 동검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특히 이들 유적에서는 도끼의 거푸집이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에서 자체적인 금속제작 기술이 성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소위 미송리식 토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닌 토기가 출토됨으로써 당시 이 지역 문화공동체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초기 금속문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 유적들은 대부분 적석묘나 석관묘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요하 이서지역의 동시기 비파형동검계 유적들이 주로 토광묘 계통인 것과 비교된다.
이 단계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또 하나의 표지적 유물로 취급되는 소위 미송리식 토기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송리형 토기는 압록강 하구인 의주 미송리 유적의 것을 그 표본으로 하는 토기로, 요동지방에서 서북한에 이르는 분포권을 지닌 초기 금속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양식으로 1960년대 이후 주목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다르면, 이 토기의 분포권은 주로 요녕지방의 내륙 및 북부권에 속하는 요양, 심양, 청원 등지를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좀 더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하여 이른바 묵방리형 토기를 포함하여 청천강유역 및 평양 인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초기단계의 모습은 우리가 고찰하려는 주 대상 지역인 고구려의 발생지인 압록강 중류지역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아직 이 지역이 이 단계에서 주변부에 속하고 있었으며, 그 문화적 단계나 계통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압록강 중, 하류지역의 고고학적 양상과 고구려
이러한 초기 금속문화의 양상은 심양 정거와자 6512호묘 유적에서 조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지금까지의 이 지역 금속문화의 양상을 계승하고 있는 모양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묘제 및 유물조합군에서 상당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돌무덤계인 적석묘나 석관묘 계통이 주류를 이루던 것에서 토광목곽묘라는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묘제로 포장된 채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공반 유물상에 있어서도 다른 유적의 빈약한 유물조합상과는 구별되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특히, 풍부한 마구류의 등장은 이 유적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는 데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그재그문양(검초 및 동경) 등의 등장은 후술할 후기 단계 압록강 중, 하류지역의 문화 양상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양상을 검토할 때, 이 유적은 이전 단계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적 유적으로 이 유적을 꼽을 수 있게 한다. 즉, 전 단계인 전형 비파형동검의 비교적 단순하고 느슨한 사회구조 형태가 보다 복잡하고 집중화된 모습을 보이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3점의 비파형동검은 그 형태에서는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으나 한 눈에 보아도 이미 전 단계의 것과는 구별되는 변형된(퇴화된 돌기 등)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위 정거와자 6512호묘 유적에서 확인된 동검과 유사한 형태의 것(혹은 그 것보다 좀 더 변형된)이 이후 요녕 동부지역에서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시기를 우리는 초기 금속기시대의 제 III 기로 설정하고, 이른바 ‘변형비파형동검기’로 분류한 바 있다. 이 단계의 문화 양상은 보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묘제에 있어서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돌무덤계통이 주가 된 형태에서 새로이 토광묘계의 출현 및 유행이 주목되는 현상이다. 비록 이 단계에서도 돌무덤계의 적석묘나 석관묘가 변형비파형동검을 반출하며 축조되고 있으나 그 주류는 이미 토광묘계로 변하고 있는 양상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대표적 석관묘계통이었던 서단산문화권인 길림 후석산(猴石山) 등지에서 이른바 ‘간화석관묘(簡化石棺墓)’ 라는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시기의 중심권을 형성하던 요양, 심양 등지는 물론,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도 이러한 양상의 변화는 공동적으로 진행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후기단계의 모습은 압록강 중, 하류 지역에서도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앞선 단계의 양상이 거의, 혹은 아주 미약하게 나타났던 것에 비하여 이 단계가 되면 좀 더 확실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특히 압록강 하류지역의 양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후기형의 변형동검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 발견유적이 변형된 적석묘나 석관묘계의 돌무덤이며, 어떤 통합적인 양상이 아닌 서로 독립적인 관계에 있던 집단들의 산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앞서의 정과와자 6512호 유적처럼 상대적으로 큰 세력을 지닌 정치집단의 수장에게 수반되는 모습을 보이는 유물조합상을 보이지 못하고 개별적 군소 수장에 해당하는 빈약한 양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또한 그리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곧 중국 한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유적들로 대치되어 그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지역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즉 후기 단계의 동검들이 나타나는 단계의 유적에서는 철기와 공반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 당시까지 중국 한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전현(寬甸縣) 쌍산자공사(双山子公社) 소산동리(小山洞里,) 유적처럼 명도전과 함께 철제 농공구 일색의 유물조합상을 보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상당히 빨리 이러한 후기 단계의 초기 금속기시대의 문화 양상은 후기 금속기시대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압록강 중류의 모습은 좀 더 다르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후기 단계에 이르러서도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풍부한 금속문화 양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신석기시대 이래 이 지역에 토착세력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은 여러 유적들로 증명이 되고는 잇다. 그러나 이른바 전형검은 물론, 후기형 동검의 존재도 이 곳에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다행이 최근 조사된 통화(通化) 만발발자(萬發撥子) 유적이 이 지역의 단계별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주목된다. 모두 6기층이 확인된 이 유적은 이 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이래의 계기적 발전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초기 금속문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제2기층과 후기 금속문화의 것인 제3기층 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길게 설정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지역의 초기 금속문화 양상이 상당히 느슨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반면 제3기층과 제4기층의 시간적 간격 및 연속성은 앞의 것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며 신속하게 전개되고 있다. 환인(桓仁) 대전자(大甸子) 유적의 동검편 등의 존재는 아마도 이 3기층에서 출토된 동검편과 같은 유형의 것으로 이들이 곧 바로 원고구려사회의 주된 구성원으로 포섭, 융화된 세력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지역 후기단계의 금속문화를 논하는데 있어 가장 논란의 중추에 있는 집안 오도령구문(五道嶺溝門) 적석묘 유적이 있다.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 유적이 이 지역의 고구려 성립 직전의 대표적 양상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유적이 지닌 적석묘라는 구조, 그리고 수습된 변형동검과 검초, 그리고 거미줄문양(혹은 葉脈文)이 있는 동경(銅鏡), 유엽형 동모(銅鉾), 동부(銅斧) 등은 고구려 성립 직전의 압록강 중, 하류지역의 금속문화를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를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철촉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없는 한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사실이다.
무덤의 양상에서 보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초기 금속문화의 후기 단계에 아주 짧은 시기 동안 압록강 하류에 그 모습을 나타냈던 개별적 적석묘계 담당자들이 곧 바로 압록강 중, 상류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조사된 길림 장백현(長白縣) 간구자(干溝子) 적석묘군이 주목된다. 이 무덤군은 크게 4개의 군으로 나눌 수 있으며, 1개 이상의 무덤곽을 지닌 주 묘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수기의 연접, 혹은 부속적 성격을 지닌 적석묘들이 축조된 집단묘장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화장의 흔적도 보이고 있다. 특히 이 곳에서는 연대 추정이 쉬운 ‘일화(一化)’, ‘반량(半兩)’과 같은 전국시대 연나라나 그 이후인 한의 화폐가 발견되었다. 이는 이 무덤군이 축조된 것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무덤들은 압록강 하류를 거쳐 올라온 적석묘 축조집단이 중류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까지 올라와 정착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추정된다. 비교적 느린 발전단계를 거치면서 개별묘장보다는 집단묘장이 유지된 경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무덤군에 대한 보다 깊은 고찰을 통해 향후 고구려 적석묘의 성격 및 축조과정에 대한 많은 문제들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고구려 초기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그 기원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초기의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충분한 자료나 연구가 만족스런 수준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 유적에 해당하는 적석묘 등에서 출토된 물질자료가 그리 풍부하지 않은 데에도 그 이유가 있기는 하나, 앞으로의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물질자료의 하나인 초기의 토기에 대한 자료는 더욱 엉성한 편이다.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유적의 상층에서 발견되는 토기를 표식으로 하는 니질태토(泥質胎土)와 마연(磨硏), 교상파수(橋狀把手) 등의 속성을 지닌 초기 고구려 토기가 기존의 주변 토기 양상을 수용, 발전시킨 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견해 등을 토대로 보다 폭넓은 자료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기의 철기 자료들에 대한 연구는 이 일대에 기원전 3세기경부터 서서히 전국계(戰國系)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초기철기문화(후기금속기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연화보(蓮花堡)-세죽리유형으로 알려진 초기 철기의 양상은 고구려 지역에서의 철기문화 전통이 전국-한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고 발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남리, 토성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제철유구나 철기 등을 통해 기원 전후시기에 자체적 철 생산 기반은 물론, 독자적인 철기 생산이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 위한 고고학적 물질자료는 아직까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향후의 자료의 증가는 물론, 이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4. 맺음말
고구려의 기원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작업은 현재로서는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적어도 고구려 성립 이전 시기 요하 이동의 고고학적 양상은 지역적 분화와 편차를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압록강, 중류지역의 상황은 초기 금속문화기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느린 발전 단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역에서 보다 빠른 고고학적 물질자료의 변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기원전 4-3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초기금속문화의 최후기 단계에 이르러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시기 다른 지역이 전형비파형동검에서 검신 중앙의 돌기나 하단부의 부풀기가 약화되는 이른바 ‘퇴화형동검’이나 과도형동검(직인에 가까운 세장형)을 표식으로 하는 것으로 변한데 반해, 이 지역에서는 변형동검(검신 하단부가 각을 이루며 넓어진 형태)이라는 약간은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 지역이 이후에도 비교적 자기의 독자성이 강한 문화 현상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묘제의 면에서 볼 때, 여타의 모든 지역에서 토착의 돌무덤계가 토광묘계로 변하고 있음에도 그 영향에 휩싸이지 않고 적석묘라는 무덤 형태를 채택, 발전시키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묘제의 채택과 유지는, 비교적 완만하고 지역적 색채가 강하지 않던 압록강 중류지역의 기존 토착세력의 영역 내에 상대적으로 독자성이 강한 적석묘 축조집단이 정착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이 지속적으로 이 지역 일대에서 상당히 배타적 영역을 유지한 채 오랜 기간 동안 적석묘를 유지, 발전시킨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적석묘 축조의 전통이 고구려가 지닌 가장 고구려적인 특징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中國考古集成』(東北卷) (北京出版社) (전 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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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文物局 主編, 2001,「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1999中國重要考古發現』, 文物出版社,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등, 1997, 「通化市王八子遺址及附近幾處地點的調査與發掘」『博物館硏究』1997-2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등, 2003, 「吉林通化市王八子遺址二十一處墓的發掘」『考古』2003-8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3,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2003-8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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